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 생화(生花)와 생화(生火)에 대한 이야기

작성일
2014-03-14 17:05
조회
4299
 
[제627화] 생화(生花)와 생화(生火)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눈의 수술을 한 이후로 웬만하면 글을 쓰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는 가족들의 극구만류로 인해서 한담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밥도 다 뽑았고 그런대로 까끌거리는 부담도 없어져서 잠시 한담이라도 올려야 하겠다는 의무감 내지는 즐거움으로 인해서 마음을 일으켜 봅니다. 낭월학당에 한담을 읽으러 찾아오시는 벗님께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도 쥔장의 예가 아니다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하하~

  아래의 이야기는 어느 방문자가 사랑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를 하시기에 곰곰 생각을 해 보면서 의견을 드렸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누군가에게는 또 생각의 가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정리를 해 봤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사유(思惟)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럼 변변치 못한 생각과 동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4년 3월 1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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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로(煖爐) 이야기

                        
  
  난로(煖爐)에는 나무가 필요하다. 난로에 불이 타기 위해서는 마른 나무를 넣어야 한다. 바짝 마른 나무가 필요하다. 젖은 나무는 불이 잘 붙지 않기 때문이다. 불을 때려고 서둘러서 젖은 나무를 넣고서 아무리 불을 붙이려고 해도 연기만 나고 불은 붙지 않는다. 기침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그렇게 애를 쓰지만 결국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른 나무를 찾게 된다.

  마른 나무를 난로에 집어넣으면 너무도 쉽게 불이 붙는다. 급한 마음에 얼른 추위를 녹이려고 서둘러서 불을 지피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강력한 화력으로 활활 타오른다. 이렇게 불을 지피고서 추위를 녹이면서 따뜻함을 즐기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젖은 나무로 불을 지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것은 서로에게 마음이 아픈 일이 될 것이다. 젖은 나무와 마른 나무가 같이 있으면 서로에게 아쉬워한다. 젖은 나무는 아직 불이 붙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마른 나무는 이미 활활 타오른다. 그러니 그 불길이 사위어지기 전에 얼른 상대도 불이 붙어줘야 하는 조바심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더 급하게 성화를 대지만 그것이 젖은 나무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젖은 나무의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다.

  젖은 나무는 천천히 말려가면서 불을 붙여야 한다. 매사에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아직 불이 붙을 만큼의 수분이 증발하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불이 붙지 않는다고 성화를 대는 마른 나무가 불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른 나무가 그러한 사정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젖은 나무도 아쉬움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마른 나무와 젖은 나무의 마음이 아프다. 이것은 젖은 나무의 허물인가? 아니면 마른 나무의 허물인가?

 

  마찬가지로 본인은 불이 붙을 준비가 다 되었있는데 상대는 아직도 물을 잔뜩 먹음은 채로 불을 붙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적에 조급한 마음에 허둥댄다고 해서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경우에는 젖은 장작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이니 뭐니하면서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과연 현명하다고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라고 하겠다.


 

2. 꽃의 개화(開花)에 대한 이야기

        

  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살아있는 꽃과 죽어있는 꽃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꽃을 화(花)라고 하고 죽어있는 꽃을 화(火)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둘의 본질(本質)을 본다면 모두가 나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花)는 열매를 보는 것이 목적이다. 자손을 번식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이 핀 다음에는 열매가 맺어야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장미는 열매를 필요로 하는 목적에서는 그래서 푸대접을 받게 된다.
 
     
 
  두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는 것은 자녀(子女)를 보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래서 어여쁜 아들딸을 얻어서 행복해 한다. 이것을 가정(家庭)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가정은 적막(寂寞)한 까닭이다. 이렇게 아이들과 부부(夫婦)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은 가정을 다복(多福)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화(開花)하여 결실(結實)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게 된다. 이것은 가정의 꽃이고 화(花)이다.
 
 
3. 열정(熱情)에 대한 이야기

      
 
  열정(熱情)은 불이다. 그리고 그 불을 피우는 것은 불이 아니라 나무이다. 나무가 불을 피워서 불꽃을 만든다. 이것은 불타버리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자녀에 해당하는 열매에 대한 목적은 없어야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을 화(火)라고 한다. 그렇게 서로 눈빛으로 불타고 육체(肉體)의 만남으로 불타고 정욕(情慾)으로 불타고 환락(歡樂)으로 불탄다. 이렇게 탈대로 다 태우고 나면 재가 된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재는 과거(過去)의 뜨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조용히 미소(微笑)짓는다. 이것이 열정의 종착역(終着驛)이고, 열정의 화(火)이다.
 
