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 어린이집 문제를 바라보면서...

작성일
2015-01-19 11:28
조회
4247

[661] 어린이집 문제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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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새해 벽두부터 참 어수선하네요. 이런저런 일들로 연일 시끌시끌하여 산골의 공기조차도 술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린이집의 폭력사태로 인한 아이가진, 혹은 아이가 없더라도 모두 분개하는 마음이셨을 것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감로사의 몇 되지 않는 식구들의 반응을 보면 미뤄서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조금 해 볼까 싶은 마음을 일으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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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다 아시지요? 이러한 문제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아기와 돌봄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있어 왔습니다. 문득 생각나네요. 아기를 돌보는 유모가 부모가 없을 적에 수면제를 아기에게 먹여서 재웠다는 이야기.... 기억하시는 벗님도 계실 겁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식인데도 불륜남을 만나기 위해서 아기를 재워놓고 나가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최소한의 모성애도 기대하기 어려운 함량미달의 상황이라고 하겠으니 이것도 아기가 거리적거려서 그랬을테니 크게 봐서 어린이집의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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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우리나라의 이야기만도 아닌가 봅니다. 대만에서는 2005년도에 네살이 된 여아에게 계속 폭행을 하던 돌봄이가 급기야 끓는 물을 부어서 화상을 입힌 다음에 그 합병증으로 인해서 폐렴과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네요.  그러니까 아기와 돌봄이의 갈등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었지만 유야무야 된 것은 자신들에게 표를 주지 않겠다는 어린이집 원장들의 벌떼같은 반발에 부딪쳐서라고 하니까..... 뭐 다 그렇지요. 누굴 탓해본들 마음만 더욱 열기로 솟구칠 뿐입니다. 모두는 나만 아니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분노를 하다가도 곰곰 생각해 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겨야만 했는지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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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보육교사의 자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낭월이 알고 있는 어느 보육원을 관리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이들이 흘린 밥풀을 줏어먹기도 한다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아기들을 주먹으로 때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알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볼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볼 수는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심리를 연구해 보면 대략 이해가 됩니다만 인내심이 부족한 것은 관살의 부재이거나 사주가 혼탁한 원인이라고 할 것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들의 칭얼거림으로 신경은 예민해지고 월급은 상대적으로 넉넉치 않은 상황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사명감으로 희생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군형이 맞지 않는 일방적인 갑의 생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八字案例23-2【이 사주는 특정내용과 연관이 없음】


아마도 사주가 탁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충동적인 욕구를 조절하기가 어려워지고 치미는 분노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만 같다면 그 대상은 어리고 힘없는 아기들에게로 향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20%의 어린이집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의 극히 일부분이 노출된 장면으로 인해서 흥분하고 있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곳의 학대는 일일이 열거를 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카메라만 설치한다고 해도 조금은 감시하는 효과가 있을 가능성은 높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해결책이 아니라고들 말을 합니다. 카메라가 없는 사각지대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라도 학대는 이뤄질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뭔지를 생각해 봅니다.

 

2. 자기 자식은 일곱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


엄마의 자질이 부족하여 학대하는 것은 또다른 별개의 문제로 미뤄놓습니다. 일단 남의 손에 맡겨진 아이가 엄마 손에 있는 아이보다 덜 안전할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학대를 당하는 아기의 팔자도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고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기의 연주(年柱)에 편관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맞는 것도 팔자라고 한다면 너무나 혹독하겠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배제하고 일단 환경적인 요인만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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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식은 자신이 키워야 합니다. 그걸 누가 모르겠냐고 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일일이 다 반영한다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하겠기에 해결책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여하튼 말귀를 알아듣고 자신의 주장을 할 수가 있을 정도까지는 일곱살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까지는 엄마의 품에서 양육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살 네살바기 어린아기를 남의 손에 맡긴 다는게 말이 되나요... 참 슬픈 일입니다.

저마다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있겠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여 엄마들 가슴에 못을 박아놓으면 결국 그 피해자는 엄마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으로 인해서 가슴깊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어쩔 것이냔 말이지요. 무조건 아기는 스스로 키워야 합니다. 산골화상이 세상의 급박한 이치를 몰라서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직무유기이기도 하니까요. 무조건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는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겠지요.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자체에 따라서 아기를 낳으면 상금(?)도 준다더군요. 세째부터 보상금을 준다고 하던가요? 뭐 여하튼 이런 제시를 하는 자체가 이미 출산문제에 붉은등이켜졌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냉소(冷笑)가 배어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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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으면 돈을 준다지만 돈을 바라고 아기를 낳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또 어떤 상태일지...  그 법은 언제 바뀔지.... 그리고 제대로 아이를 많이 낳도록 독려를 하려면 이미 낳은 아이들부터 부양금을 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논리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야말로 탁상공론과 행정적인 효과만 바라보고 있는 벼슬아치들의 관점이라고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조령모개(朝令暮改)가 쉬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일을 내일인들 짐작이나 할 수 있어야 말이지요. 쯧쯧~~

