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아직도 정정 하시네요~~!!"

작성일
2014-03-2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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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9화] “아직도 정정 하시네요~~!!”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봄비를 맞은 버섯나무에서는 표고가 송이송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올 봄에는 맛있는 표고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호스로 물을 뿌려대도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감당할 수는 없는가 싶네요. 이틀간 내린 빗물에 이렇게 반응하고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방송 프로그램 제목이네요. 그런 제목을 보면서 나도 세상을 이만큼 살아 왔으니 이제는 말 할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쯤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담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아직도 정정 하시네요~!’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아련한 추억 속에 담겨져 있는 이 한 마디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가 싶습니다. 특히 이렇게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시간에는 말이지요.

  재미있자고 쓰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끔은 자신의 상념(想念)을 정리해 보려고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의 한담은 그런 의미에서 ‘추억여행(追億旅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은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벗님의 한 시절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하~~
 
 
2. 상담 중에 나눈 이야기가 촉발(觸發)이 되어
 
  형편에 따라서 방문을 하기 보다는 전화로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쁜 시대에 편리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가끔은 그리고 싶으면서도 진짜로 낭월스님이 상담을 해 주는지가 의심스러워서 찾아오는 경우도 없진 않습니다만 이미 낭월의 책을 본 독자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단추가 된 낭월을 신뢰(信賴)하고 면식(面識)은 없어도 오래 전 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인식이 되기도 하는가 싶습니다.

  며칠 전에 한 여인이 상담을 의뢰 했는데, 나름대로 상사병(相思病)을 앓고 있었던가 싶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쳐서 병이 되었다고 하면 적당할 듯싶습니다.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상담을 하였던가 봅니다. 그 여인은 40대 중반이었는데 언제 돈을 벌게 될 것인지를 묻지도 않고 남편이 언제쯤 승진을 할 것인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스님, 연인(戀人)이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이 사실 진땀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준비된 답변 속에 그러한 것은 없었거든요. 아니, 비싼 상담료를 내면서 국어사전만 펼치면 나와 있을 낱말을 물어 볼 것이라는 생각을 했겠느냔 말이지요. 그래도 질문은 받았고 뭔가 답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에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잠시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3. 대략 35년 전 쯤의 어느 날
 
  20대 초반에 대학이라도 가볼까 싶어서 어느 도시의 변두리 암자에서 불공을 해주는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다들 잘 알아 듣습니다. 절에서는 ‘부전살이’라고 합니다. 불전을 지키는 담당이므로 불공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약간의 용돈을 받아서 학원비로 쓸 수가 있기 때문에 젊은 향학열이 있는 스님들에게 필요한 직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 중에 한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이는 당시 낭월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을 겁니다. 나이는 축원문의 명단에 나와 있으니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사주공부는 몰랐을 때이기도 합니다. 그 여인은 절에서 100일기도를 하던 도중에 매일매일 참석을 하더군요. 특히 할머니들이 주류를 이루는 절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나 할까요? 눈에 띄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습니다. 하하~

  관심이 생기면 이것저것 알아가게 되어 있지요. 결혼을 했다는 것이야 당연히 알지요. 명단에 있으니까 말이지요. 아이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연등(蓮燈)을 제작하는데 기도를 하러 와서는 시간이 있었던지 저녁까지 동참(同參)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바래다주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다가 보니까 점점 묘한 감정이 생기더군요.

  ‘저런 여인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박(素朴)한, 혹은 음험(陰險)한 감정이었을 겁니다. 한참 팔팔할 나이이니 욕망(慾望)이 없었다고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러한 입장을 말하고 고백을 할 뻔뻔함도 없었던 촌뜨기 애숭이였으니까.... 이른바 속알이나 하고 있었겠지요. 이런 풍경이 그려지시려는지 모르겠네요. 참고로 지금은 횡설수설(橫說竪說) 잘도 떠듭니다만 그 때만 해도 여인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흐~

  하루는 바래다 드리다가 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차 한 잔 하고 가시겠느냐는데 그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지요. 집에 갔더니 멋진 수석들이 가득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남편도 계셨습니다. 수석을 감상하면서 남편에게 설명을 들었습니다만, 뭔 소리를 들었는지는 아무런 기억도 없습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나이 이야기가 나왔고 남편은 마흔 다섯인가 였습니다. 그가 내 나이를 물었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대접 상 그의 나이를 물었겠지요. 물론 명단을 통해서 적어도 부인과 띠동갑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낭월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입니다.

  “아직도 정정 하시네요~!”

