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 제자마다 달라지는 개인지도의 묘미(妙味)

작성일
2014-06-30 06:5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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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 제자마다 달라지는 개인지도의 묘미(妙味)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한국축구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마무리를 지어버린 월드컵이 섭섭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또한 그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으리라고 생각하고 다음에는 더 잘 하기를 격려하는 것이 국민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선수의 체질과 감독의 체질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멈춰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감독도 선수도 모두 내면의 세계는 발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더욱 나은 내일로 향해서 말이지요.

어제는 날도 더운데 대중교통을 타고 공부하러 오시는 서울의 최 선생님을 상대로 운세에 대한 과정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하면서 문득 느낀 소감이 있어서 여기에 정리를 해 봅니다. 무엇보다도 배우는 학인이 열정을 갖고 올 적에 가르치는 선생도 반사적으로 열정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보면서, 공부의 3단계 인연을 생각해 봤습니다.

 

1.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독서인연(讀書因緣)


맨 처음의 인연은 책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서점에서 만나거나, 누구의 소개로 만나거나, 혹은 인터넷으로 만나서 책의 인연이 되면 비로소 독자의 인연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독자의 인연이 되면 책을 통해서 가르치는 인연에 동참을 하게 됩니다. 책을 통한다는 것은 저자의 객관적인 노력이 담겨있는 내용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서 내공을 키워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낭월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를 읽으면서 약180년 전에 생각을 담은 임철초 선생님의 흔적을 추적했었습니다. 임 선생님은 청(淸)의 도광13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서기로는 1833년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계사년(癸巳年)이 건륭 38년인 1773년에도 있었습니다만 아마도 당대의 황제에 대한 사주를 논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네요.

시일월년
壬丙戊癸
辰午午巳

선생의 사주입니다. 그래서 건륭38년의 계사년인 1773년의 무오월에 병오일이 있는지를 살펴보니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도광13년에는 무오월에 병오일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더욱 이러한 연대가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약 181년 정도 되었나요? 생각보다 오랜 세월은 아니었군요. 여하튼 그 분의 글로 인해서 간지의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은 책으로 만난 인연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문득 낭월의 《적천수강의》를 찾아봅니다. 1권에서 임철초 선생에 대해서 소개를 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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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뭐든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적천수강의 원고를 쓸 적에만 해도 자신의 무지함을 탓하지 못하고서 임 선생님이 언제 태어난 사람인지를 모른다고 딱! 잡아뗐군요. 흐~ 알려진 바가 없더라도 유추는 할 수가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지금 저 책을 썼다면 조금은 달라졌겠습니다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긴 합니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 사제의 인연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문자를 통해서 깊은 교감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상당한 곳까지 도달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은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부분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리고 하건충 선생님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네요. 그래서 낭월의 책 스승님은 적천수징의(혹은 천미)의 임철초 선생, 명학신의의 수요화제관주 선생, 그리고 팔자심리추명학의 하건충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의 수없이 많은 선생님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꼽을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DSC08547

책의 인연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왕초보사주학이 여전히 서점에 꽂혀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하게 됩니다. 책이 있어도 읽어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많은 명리서적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졌겠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광고를 아무리 하고 홍보를 해도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내용에서 선택을 받거나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낭월 자신도 책을 펴보고 내용이 시답잖으면 바로 덮어버리니 남들도 마찬가지일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네요.

그리고 책을 통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책의 인연으로 마무리를 짓는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없으므로 달리 방법도 없긴 합니다. 그러므로 최선의 노력은 책을 백 번 읽어서 그 뜻에 스스로 통달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하겠고 그래서 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독서의 인연이라고 보면 되지 싶습니다.

 

2. 동영상을 통해서 공부하는 시청각인연(視聽覺因緣)


세월이 변해서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동영상의 화면을 통해서 공부를 할 수가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되기도 했네요. 그리고 책으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 느낌을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책과 비교를 할 수 없는 효과가 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얼마 전에 열심히 봤던 증사강(曾仕强) 선생의 주역강의와 도덕경 강의를 보면서 느꼈던 부분입니다. 그리고 예전의 비디오부터 동영상 강의를 보셨던 인연들도 이에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증사강-1

 

증사강-2

이렇게 동영상으로 전해 받는 느낌도 상당히 효과적인 공부가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글자만 읽다가 표정과 이야기하는 어조에서 전달되는 것은 또 다른 분위기를 전해 주므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시청각의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낭월도 동영상 강의를 시작한지가 꽤 오래 되었지 싶습니다. 처음에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서 보급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DVD로 전환되고 다시 컴퓨터의 동영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었네요. 미디어매체가 급변하고 그에 따라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계속해서 변화를 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복사로 인해서 뜻하지 않은 '도둑제자'까지도 생겼습니다만 그것도 또한 인연이려니 합니다. 형편에 따라서 각자 공부를 하겠다는데 일일이 합법적으로 공부하라고 쫓아다니면서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지요. 하하~

책으로만 봐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동영상의 설명을 보면서 단박에 느낌이 팍팍 올 적에는 희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으로만 공부하는 것과 귀를 함께 동참시켜서 공부하는 것과의 차이는 매우 크다는 것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공부를 위한 많은 동영상들은 그래서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이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것은 동영상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개인지도를 통해서 공부하는 교감인연(交感因緣)


