[605] 대운이 나빠서 우울한자여 크게 웃을지니~!

작성일
2013-09-16 06:5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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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 대운(大運)이 나빠서 우울한자여 크게 웃을지니~!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상쾌한 새벽공기가 너무 맛있다고 해야 하나요? 하늘은 쾌청하고 기온은 싸늘한 것이 흐리멍텅했던 정신들이 산뜻하게 깨어나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룡산의 새벽은 이렇게 밝아오고 있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꼭두새벽에 잠이 깨었습니다. 다시 잠을 청하기도 어정쩡하고 해서 글방으로 나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또 책도 뽑아서 읽어보다가 했습니다. 왕정지(王亭之) 선생이 출간한 《周易象數例解(주역상수례해)》도 뒤적거려봤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 놨네요. 언제 시간을 내어서 정독을 해야 할까 싶습니다.

왕정지 선생은 자미두수랑 현공풍수만 연구하셨나 했더니 드디어 주역에 눈길이 가셨는가 봅니다. 아마도 역학을 연구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종점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타게 되는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주역이 그 마지막 열차라면 말이지요.

그러다가 문득, 항상 의혹의 눈초리로 의심하고 있었던 대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한 말씀 드려봅니다. 특히 대운이 나쁘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를 우울하게 바라보고 계셨던 벗님들께는 희소식이 될 수 있겠지 싶습니다. 물론 대운이 좋다고 기대하셨던 벗님께서는 이하의 글을 읽지 마시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얼버무립니다. 하하~!


1. 대운(大運)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아시다시피 대운은 《淵海子平(연해자평)》에서부터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거의 명리학과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것은 자평선생이 만들었을 수도 있고 그 이전부터 간간히 응용되었던 것을 자평선생이 정리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추론을 할 근거가 마땅치 않으니 그냥 짐작만 해 볼 뿐입니다. 다만 참고를 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李虛中命書(이허중명서)》가 연해자평보다는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참고자료를 인용한다면, 여기에서도 대운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太歲爲君王(태세위군왕)大運爲元帥(대운위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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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세 즉 세운은 군왕이라고 했으니 임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대운은 원수라고 했으니 장군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로 봐서도 이미 세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으로 논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장군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지요.

대운이 탄생하게 된 것은 월주로 인해서라고 하겠는데 남녀의 연간에 따라서 월주가 순행하거나 역행함으로 인해서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길흉의 작용이 나타난다고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적용하기에 따라서 누구는 10년을 모두 간지로 대입해야 한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간지를 5년씩 나눠서 대입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나아가서 천간은 3년으로 보고 지지는 7년으로 봐야 한다는 설도 있으니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라고 할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면, 뭔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드러나지 않은 길흉으로 인해서 이렇게 구구한 이론들이 생겨나게 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맷돌맞듯 벽돌쌓듯 착착 맞아떨어졌다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을테니 말입니다.


낭월도 이리저리 대입을 하다가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보여서 급기야는 연간으로 대입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일간으로 바꿔서 대입하여도 봤습니다만 그래도 뭔가 께름칙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예 대운에 대해서는 자평명리학에서 떼어버리는 것이 타당하거나 번뇌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실로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은 '명리학의 심화 시리즈①'로 《用神(용신)》을 출판했고 그 다음편에서는 《運勢(운세)》를 준비하고 있다 보니까 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오늘은 아예 한담으로 생각들을 정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운세편을 정리하는데 반영이 될 것은 자명하다고 하겠습니다.


2. 대운은 허상(虛像)일 뿐!