  아, 물론 좋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이 마흔 다섯의 남자에게 할 말일까요? 참 기가 막히지요? 이것이 속마음일까요?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그녀의 남편이 병이라도 걸려서 세상을 떠나면 내가 지켜 줄 수 있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그 말을 한 순간 당황했습니다. 부인도 당황했고 남편은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허둥지둥 돌아왔고 그 후로도 부인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열심히 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뭔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은 자신의 양심(良心)이 죄스러워서 바래다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자기 처벌을 한 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학원엘 가는데 그녀가 우산을 쓰고서 공터의 자갈 무더기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리로 향했지요. 공사판에 쓰려고 강의 자갈을 실어다 쌓아놓은 곳에서 예쁜 돌을 줍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옆에 가서 함께 돌을 찾았습니다. 문득 옆을 바라보는 여인의 표정이 아직도 삼삼하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나 봅니다. 처음에는 생생한 영상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생각에 떠오르는 영상은 파스텔톤이로군요. 색이 약간 바랬나 봅니다.

 
4. “연인(戀人)”은 그리움일까요?

  연인(戀人)은 그리워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의 상담 의뢰자가 그러한 질문을 던졌을 적에 문득 이 여인의 영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옛 생각이 떠올라서 중언부언(重言復言) 손이 가는대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이러한 영상을 속에 감춰두고 있었던 자신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깨달음이 확~ 밀려 왔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아마도 살아있다면 나이는 69세 정도? 그쯤 되었겠습니다. 아마도 곱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은... 보자.... 80을 넘기셨겠군요. 만약 아직 살아 계신다면 이제는 ‘아직도 정정 하시군요.’를 해도 전혀 귀가 빨개지지 않을 것 같은 세월이네요.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 한 구석에서는 손도 잡아보지 못했던 한 여인의 영상이 남아있기도 한가 봅니다.

  아래에 붙이는 글은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생각해 봤던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혹 누가 연인의 의미에 대해서 묻거든 한 번 쯤 생각해 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남겨 봅니다. 모쪼록 추억 속에 있는 아름다운 한 조각들에 대해서 축하를 드립니다. 

                           2014년 3월 2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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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戀人)의 의미에 대하여”

 
'左絲右絲中言下心人'

  옛날에 어느 절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고등학생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좌사우사중언하심인이요~!” 그래 넌 연인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알고 살아라 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문자(文字)의 유희(遊戱)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니 그렇게 글자를 갖고 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연인이란 어떤 의미일까?

  연인(戀人)은 “그리운 사람”이다. 왜 그리울까?
  바라보고 싶어서 눈앞에 삼삼하게 그려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보고 싶어서 눈앞에 삼삼하게 그려질까?

  그와 하고 싶은 대로 환경적(環境的)으로나 공간적(空間的)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함께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정리를 할 수 있겠다. 그 말의 속에서는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懇切)하고 애절(哀切)한 마음의 희망사항(希望事項)이 고스란히 배어있어야 한다. 그냥 가끔 보고 싶은 것은 ‘그리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에 너무나 간절(懇切)하여 절절(切切)한 마음을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할 수도 없고, 스스로 혼자서 간직하기에는 너무도 가슴이 벅차고 아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런 것이 그리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간절함이 일반적인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해야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움을 이렇게 혼자서 주체하지 못해서 비명(悲鳴)을 지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에 존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연인(戀人)인 것이다.

  공간적(空間的)으로 이뤄지지 못해서 그리운 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이다. 옛말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자연(自然)의 현상(現象)이다. 그래서 자신의 자녀가 맘에 안 드는 상대와 사랑에 빠질 것 같으면 멀리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해서 해결이 된다면 이미 연인(戀人)과는 거리가 먼 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인은 그렇게 공간적으로 떼어놓는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더욱 더 그립고 보고 싶고 간절해 질 뿐이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가도 여전히 첫 날에 이별할 상황의 생생한 아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가 되어야만 비로소 그 둘은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공간(空間)의 장애물(障碍物)이 둘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연인은 그렇게 공간적으로 장애물이 있을 적에 더욱 더 그리움을 머금고 속으로 불길을 태우는 것이리라.

  환경적(環境的)으로 이뤄지지 못해서 그리운 것은 대부분 인간적(人間的)인 관계(關係)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장애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적에 비로소 그리움으로 가슴 속에 쌓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모(思慕)하거나, 남편이 있는 여인을 연모(戀慕)하는 경우에 발생하게 된다. 그 여인의 장애물도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것이야 비행기라도 타고 가서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라면 사람으로 인해서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찾아가서 마음대로 마음을 토로할 수도 없는 것이니,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리라.

  사람으로 길이 막혀서 간절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고통(苦痛)이다. 그래서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야 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이기에 팔고(八苦)의 여덟 가지 고통(苦痛)에 등재(登載)되어 있는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네 가지이다. 여기에다 다시 네 가지를 추가하면 팔고가 된다.