책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동영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느 방법을 찾던 간에 의문이 풀리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해결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한 번 깨달은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재학습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개선의 과정은 거칠 수가 있겠습니다. 개선과 재학습은 서로 다른 이야기라고 하는 정도는 이해를 하실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공부의 방법이 제각기 다르듯이 깨달음을 얻는 도구도 또한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낭월이 책을 보다가 하건충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중국어를 배워서 대만으로 갔을 적에는 책만으로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 나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책으로 해소되지 않는 상당부분이 있었는데 책을 향해서 아무리 질문을 퍼부어도 책은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영상도 이런 의미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동영상의 강의를 보면서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교감(交感)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즉 받기만 하는 것과 주고받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받으면 일방적(一方的)으로 수용을 해야 하는 것인데 반해서 주고받으면 상호교감(相互交感)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반드시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어제 공부를 하신 최 선생님의 경우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지도합니다만 어제는 다른 때와 또 다른 교감이 있었거든요. 운세에 대한 강의였습니다만 이야기를 하면서 부분적으로 상당히 세분화된 설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과 또 다른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었는데 그 이유는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과 전해 주는 자의 의식 사이에서 교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그 동안 개인적으로 가르치면서 교감이 되지 않았던 제자는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교감을 얻고 또한 의문점을 풀었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그 한 사람은 자신의 열망을 잘못 잡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기는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처음에 인연이 될 적에 무엇을 바라고 개인지도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발생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상황이라고 한다면, 선생은 선생의 소리만 하게 되고 제자는 제자의 바람에만 맞추려고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감이 이뤄지지 않았던 사람은 학자를 찾아와서 도사의 공부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선생님은 상세한 대입을 원하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자, 그 동안에 쌓였던 의문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정리가 되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코드가 맞물리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교감의 효과는 이런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네요.

책으로 깨달아도 되고, 동영상을 보고 깨달아도 되고, 직접 만나서 교감을 통해 깨달아도 됩니다. 그래서 각자의 인연에 따라서 공부하는 방법과 그에 따른 효과도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고인들의 말씀대로 '구전심수(口傳心受)'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외곡이 적을 수 있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책에 있는 설명을 보면서도 저자의 관점으로 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겠고, 그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오해는 생길 가능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선생은 '병화(丙火)는 태양과 비슷하다.'고 한 말을 제자는 '병화는 태양이다.'로 이해를 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는 일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력이 넓을수록 책으로 공부를 해서 성공을 할 가능성이 많지만, 이해력의 폭이 넓지 못한 경우에는 많은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해력은 책을 많이 읽으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교감을 통해서 한 방에 깨달아 버릴 적에 느껴지는 희열감(喜悅感)은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두 시간의 강의를 듣고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리고 새로운 공부의 의욕이 충만되어서 자리를 일어나는 제자를 볼 때마다 '오늘도 헛농사는 짓지 않았구나....'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서 공부의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벗님의 공부는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지 한 번쯤 생각해 보셔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인연에 따라서인지, 매번 음양도 강의하고 용신도 강의합니다만 어느 한 번도 같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같은 이야기로 끝나는 적이 없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저마다의 교감에 반응해서 설명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자신의 수준에 맞는 만큼의 깨달음을 얻어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개인지도라고 해서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평명리학의 이야기이며 그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묵었던 체증이 내려가는 효과가 있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내용은 다 같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같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공부하러 오는 제자를 만날 적에는 낭월도 약간의 흥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론 나온다고 해도 그 동안의 경험과 지식의 범주 이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비유를 사용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직유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그때마다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흥분을 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매 번의 강의마다 서로 같은 것은 제목뿐인가 싶습니다. 내용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준비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계획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던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목만 정해 놓고서 이야기는 흐름따라서 흘러갈 뿐입니다. 오늘은 동해안으로, 또 내일은 대서양으로 마음따라서 제자와 둘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한다면.

" 가르치는 즐거움, 배우는 기쁨"
내일도 천간에 대한 강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또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제자는 어떤 흐름으로 동행하게 될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반이라고도 하는가 봅니다. 앞 선 사람은 안내를 하고 뒤따르는 사람은 열심히 따르고 그렇게 하면서 길을 가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목적지에 도달하고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면 또한 한 단락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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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음양에 대한 동영상 강의를 촬영합니다. 그야말로 2014년 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화인이 강의한 동영상이 2008년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6년이 흘렀군요. 물론 이야기 내용은 시콜의 《음양》을 바탕으로 삼을 요량입니다. 그렇지만 결론이 어떻게 날 지에 대해서는 또 장담을 할 수가 없겠네요. 다만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와 교감을 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오늘의 낭월과 교감하면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로 인한 약간의 부작용(?)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또한 진보하면 진보했지 퇴보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제목만 뽑아놓고 비행기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유월도 마지막이네요. 앞으로 두어 달은 무지하게 더워야 할 것 같습니다. 모쪼록 더위에 잘 견디시면서 알찬 글 농사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서 가을에 깨달음의 수확도 풍성하게 거두시게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6월 3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