만물의 형상에는 실상(實像)과 허상이 있습니다. 진리로 모인 것을 실상이라고 한다면 거짓으로 모인 것을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은 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신기루(蜃氣樓)가 허상의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것이 어찌 그것 뿐이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에서부터 진실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재물은 실상일까요? 생각에 따라서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실상이 될 것이고 출속적인 사람에게는 허상이 되겠네요. 이렇게 보기에 따라서 허실의 관점이 달라지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는 생명체도 모두 허상이라고 했으니 그에게 이러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상 싶기도 합니다. 하하~

그렇다면 대운은 왜 허상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월주를 빙자하여 헛되이 늘어붙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월일시는 실상일까요? 아마도 그렇다고 봅니다. 만약에 연월일시조차도 허상으로 관찰하는 관점에서는 이미 자평명리학 자체가 존재할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겠으니 이것은 자평명리학도 허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료범선생에게는 자평명리학의 연월일시도 허상입니다. 그리고 팔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만약에 사주팔자 자체를 믿지 않고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본다면 사주도 허상일진대 그 사주로 인해서 만들어진 대운은 그야말로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어쩌면 인생 자체도 꿈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 말도 전혀 무근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도를 깨달은 사람이 한바탕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하면서, '꿈 속에서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니 산은 푸르고 물은 잔잔하구나~!'라고 했을 것으로 짐작만 해 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자평학자에게는 간지의 연월일시 조합은 실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용을 분석하여 풀이하였을 적에 적어도 열에 아홉은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열에 다섯만 부합이 된다면 자평명리학도 바로 집어던질 낭월입니다. 그래서 사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우주를 몰라서 땅이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서 비웃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할 참입니다. 흐~ 


아, 왜 열에 열이 모두 부합되어야만 참 진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셨다면..... 하하~ 글쎄요.... 우둔한 낭월의 소견으로는 '세상에 그러한 진리가 있을까?' 싶은 생각만 해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일단 대접상으로는 열에 아홉은 부합이 된다고 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1백 명 중에 99명은 대체로 사주의 이치와 부합이 된다고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학문을 믿지 않는 사람이 봤을 적에는 미친 놈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냥 쉽게 열에 아홉은 맞더라고 할 뿐이지요. 


여하튼 연월일시에 대해서 명리학자는 실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겠군요. 그러니까 월주는 실상이지만 그 월주를 빙자하여 순행하든 역행하든 그것은 사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으로 정리를 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월주의 다음 간지는 다음 달에 태어날 사람의 몫이고 월주의 지난 간지는 이미 전 달에 태어난 사람의 몫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지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나름대로 그럴싸 한 이유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3일을 1년으로 삼는다는 식의 소위 '대운의 공식'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또 절기까지의 3일이 왜 대운의 1세냐고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3일은 간지로 36시간이고 36시간은 얼렁뚱땅해서 360일이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숫자놀음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만히 분석을 해 보면 참으로 황당하고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이야기로 보이기조차 한 이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의 연유를 생각해 보면 과연 대운이 존재해야 할 이론적인 공간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렇게 정리를 한다면, 적어도 대운의 존재에 대해서 매달리는 마음만큼은 느슨해 질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대운이 나쁘다고 해서 세상의 희망이 전혀 없어진 것처럼 우울해 하시는 벗님들에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버티는 대운의 힘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생명력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오래도록 대략 따져서 80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살아있는지 말이지요. 소쿠리에 담긴 콩깍지를 털어버리듯이 그렇게 툭툭 털어버리면 참으로 개운할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로는 아마도 먼 미래를 예측하는 엉터리 기상대(氣象臺)의 역할은 하지 않느냐는 점으로 인해서 그나마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딱히 버려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을 가능성에 대해서 무게를 실어봅니다. 그냥 둬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세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운이 아무리 좋아도 세운이 나쁘면 어쩔 수가 없다는 세운임금론을 내세우면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될 확율은 50%이므로 손해를 볼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확률이 50%라는 것으로 인해서 버려도 그만이고 그냥 둬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겠지만 여하튼 그것만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한다고 하지는 않으므로 어영부영 살아가게 되었을 대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야말로 일할머리없이 이렇게 그 존재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철없는 학자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라는 이야기이지요.

'혹 맞거나 혹 틀리거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이 되는 사람은 믿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거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세운이라는 탈출구가 있으므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로 인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초학자들이 사주를 적어놓고 대운과 세운의 관계를 궁리하느라고 스트레스를 적지 않게 받을 것이라는 점일 뿐.