  1. 생고(生苦):태어남의 고통이다.
  2. 노고(老苦):늙어가는 것의 고통이다.
  3. 병고(病苦):병으로 신음하는 것의 고통이다.
  4. 사고(死苦):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의 고통이다.
  5. 구부득고(求不得苦):구하는 것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의 고통이다.
  6.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의 고통이다.
  7.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의 고통이다.
  8. 오음성고(五陰盛苦):오음이 왕성한 것의 고통이다.


  이 중에서 남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 가장 그립고 안타까운 것은 바로 애별리고이다. 이러한 고통을 겪고 나면 정신세계는 크게 성장을 하게 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의 아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수반(隨伴)된다. 물질적으로 구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야 마음을 비우면 된다. 미운 사람을 만나는 고통이야 미운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오음이 왕성한 것이야 스스로 조절하여 자중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고통이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참고로 ‘오음성고(五陰盛苦)’에 대해서 설명한다.
  오음(五陰)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색(色)은 외부에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색(色)이지만 귀에 들리는 것도 색이라고 하고 혀에 닿는 것도 색이며, 몸에 닿는 것도 모두 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受)는 것으로부터 내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다. 고운 것은 갖고 싶고, 맛있는 것은 먹고 싶으며, 보드라운 것은 몸에 감고 싶어지는 것을 말한다.

  상(想)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즐기게 된다. 그리고 구하고 싶은 마음과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욕망이 발생하게 된다.

  행(行)은 목적을 위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행동(行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다 갖고 싶고, 들리는 대로 다 듣고 싶고, 맛있는 것은 다 먹고 싶고 향기로운 것은 다 맡아보고 싶으며 보드라운 것은 모두 몸에 감고 싶은 것이다.

  식(識)은 그러한 과정으로 인해서 경험(經驗)이 쌓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식견(識見)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쌓이고 쌓이는 것을 오음(五陰)이라고 한다.

  오음이 왕성하다는 것은 결국 몸의 반응에 이끌려서 몸의 종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각(視覺)으로 쌓이는 것, 후각(嗅覺)으로 쌓이는 것, 미각(味覺)으로 쌓이는 것, 청각(聽覺)으로 쌓이는 것, 촉각(觸覺)으로 쌓이는 것으로 인해서 자연의 이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을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뭐든지 적당하면 행복(幸福)이지만 지나치면 고통(苦痛)이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음양(陰陽)의 법칙(法則)이다.

  그리움이란 아름다운 사람을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고,
  그리움이란 멋진 목소리를 귀로 듣고 싶은 것이고,
  그리움이란 그의 체취(體臭)를 코로 맡고 싶은 것이고,
  그리움이란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고 싶은 것이고,
  그리움이란 그의 몸과 하나가 되어 희열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오음성고(五陰盛苦)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촉각은 그 사람을 생각할수록 더욱 예민(叡敏)해지고 청각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적에 더욱 민감(敏感)해진다. 미각은 그 사람의 혀를 핥고 싶을 적에 더욱 외로워지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상사탑(相思塔)이다. 그리움으로 탑을 만든다는 말이니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쌓아야 탑이 된단 말인가.....

  이러한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적에 연인(戀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애인(愛人)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애인은 항상 만나고 애무하고 함께 밥 먹고 즐거워하는 대상(對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게로 비교를 한다면 연인이 2만 톤이라고 한다면 애인은 겨우 1톤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뭔가 비슷해 보이면서도 같은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쉬움이 있고 없음의 차이로 인해서 그만큼의 큰 격차(隔差)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갖춰졌다는 말이고 그것은 어린 아이가 뭐든 자신의 뜻대로 다 이뤄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니 우선은 행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삶의 여정에서 깨달음을 논한다면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인(愛人)은 부부(夫婦)가 되지만, 연인(戀人)은 철학자(哲學者)가 된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무수(無數)한 부부는 애인으로 출발한 것이고, 또 무수한 철학자(哲學者)는 연인(戀人)으로 출발을 한 것이다. 철학(哲學)은 고뇌(苦惱)가 없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고뇌(苦惱)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비록되는 것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중에는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적에 가장 큰 고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음적(陰的)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하고, 양적(陽的)으로 나아가는 것을 철학(哲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출발점(出發點)은 서로 같았지만 종착지(終着地)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완숙(完熟)된 영혼(靈魂)은 이러한 그리움을 승화(承化)시켜서 아름다운 꽃으로 개화(開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가 되기 위해 일부러 고통을 만들 것은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노라면 그러한 계기(契機)가 일어날 것이고 그러한 때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람은 알알이 영롱(玲瓏)한 사리(舍利)를 만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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