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모공정(毛公鼎)

작성일
2017-05-20 11:14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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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모공정(毛公鼎)


 

 

대만(臺灣)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은 언제 가봐도 흥미진진한 곳입니다. 이번에 나들이를 하면서도 여전히 경이로운 인간의 예술품들에 취해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고 고인들과의 대화에 빠져들었습니다.

 

1. 가슴에 담고 온 솥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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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청동 솥 하나가 마음에 담겨서 함께 귀국했네요. 예전에는 취옥백채(翠玉白菜)나 육형석(肉形石), 혹은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에 정신이 팔렸었는데, 이제 나이가 조금 들어가는지, 그렇게 화려한 것보다도 뭔가 문자적인 것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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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이 소중한 것은 솥이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박힌 문자들로 인해서인 것으로 보입니다. 엇! 사람인(人), 열십(十) 자는 보이네. 그나마 다행입니다. 위로가 되네요. ㅎㅎㅎ

이러한 곳에 쓴 글자는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한다던가? 이건 쇠에 쓴 것이니까 금문(金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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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 아무리 들여다 봐도 뭐 알 수가 있는 글자는 없지만, 그래도 바짝 들이대어 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인류의 유산이 되어서 오늘날의 한자가 완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귀하고 또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담아 와서는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솥 하나에 대한 이름 세 글자일 뿐인데, 놀랍게도 여기 저기에서 모공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구 튀어 나오니 오히려 낭월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그래서 또 그 이야기를 읽느라고 역사로 가는 열차에 동승하여 미지의 터널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동안 뭘 하느라고 바빠서인지 한담을 쓴 지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뭘 써야 하나... 했다가 이제 제대로 맘에 드는 이야깃꺼리를 찾았다는 즐거움도 한몫 했네요.

모공정04

듬직해 보이는 솥 하나.
이름은 모공정(毛公鼎).
만든 시기는, 주(周)나라 후기.

인터넷에서 가장 잘 된 사진으로 찾았습니다. 박물관에서 전시품을 유리막 사이로 찍었지만, 어두운 환경에서 제대로 찍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진의 품질은 그냥 솥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로 만족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윤곽만 담을 수가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자료는 이렇게 인터넷으로 찾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하겠네요. 사진이 작아 보이는 것은 클릭하면 되고, 더 큰 것은 다시 클릭해 보면 다시 커질 수도 있음을 안내해 드립니다.

 

2. 이 솥이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 바에는 누군가에 의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걸로 봐야 하겠지요?. 물론 궁금한 것이야  내용의 글귀들이지만 그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역사적인 이야기부터 추적해 봅니다. 그것이 벗님의 뜻이기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머리 아픈 글자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벗님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려는 낭월의 음모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글자 풀이 뒤에다 뒀다가, 자칫 앞에서 재미없다고 도망이라도 가 버리면 그것도 벗님의 손실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ㅋㅋㅋ

'하세명(賀世明)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이라는 이야기로 시작되네요. 이 자료는 위키피디아에서 얻어온 것입니다. 혹 링크가 궁금하실 벗님을 위해서 그대로 살려 두겠습니다. 그러니까 한자로 된 것에 마우스를 슬쩍 얹어 봐서 손가락으로 바뀌면 눌러 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만, 막상 눌러보니까 내용이 없는 링크가 대부분이네요. 이건 또 무슨 까닭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賀世明考證,《毛公鼎》於清宣宗道光二十三年(1843年)在陝西岐山周原(今陝西省岐山縣)被董家村村民董春生在村西地裡所挖掘,北京永和齋古董商蘇兆年、蘇億年兄弟聞訊而來,以白銀300購得,但運輸之際,被另一村民董治官所阻,買賣沒有做成。古董商以重金行賄知縣,董治官被逮下獄,以私藏國寶治罪。此鼎最後運到縣府,被古董商人悄悄運走,密藏於西安張燕昌之子張石瓠曾巧見此鼎,便把鼎內銘文摹繪成雙鉤圖,寄給浙江嘉興名士徐同柏,寫了《周毛公鼎考釋》文章。

'하세명(賀世明)의 고증(考證)에 의하면,'《모공정(毛公鼎)》은 청나라 선종(宣宗)의 도광(道光) 23년(1843年)에 섬서성의 기산에 있는 주원(陝西岐山周原)에서 발굴이 되었으니 지금의 지명으로는 섬서성기산현(陝西省岐山縣)이 된다. 동가촌(董家村)의 촌민(村民)인 동춘생(董春生)이 마을의 서쪽 땅 속에 있던 것을 발굴하게 되어서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북경(北京)의 영화재(永和齋)라는 골동품 상을 경영하던 소조년(蘇兆年)과 소억년(蘇億年) 형제(兄弟)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찾아와서는 백은(白銀)으로 300냥()을 주고 사게 되었다.