[추신2015-01-23] 그런데 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네요. 아이를 키운지 하도 오래 되어서 전혀 몰랐습니다만, 엄마가 아기를 키우면 10만원에서 20만원을 주지만 어린이집에 맡기면 70만원 이상을 받는다는 군요. 이건 또 어디에서 나온 법이래요.... 쩝~ 그러니까 법을 만들면서도 아예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내몰 작정을 했다는 건가요? 물론 돈 몇십만 원에 아이를 위험에 방치하는 엄마도 문제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제도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엄마가 아기를 키우는 것은 모정에 호소해서 돈을 적게 줘도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일까요? 여하튼 참 알 수가 없는 법이기도 합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습니다만 곰곰 생각을 해 보면, 인성교육이 되지 않은 보육교사를 마구잡이로 양산해서 어린이집을 인가받고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빌미는 정부에서 제공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와서 전업주부가 아기를 맡기는 것은 제한하는 법을 만들자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뒤늦기는 했지만 나쁘다고는 못하겠네요. 그리고 당연히 집에서 아기를 돌보는 엄마에게는 70만원을 줄 거겠지요? 그렇지 않고 제한만 한다면 또 의미없는 땜질처방이라는 비난 밖에 더 받겠어요. 그리고 이러한 것은 고스란히 최고 통치자에게 부담으로 다가가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진퇴양난인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나라의 미래를 맡기는 일이니 얼렁뚱땅 하지 말고 깊이 좀 생각해 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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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았으면 일곱살이 될때까지는 엄마가 돌봐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이 아닐까요? 자연법에 입각해서 봐야만 그나마도 부작용이 가장 적은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에는 항상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자연법을 따르면 다들 불안한가 봅니다. 남들은 맞벌이로 저만치 앞서 가는데 아기만 붙잡고 있으면 어떻하느냐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왜 그렇게 허둥지둥 벌어야 할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한 기가 막힙니다.

하긴... 대통령 조차도 대학을 가리켜서 '대학은 산업이다'라고 하는 시대이고 보면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 세태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중심을 지켜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시류가 너무 급박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휘돌아 갑니다. 그 와중에서 정신을 올바로 붙잡아 두기도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네요. 배운 사람이 더 헐떡이는 사회.....

둘이서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중에 큰 비중은 바로 자녀의 양육입니다. 아이를 잘 가르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얼른 듣기에는 그럴싸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양한 조작들이 숨어있지는 않은가 싶은 의혹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가장 큰 것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자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아이만 키우다가 내 인생 다 늙어가면 난 뭐냐는 것이지요. 이러한 불안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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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옛 어른들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여자는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되는겨」라는.... 물론 남존여비의 의미도 있고, 그래서 또 발끈하시는 여성 분들도 당연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이것이 자연의 모습인 것을 말이지요. 남녀평등..... 참 좋은 말이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남녀평등은 인격적인 평등이니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음양의 이치에서 봐도 그렇지 않을까요? 남자는 남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여성은 여성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성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평등의 의미를 찾아야 하나요? 이것이 착각의 가장 큰 오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밖으로 활동을 하고 싶은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보냅니다. 자녀가 없다면 비로소 능력의 평등을 생각해도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일곱살 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적으로 부담을 져야 하는 어린이집 무상교육으로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한 돈은 아기 키우는 엄마에게 주면 되지요. 그렇게 되면 국고가 줄줄이 새어나간다는 말도 없어지겠군요. 인터넷으로 시험보고 자격증 따서 기껏해야 가정에 하나 아니면 둘이 있는 자녀들을 담당하고 있는데 자신의 아이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면서 인격형성이 되는지는 보살필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들..... 이러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녀 양육을 위해서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키워서 아기는 성장을 하겠습니다만 인격적으로 장애가 생기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그래서 테러집단으로 들어가게 된 다음에 비로소 허둥지둥해봐야 이미 늦어버린 일이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지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덮어두고서 눈에 보이는 것만 해결하려는 통치자들의 의식부터 개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러한 것을 기다리는 것은 돌장승이 아기 낳을 때일 것입니다.

 

3. 저마다의 욕망이 빚어놓은 결과물....


이럴 때에 사용할 적절한 용어가 있다면 양비론(兩非論)이 아닐까 싶습니다. 둘 다 틀렸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로 귀결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왜 둘 다 틀렸을까요? 정부도 틀렸고, 엄마도 틀렸고, 원장도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비론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미 앞서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으로 이유는 대신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은 역시 앞에 나왔습니다. 일곱살 까지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인생 다 늙어가는데요? 예... 그렇기는 하겠습니다. 그럼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버려 둔 채로 임시방편으로 어린이집 폭행 여성만 15년 감옥을 보낸들 해결이 된다고 생각할 국민은 별로 없을 것 같지요? 항상 내 아이는 어떻게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불안불안 하면서 한 시간 간격으로 스마트폰으로 아이가 있는 어린이집을 살펴보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뭐 어쩌겠어요....

