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 천하의 시선(詩仙)인 이태백을 기죽게 한 작품이라네요.

작성일
2014-02-04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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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4화] 천하의 시선(詩仙)인 이태백을 기죽게 한 작품이라네요.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입춘한파가 전국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동파피해가 없으셔야 하겠네요. 계룡산도 차가운 냉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제일 걱정은 화장실이 얼어 터지는 것인데 아직은 무사합니다만.... 또 모르지요. 조치는 했으나 하늘이 하기에 달렸으니까요.
 
  요즘《백수첨시해(百首籤詩解)》의 고사를 찾아다니느라고 그 재미에 푹 빠져있는 낭월입니다. 벌써 4년이 되어네요. 《백수점단(百首占斷)》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서 출판했던 백수첨시해인데 따지고 보면 시로 풀이한다고 해서 시해(詩解)인데 백수점단은 시를 해석하지 않아서 첨시해라고 하지 못하고 점단이라고 했습니다만 이제 시를 풀이하여 다음 판에서는 첨시해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를 찾다가 보면 그 속에 얽힌 일백 가지의 사연들이 저마다 한 사람의 삶에 얽혀있어서 찾아다니는 여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제는 《사기열전》을 뒤지다가 오늘은 또 당시(唐詩)를 훑는데 내일은 아마도 《초한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사와 고전의 사이를 누비면서 자료를 찾다가 보면 고인의 지혜와 마주치게 되는 과정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네요. 그래서 글값과 품값을 보상받곤 하는가 싶습니다.
 
  백수첨시해의 74첨은 「최무구관(崔武求官)」입니다. 백수점단의 74첨은 「두우조절계(竇禹釣折桂)」로 되어 있습니다. 책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만 이번에는 최무구관으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같습니다. 두 첨이 모두 상길(上吉)이니까요. 그래서 어느 것을 뽑든 결과는 같다는 말씀이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최무라는 이름을 갖고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벼슬을 구하였는지에 대해서 무슨 해답이 있으려나 싶어서 시해(詩解)를 찾아 봅니다. 함께 구경하시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목은 다른데 시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백수첨시해를 편집한 사람에 따라서 고사의 제목을 선택해서 그런가 싶습니다.
 
 
崔巍崔巍復崔巍 履險如夷去復來

身似菩提心似鏡 長安一道放春回
 
최외최외복최외 이험여이거복래
신사보제심사경 장안일도방춘회


높고도 험한 길이 무한히 반복이 되고 있으나
험한 길을 마치 평지 걷듯 하면서 돌아오니
몸은 보리수와 같고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오래도록 한길로 편안하니 봄이 다시 온 듯

 
  이렇게 되어 있는 시입니다. 최외최외복최외라고 중얼거리다가 보면 묘한 리듬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점괘가 상길(上吉)이라서 그런지 내용도 어려울 것이 전혀 없고 아무리 힘든 것도 쉽게 술술 풀린다는 느낌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시지요?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어찌 험한 지경인들 만나지 않겠느냔 말이지요. 다만 바라는 것은 그렇게 험한 것을 만나더라도 쉽게 넘어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최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탐색해야 하겠습니다. 자료를 찾으려고 하다가 보면 어떤 곳에서는 누군지 모른다는 말들이 자주 등장하여 자료에 목마른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지다가 보면 또 누군가는 고맙고 자상하게 꼼꼼한 자료조사를 해 놓은 보물섬을 발견하곤 감격하게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인터넷의 바다에서 보석을 줍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적이 어찌 한두 번이겠는가 싶네요. 

 
  崔武를 넣고 검색을 해 봅니다.
 
  
 
  최무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낭월이 원하는 자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네이버에서는 마땅히 소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자료를 검색해 봅니다.

 
 
 
  백수첨시해에 나온 이름이라는 도움이 되지 않는 자료만 쏟아져 나오네요. 그나마도 『여선조첨시해』에서는 「최무입조구관(崔武入朝求官)」으로 두 글자가 더 붙어 있다고 알려주네요. 여하튼 찾는 내용은 그것이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이리저리 뒤적뒤적하다가 다시 대만에서 구해놓은 책들을 뒤집니다. 
 
   

   이렇게 어느 구석엔가는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다만 찾을 수가 없을 뿐이지요. 여하튼 여기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최호(崔顥)라는 군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최무는 최호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이름으로 검색을 합니다. 

 
 

  이제 뭔가 제대로 찾은 것 같습니다. 중국역대인명사전이 자꾸 나오는 바람에 그 책도 한 권 주문했습니다. 8만여원이지만 그만큼 알찬 내용으로 보여서 말이지요. 책이 배달 되었습니다. 웅장하네요. 앞으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식인에 보니까 황학루가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아하~! 이 양반이 시인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따라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이태백을 기죽게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아마도 언제 이태백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으셨던 벗님들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리게 되네요. 하하~
 
최호(崔顥)는 당(唐)의 변주(汴州)사람이다. 현종(玄宗)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태복시승(太僕寺丞)과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냈다. 일찍부터 각지를 떠돌아 넓은 지역에 자취를 남겼으며 특히 시를 잘 지었는데 악부시를 잘 지었고 민간의 가사를 즐겨 사용했다. 그의 시 중에서  「황학루(黃鶴樓)」는 당나라 7언율시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밖에 「장간행(長干行)」과 「증왕위고(贈王尉古)」등이 유명하다.
 