다만, 일이 꼬이느라고, 솥을 막 옮기려고 하던 차에, 같은 촌민이었던 동치관(董治官)의 훼방으로 인해서 매매는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반드시 이 물건을 구입하고 싶었던 골동품 상인은 거금을 행정관인 지현(知縣)에게 뇌물을 주고서라도 구입하고자 했다가, 다시 동치관에 의해서 고발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그 죄는 '국가의 보물을 개인이 소장하려고 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해서 솥은 나중에 현부(縣府)로 들어가서 보관이 되었다가, 골동상인에게 은밀하게 넘겨져서는 갖고 달아나서 서안(西安)에 비밀리에 보관이 되었다. 장연창(張燕昌)의 아들인 장석호(張石瓠)가 남들이 손을 대기 전에 미리 이 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 쓰여져 있는 명문(銘文)을 그대로 베껴서 두 장의 그림으로 만든 다음에, 절강(浙江)의 가흥(嘉興)에 있는 유명인사인 서동백(徐同柏)에게 보내자, 서동백은 그 그림을 바탕으로 해서 《周毛公鼎考釋(주모공정고석)》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썼던 것이다.

모공정원문-1

짐작컨대, 장석호가 보냈다는 두 장의 그림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清文宗咸豐二年(1852年),北京金石學家收藏家陳介祺又從蘇億年手中購得,並賞給蘇億年1,000,此鼎深藏於密室,鮮為人知。陳介祺病故後,其孫陳孝笙於宣統二年(1910年)以萬兩白銀將鼎轉售給兩江總督端方,後端方被派到四川鎮壓保路運動,被革命軍所殺。端方之後人因家道中落,將《毛公鼎》典押給天津俄國人開辦的華俄道勝銀行英國記者辛浦森出5萬美元向端家購買,端家嫌錢太少,不肯割愛。當時有愛國人士極力呼籲保護國寶,《毛公鼎》輾轉至當時擔任北洋政府交通總長的大收藏家、後來國學館館長葉恭綽手中,存入大陸銀行

청문종의 함풍(清文宗咸豐) 2년(1852年)에 북경의 금석학자(金石學家)이자, 수장가(收藏家)인 진개기(陳介祺)가 또 소억년의 수중에 있던 것을 구입하게 되었다. 아울러서 소억년에게는 상으로 1천냥()을 줬다. 그래서 이 솥은 깊은 수장고에 들어가서 밀실에 저장이 되었고 사람들도 그런 줄로 알게 되었다.

진개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손자인 진효생(陳孝笙)이 선통(宣統) 2년(1910)에 1만 냥의 백은(白銀)을 받고 양강총독(兩江總督)인 단방(端方)에게 팔았고, 그 후에 단방은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어서 폭동들을 진압하다가 혁명군에게 살해되었다.

단방이 죽은 다음에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고, 그래서 다시 《모공정(毛公鼎)》을 천진(天津)에 있는 러시아사람이 개설한 화아도승은행(華俄道勝銀行)에 팔고자 했다. 이때에 이것을 알게 된 영국(英國)의 기자였던 신포삼(辛浦森)이 미화 5만불을 단방의 집안 사람에게 주고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단방의 사람은 돈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팔지 않겠다고 했는데 당시에 애국인사(愛國人士)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국보(國寶)를 보호하려고 했다. 《모공정(毛公鼎)》은 이렇게 흐르고 흘러서 북양정부교통총장(北洋政府交通總長)에게 수장되었다가 나중에 국학관(國學館)의 관장(館長)인 섭공작(葉恭綽)의 손으로 들어가서 대륙은행(大陸銀行)에 들어가게 되었다.