낭월도 나름대로 여지껏 상담을 여러 명 하였습니다만 그 중에서 정말 사주와는 무관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던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조차도 어쩌면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느냐는 의혹을 감출 수가 없을 정도로 낭월은 사주팔자의 신봉자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열 명 중에 다섯 명은 대운이 맞는 것처럼 생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있으나 없으나 같다는 말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혹 이러한 생각이 주제넘은 낭월 만의 생각인가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서 고인의 감정하신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직접 감정한 자료를 책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도계(陶溪) 박재완 선생의 《命理實觀(명리실관)》이라는 책이 있어서 살펴봤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자료를 싣고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대운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세운에 대한 길흉을 논한 것이 많음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적어놓기는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를 생각해 봤지요. 그리고 결론은 도계 선생님께서도 대운은 신경쓰지 않고 계셨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낭월 혼자서만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예? 물귀신 작전이라고요?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도계 선생님은 왜 대운은 쓸데 없다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후학이 그것까지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짐작만 해 보건대 아무래도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사용해 온 것에 대해서 구태여 가타부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성품이 온화하셔서 괜히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는 것을 쓸데 없다고 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셨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4. 대운의 자리에는 주운(柱運)으로 대체(代替)하고...


이제부터 대운이 담당하던 것을 주운에게 맡겨버리자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래놓고는 대운에는 신경쓰지 말고 세운을 적용시켜서 길흉에 대한 관찰을 하는 것으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물론 그냥 사용하는 것이 편하신 분들은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일종의 사용허가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낭월처럼 뭔가 께름칙해서 찝찝한 마음이 드신다면 이참에 내방쳐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을 드립니다.


주운은 대략 20년으로 잡으면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15년 정도로 잡아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운명에 대한 암시는 사주에서 찾는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운로의 여정(旅程)에 대한 문제는 세운의 변수에 따라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연주에 기구신이 있으면 청소년기에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세운의 변수에 의해서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월주에 희용신이 있다면 청년기에 올바른 자리를 잡고 승승장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세운의 변수에 의해서 가감을 해야 하겠지요. 다만 대운의 세번째나 네번째의 간지의 의한 길흉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기준점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름대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만 그러면서도 여하튼 대운에 대한 찝찝한 문제는 마음을 두지 않음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더구나 대운이 나빠서 불안하신 벗님께는 더욱 힘을 내어 큰 소리로 설명합니다. '대운은 전혀 신경쓸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습니다만 주운의 활용성에 대해서 비중을 두다가 보니 점차로 대운의 색채가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 자꾸 드네요. 그러니까 책을 통해서 자평명리학을 공부하시는 경우에는 대운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용신이 매일 바뀌는 경우는 없으시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금운에 좋으면 금용신이고 화운에 좋으면 화용신으로 대입하려던 생각을 버려도 좋겠다는 의견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대운에 대해서 보따리질을 했습니다. 신살뭉텅이는 진작에 보따리질을 해서 어느 구석에 쳐박아 뒀는지 이제는 찾지도 못하겠습니다만 대운조차도 슬슬 보따리에 싸버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나마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은 대운으로 인해서 우울하신 벗님들께 희망의 메시지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아울러서 대운에 기대를 걸고 계신 벗님께서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또 혹시 모르니까 말이지요.

생각이 의문을 만들고 의문이 꼬리를 물다가 보면 가끔은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 오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그 엉뚱한 길로 빠져서는 아예 눌어앉아버리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삶의 여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주역을 생각하다가 엉뚱하게 대운을 잡아버린 꼴이라고나 할까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하하~

참으로 책 읽기 좋은 시절인가 싶습니다. 여름 내내 방치했던 책의 먼지도 털어가면서 건강하신 가을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앗 참~~!

대운은 환경이라고 했었는데 환경이 없어지면 어떻하느냐는 어느 학인이 메일을 보내셨네요. 그러실만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운이 환경이라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대운의 위치를 잡아주느라고 궁리를 해 본 것이었는데 그것자체가 허상이라고 한다면 대운에게 의미를 부여했던 환경도 삭제하면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환경을 삼느냐고 한다면 그야 당연히 원국이 환경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고민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럼 참고 되셨기 바랍니다.

2013년 9월 1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