  이 정도면 최무를 소개하는 자료로는 충분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고 다음에는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의 대표적인 시라고 하는 황학루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黃鶴樓』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석인이승황학거 차지공여황학루
황학일거불복반 백운천재공유유
청천역력한양수 방초처처앵무주
일모향관하처시 연파강상사인수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나버리니,
이곳에는 텅 빈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 번 간 뒤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 그대로 유유히 떠도네.
맑은 개천 건너편엔 한양나무 역력하고,
어여쁜 풀숲이 수북하니 앵무주로구나.
해는 서산마루 걸렸는데 내 고향은 어디인고,
안개 가득한 강 언덕에서 시름에 잠기었네


  과연 멋진 시네요. 이태백의 기를 꺾을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원래 뻥이 세기 때문에 괜히 최호를 추켜세우느라고 이태백을 물고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러한 자료가 있느냐는 의심증의 발동으로 다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러한 글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眼前有景不得道, 崔顥題詩在上頭  - 李白 -

안전유경부득도, 최호제시재상두  - 이백 -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니 멋진 시가 생각났건만 
최호의 시가 그 위에 있으니 아예 포기를 할 밖에
 
 
  참 이태백도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더 멋진 시를 짓기 위해서 끙끙댓을 법도 한데 상대의 수준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포기하고 '부득도(不得道)'라는 한 마디를 남긴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차마 마을 못하겠네... 쩝~~"이런 느낌이 살짝 들었습니다. 그래놓고서 자신은 오히려 봉황대로 가서 시를 지었다는 후일담은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분명히 고인들의 풍류는 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또 봉황대에서 이백은 어떤 시를 지었을지도 궁금해 지네요. 그래서 다시 봉황대를 찾아봤습니다.
 
登金陵鳳凰臺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상봉황유

鳳去臺空江自流 봉거대공강자류

吳宮花草埋幽徑 오궁화초매유경

晉代衣冠成古丘 진대의관성고구

三山般落靑天外 삼산반락청천외

二水中分白露州 이수중분백로주

總爲浮雲能蔽日 총위부운능폐일

長安不見使人愁 장안불견사인수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다고 하더니,
봉황은 가버리고 빈 누대에 강물만 저절로 흐르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그윽한 오솔길을 뒤덮고,
진나라 버슬아치들은 오래전에 무덤언덕이 되었구나.
삼산은 청천 밖으로 반쯤 걸려 있는데,
이수의 가운데는 백로주가 자리하네.
모든 것은 뜬구름이 해를 가리듯 했으니,
옛날의 장안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근심만 가득하네.


  『봉황대에 올라』를 보면서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다시 황학루를 되짚어 보니까 짝퉁이었다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 아마도 황학루의 시에서 엄청난 충격파를 받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봉황대를 적으면서도 조금은 뒷목이 땡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쪼매 들기도 합니다. 하하~ 이 정도라면 이백을 시선(詩仙)이라고 했으니 시성(詩聖) 정도는 해 줘야 하는데 그 자리는 두보(杜甫)가 차지하고 있었군요. 여하튼 이백이 그 후로 분발해서 시선이 된 것으로~~~

 
  연대를 보면 이백은 701~762년이고, 최호는 704~754이니 대략 잡은 추정치라고는 하지만 이백보다 3살 정도 연하인 것으로 나오네요. 그러니까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하튼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재미라고 하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황학루는 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니까요. 황학루 구경이나 한 번 하십시다.
 
  

  옛날의 황학루 그림인가 봅니다. 운치가 있네요.

 
 
 
  황학루 증명사진이네요.
 
  

  근래의 사진인 것 같습니다.
 
 
 
  크기를 원본대로 올렸습니다. 이 사진은 바탕화면으로 놔도 좋네요. 그리고 언제 한 번 놀러 가서 최호의 시를 감상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서 어디쯤 있는지도 찾아 봤습니다.
 
  
 
  황학루는 중국 湖北省 武汉市 武昌区 蛇山 西山坡 特1号에 위치하고 있군요. 양자강을 끼고 있는 위치가 그럴싸 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나는 길에 들리기는 애매한 위치가 되는 것 같고 일부러 목적지로 삼고 나서야 가능할 위치로 보입니다. 여하튼 또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갈 곳이 하나 생겨다고 생각하고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싯귀를 하나 찾아서 중국 천하를 유람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때로는 하루 종일 두어 개 밖에 진행이 안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또 보상을 해 주니까 재미로 말한다면 상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백수첨시해를 핑계삼아서 황학루까지 둘러 봤습니다. 먼 나들이에 동행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느 사이 입춘 시가 넘었네요. 오늘 새벽 7시 3분이 입춘이었군요. 모쪼록 갑오년 한 해도 하시는 일들이 뜻과 같으시기를 기원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2월 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