民國二十六年(1937年)抗日戰爭爆發,葉恭綽避走香港,《毛公鼎》藏在上海寓所未能帶走。由於葉恭綽是用假名購得《毛公鼎》,日本人無法查知它的下落。葉恭綽囑咐其侄葉公超:「美國人和日本人兩次出高價購買《毛公鼎》,我都沒有答應。現在我把《毛公鼎》託付給你,不得變賣,不得典質,更不能讓它出國。有朝一日,可以獻給國家」。

민국(民國)26년(1937年)에 항일전쟁(抗日戰爭)이 폭발하자, 섭공작은 홍콩(香港)으로 다시피신을 했고, 《모공정(毛公鼎)》은 상해(上海)의 집에 두었고, 그것을 홍콩으로 갖고 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섭공작은 가명을 사용해서 《모공정(毛公鼎)》을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日本人)도 모공정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섭공작이 그의 조카인 섭공초(葉公超)에게 부탁을 했는데, "미국인과 일본인이 두 차례에 거쳐서 고가로 《모공정(毛公鼎)》을 사려고 했지만 내가 답을 할 수가 없었고, 현재는 내가《모공정(毛公鼎)》을 너에게 부탁할테니까, 팔지도 말고 다시 누가 사더라도 그것을 갖고 나라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네가 국가에 헌납하도록 해 다오."라고 했다.

《毛公鼎》幾經易手,甚至差點被日本軍方奪走,所幸葉公超拚死保護,死不承認知道寶鼎下落。葉恭綽為救侄子,製造了一隻假鼎上交日軍。葉公超被釋放後,於1941年夏密攜《毛公鼎》逃往香港。不久,香港被日軍攻占,葉家托德國友人將《毛公鼎》輾轉運回上海。後來因生活困頓,將《毛公鼎》典押給銀行,由巨商陳詠仁出資贖出,《毛公鼎》才不至於流浪他鄉。民國三十五年(1946年)陳詠仁將《毛公鼎》捐獻給國民政府,次年由上海運至南京,收藏於中央博物院(今南京博物院)。

《모공정(毛公鼎)》은 몇 번이나 손을 거쳐서 옮겨 다니다가 심지어, 일본군이 탈취해서 갖고 도망가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섭공초가 죽을 각오로 보호하여, 절대로 남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섭공작의 조카가 목숨으로 구했다는 것은, 똑 같은 솥을 하나 만들어서 일본군과 교환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섭공초가 석방이 된 후에 1941년의 여름에 비밀리에 《모공정(毛公鼎)》을 갖고 홍콩으로 도주하였다가 오래지 않아서 일본군에게 홍콩이 점령당하게 되자, 섭씨의 집에서는 독일인 친구에게 다시 부탁을 해서 상해(上海)로 돌려 보냈다.

그 후로 생활이 곤란해지자 《모공정(毛公鼎)》을 은행에 저당잡히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거상(巨商)이었던 진영인(陳詠仁)이 돈을 바치고는 빼냈다. 《모공정(毛公鼎)》은 비로소 타향으로 유랑하던 것을 멈추게 되었고, 민국 35년(1946年)에 진영인이 《모공정(毛公鼎)》을 국민정부(國民政府)에 헌납했으며, 그 다음 해에 상해에서 남경(南京)으로 옮겨서 중앙박물원(中央博物院)에 수장되었으니 지금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이다.

1948年,大量故宮珍貴文物隨中華民國政府臺灣,《毛公鼎》亦在其中,現收藏於臺北國立故宮博物院[

1948년에, 고궁(故宮)의 진귀(珍貴)한 문물(文物)을 중화민국정부(中華民國政府)가 대만으로 옮길 적에 《모공정(毛公鼎)》도 그 안에 있었으니, 현재 대북(臺北)의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수장되었다.

 

헥헥~!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두어 군데 어색한 번역이 있습니다만, 뜻을 이해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서 그 정도로 그냥 땜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국어는 항상 어렵습니다. ㅠㅠ

 

3. 솥 하나가 뭐길래


모공정의 이력을 살피다 보니까, 하나의 솥이 아니라 한 인생인가 싶을 정도네요. 벗님도 공감이 되시지요? 어쩌면 그렇게도 파란만장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던지 말이지요. 지금은 대만에서 편안하게 전시되고 있습니다만, 이 하나의 솥만으로도 천신만고의 역사가 있음을 보면서 그 나머지 수없이 많은 문물들은 또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납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을 연구하기로 들면 박물학자가 되겠네요. 하하~!

특히 난리 통에 일본으로 넘어갈 위기도 겪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유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섭공초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일본으로 마구마구 반출이 되었을까 싶은 생각에 가슴 한 쪽이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솥에 쓰여진 글자에 대해서 풀이를 해봐야 하겠습니다만, 그 전에 솥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화 제목이 있습니다. 금용(金庸)의 작품인 《녹정기(鹿鼎記》말입니다. 여기에서도 솥정(鼎)이잖아요. 도대체 솥이 뭐길래 천자나 권력자들이 애용하는 물품이 되었을까요?