             
 
  열정에는 음양(陰陽)이 있다. 양적(陽的)인 열정은 만나자마자 활활 불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서로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다. 오로지 서로의 육체를 탐닉(耽溺)하고 쾌락(快樂)을 얻고 만족(滿足)해 한다. 또한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본능(本能)에 따른 성실(誠實)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전혀 거리낄 것이 없이 때와 장소를 찾아서 거침없이 성욕을 불태우고 서로를 애무(愛撫)한다. 그 순간(瞬間)만큼은 도덕(道德)도 체면(體面)도 아무런 장애(障碍)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열정이 있으니 음적(陰的)인 열정이다. 이것은 은근하게 타오르는 불길이다.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올라야 하는 아궁이의 장작과 같은 열정이다. 어찌 보면 타오르고 있는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그냥 멈춰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꺼진 것만 아니라면 분명히 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만히 있기만 한 불은 없기 때문이다. 불은 두 가지만 존재한다. 타거나 꺼지거나 이다. 멈춰있는 불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급하게 타오르는 양적인 열정이 볼 적에는 갑갑한 것이고 서서히 타고자 하는 음적인 열정이 볼 적에는 회오리의 태풍과 같아서 적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가는 미처 불도 붙기 전에 꺼져버릴까 두려워 할 수도 있으니 이것은 각각의 특성일 뿐이고 누구에게 잘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4. 또 다른 열정(熱情)에 대한 이야기
 
  여기에서 또 다른 열정(熱情)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다. 이것은 일단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준비되지 않았을 적에는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타오르고자 한다면 같이 타올라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성급한 불길이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느긋한 불길이 급한 불길에 보조를 맞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오래도록 불을 태워보려고 시도했던 많은 음화(陰火)들은 양화(陽火)의 성화를 견디지 못하고 지쳐서 포기를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마다의 인연을 찾아서 순례(巡禮)를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도(道)란 함께 하는 것이다. 음양의 결합[十]이 그렇다. 따로 존재한다면 이미 도(道)로써의 가치(價値)가 없는 것이다. 가로[一]와 세로[丨]는 서로 함께 있어야 도(道)가 되는 것이지 따로 있으면 그냥 1획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원래 가로획의 음(陰)은 세로획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로획의 양(陽)도 또한 가로획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원히 서로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제각기 살아가는 것이고 평범(平凡)한 것이며 도(道)와는 무관(無關)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한 깨달음이 있어서, 서로는 홀로 있음으로 외로움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려는 마음이 생겼다면 이것은 ‘도(道)의 입문(入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가로획[一]이 세로획[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정오(正午)의 한낮이 자정(子正)의 깊은 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로획도 가로획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합일(合一)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었을 적에야 비로소 상대를 나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일체감(一切感)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갈등(葛藤)이나 고통(苦痛)이 따를 것은 당연(當然)하다. 그 당연함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인해서 도(道)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포기(抛棄)와 좌절(挫折)을 맞보게 되는 것도 또한 겪어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반복하면서 도(道)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가 되었을 적에 비로소 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남녀(男女)사이 에서도 가능하고, 남남(男男)사이에서도 가능하며 여여(女女)사이에서도 가능하다. 물론 노소(老小)도 불문(不問)이다. 이것을 일러서 음양합일(陰陽合一)이라고 할 것이고 도(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완전함[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진정(眞正)한 환희(歡喜)이며 오르가즘이며 깨침이다. 이것을 화(火)의 열매라고 할 것이고 이것은 자녀(子女)를 얻는 화(花)의 열매보다 그 가치가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자, 어쩔 것인가?
  자신의 본성대로 활활 불타오를 것인가?
  아니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상대를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인내심(忍耐心)으로 기다릴 것인가?
  불타오르겠다면 열매를 포기하는 폭죽이 되어라.
  도(道)가 되겠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기다려라.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또한 그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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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드리는 후기: 2014년 3월 17일
 
  의견을 구했던 분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상담이 많은 도움 되었노라는.... 자신의 생각만으로 아쉬웠던 점과 불만이었던 점들을 되돌아 보면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다가 보니까 자신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를 살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불과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좋은 반응이 나타난다면서 전화를 주셨네요.
 
  그래서 삶의 길에 안내를 한다는 것이 때론 사주팔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답을 찾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쪼록 행복하신 나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인연이 계시거든 또한 잘 안내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