어린이집 문만 닫으면 해결되나요? 그리고 그나마도 태부족이라면서요? 그럼 또 어쩌지요? 이렇게 해서 결국 소중한 가정의 꽃이어야 할 아이는 천덕이가 되고 마는 것인가요? 경제우선주의가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을 그냥 바라보면서 자위하는 것이 현실일까요? 남들도 그러니까....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럼 위로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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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이야기 중에 삭막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할 수가 없다고 하여 높은 장벽을 쌓아놓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것이 21세기의 대한민국 아닙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놓더라도 돈을 벌어서 임대주택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절박감을 갖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젊은 부모들..... 이해는 하지만 참 딱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신도 적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둘이 벌어서 모으면 되기는 하는 건가요? 해마다 치솟는 임대료 내기도 바쁘다던데 말이지요.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포함되려고 허둥대는 것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의 소용돌이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그렇게 망가져가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불안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이야 반드시 겪어봐야 할 것도 아니라고 하겠네요. 누구나 생각해 보면 알 일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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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탓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남탓만 하다가 아내도 죽이고, 자녀도 죽이고, 길가는 사람도 죽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뭐랍니까. 「모두 다 내탓이오!」라는 말이 한때는 유행도 했었는데 말이지요. 그게 가장 맞는 말입니다. 억지로 애써 상류층의 인물이 되어 보겠다고 온갖 방법을 찾아보면서 인생을 허비합니다만 발은 항상 그자리에 머물러 있지요. 왜냐하면 가진자들의 폭주를 자전거로 추월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것이 현실 아닐까 싶습니다.

 

4. 내면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자,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을 따라서 질주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의 진정한 의미도 생각해 보고, 작금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고, 어린이집에서 그러한 일이 생기는 이유가 뭔지도 생각해 봐야지요. 그래서 고인들께서는 「각하관조(脚下觀照)」라고 했을 것입니다. 「너의 발 아래를 명확하게 살펴보라」는 말이겠지요. 벗님께서는 그렇게 하고 계신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가슴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명료한 해답에 접근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머리로는 재벌이고 발은 진창에 빠져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있는 자들을 인정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꿈조차 버릴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한 생각 정도는 해봐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옆을 스쳐 지나가는 가진자와 있는자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면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기 쉬울 것이고, 그 결과는 기절아니면 졸도까지 가서야 멈추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어서는 너무 늦은 다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경제지수로 행복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행복으로 다가갈 징검다리를 발견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으로도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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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현실이지요. 문제의 비극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노예가 되거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벗님은 어디에 속하시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예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일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겠네요. 양반과 상민이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안타깝게도 부자와 빈자로 둔갑한 반상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투표권과 주민번호만 같다고 해서 평등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지요. 심지어 같이 일하고 같이 벌어서 공평하게 살자는 주의인 공산주의도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또한 반상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도 뇌물의 고리를 끊겠다고 정치인들이 애는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글쎄올시다....네요.

뭐 중국 이야기 한다고 해서 우리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실 건 없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모두 권력과 금력과 폭력이 어우러져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다못해 어린아이 30명을 모아 놓고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그 나머지야 말해 뭣하겠느냐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축소판이라는 말을 하지요. 모든 집단은 축소판이고 국가는 확대판이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종교인이니까.....'이런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뒤에 숨어서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교육자이니까....'라는 가면을 주기 때문에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성접대비 1백만원을 꺼내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의사니까...'라고도 하지요. 이 말은 의사는 돈보다 사람을 우선한다는 전제가 깔려있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는 그 말에 현혹되면 안 될 것입니다. 미신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의사미신, 종교인미신, 교육자미신..... 참 기가 막히지만 또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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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지 아시려나요? 나름 유명한 이야긴데.... 이것은 악골탑(顎骨塔)이랍니다. 이른바 턱뼈로 쌓은 탑이라는 이야기군요. 소름이 끼칠 수도 있는 자랑질을 이렇게 하고 있답니다. 사람의 턱뼈를.... 상아탑, 우골탑을 거쳐서 악골탑도 등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돈의 노예로 만드는 촉매제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상류사회로 가기 위해서 너도나도 의대를 희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의사미신을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물론 음식을 씹을 수가 없어서 수술한 경우는 예외로 합니다. 다만 이 턱뼈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신분상승을 위해서 뭔가 할 수가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을 정도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나중의 문제는 지금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만 합니다. 뭐 의사라고 다 그렇겠습니다만 시류(時流)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면도 있다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삶의 의미를 늘 생각하는 철학자의 관점으로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속물들의 형태입니다만, 어쩝니까. 세상이 그러한 것에 가치를 높이 부여하고 있으니 주체성이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지요. 그래도 지혜로운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가정의 따뜻함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는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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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면을 관조하고 자신을 살펴서 지혜롭게 살아야만 행복이 주어진다는 매우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이것이 행복해지는 길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모쪼록 낭월학당을 찾아주시는 벗님의 오늘은 행복한 하루이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어수선한 이야기를 널어벌여 봤습니다. 혹 불편하셨다면 양해 바랍니다. 낭월도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보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망념을 그려 봤습니다만 그래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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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9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