솥은 문명인의 대표적인 발명품입니다. 솥으로 인해서 밥을 해 먹고 고기를 삶아 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솥의 기능적인 것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니 생략하더라도 상징적인 의미는 생명이라는 것으로 대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먹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예전에 어느 제후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 왕명을 내립니다. "온 나라의 모든 쇠를 모아서 거대한 솥을 만들라~!"라는 것이었답니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솥을? 그래서 참 의아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생명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솥을 떠올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소박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모공정이 만들어 진 주나라 때라면 참으로 아득한 옛날옛적인데, 이러한 시대에는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을 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솥의 의미는 더욱 컸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긴, 지금도 밥솥 광고를 하고 있잖아요? 이 시대가 되어도 솥은 중요하게 집집마다 보관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더 말을 할 나위도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무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무기가 있으면 또 반란을 일으킬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빼앗아야 하는데, 핑계가 좋지요? 평화의 세상이 되어서 배불리 밥을 먹도록 할테니까 큰 솥을 하나 만들라는 의미는 일리가 있습니다.

가령, 불상을 만든다고 하면 불교도들인 좋아하겠습니다만, 비불교도는 좋아할 리가 없을 테고, 종교가 대단히 많은 나라인 옛날의 중국에서라면 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다만 솥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괴산에서도 엄청 큰 솥을 만들었나요? 어디 괴산의 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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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니까, 1년에 한 번 옥수수를 삶아서 군민들이 나눠 먹는다던데 문득 솥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까 괴산을 지나다가 봤던 솥이 떠올라서 찾아 봤습니다. 그리고 또 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두부솥입니다. 어려서 창원에 살 적에 새벽마다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드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맷돌로 갈은 콩물을 끓이던 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솥은 좀 특이했습니다. 아무리 검색을 해도 같은 솥은 나오지 않네요. 혹시나.... 하고 목욕솥으로 검색을 해 보니까 하나 걸려 나오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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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렇게 생겼습니다. 어려서의 생각으로는 탐험대의 모자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겼었다고 기억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군용으로 쓰이던 솥이었네요. 여하튼 이 솥으로 두부를 만들어서 어린 시절을 먹고 살았으니 솥은 생명인 것이 분명합니다. 맞지요? 하하~!

글자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솥정(鼎)은 주역의 64괘에 나오는 괘명(卦名)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중요하기는 했었네요. 화풍정(火風鼎)이 그것입니다.

50 화풍정

상괘는 화이고 하괘는 풍이어서 화풍이 모이면 솥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 괘에 대한 공자의 멋진 풀이도 전합니다만 지금은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어딘가에 설명을 했었는데.... 기억력이 좋은 벗님은 생각이 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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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문자화 되기 이전의 그림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좌우 대칭도 아름답고, 가운데에는 밥이 들어있다는 것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매우 세련된 황실의 솥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솥정자의 종류-1

이렇게 솥에 대한 정(鼎)자 하나에 대한 역사도 참 엄청나네요. 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려면 이 갑골문에 나온 다양한 글자들만 봐도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지 싶습니다. 처음에는 왜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 쌀미(米)가 아니고, 눈목(目)을 썼는지가 궁금했는데 갑골문을 보니까 의문이 풀리네요. 눈목이 그 안에 들어있는 이유를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솥정자-1

그것은 눈목(目)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형문자였습니다. 그냥 층층이 밥을 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맨 아래에는 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넣고, 그 위에는 콩이나 팥과 같은 보조물을 넣고 마지막으로 물을 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중간층에는 호박잎이나 고기를 얹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서는 어머니께서 쌀 위에 계란찜 그릇을 얹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요즘도 이러한 형태는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글자를 그림으로 보고 있노라면 중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솥 안에 다시 그릇이 있어서 찜을 찌는 모습이 되는 것이지요. 밖에는 탕을 끓이면서 안에는 그릇에 불린 쌀을 넣으면 솥 하나로 모두 해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글자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런가 하면 만두집에서는 어떻게 하나요? 샤오롱빠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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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타이펑(鼎泰豊)에서 만두 사 먹고 싶네요. 샤오롱빠오(小籠包)가 맛있잖아요. 대전에도 있던가.... 한 번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여하튼 틀림없이 목(目)을 두 개 정도 겹쳐 놓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만두소쿠리를 자꾸 눈목자로 보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더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정태풍도 솥정이었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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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눈목자가 아니라 만두 바구니였다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알지 싶습니다. 여하튼 참 친절한 낭월입니다. 그런데 사진이 좀..... 글자가 되려면 만두 소쿠리가 옆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러 한 번 가야 할 모양입니다. 만두를 먹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사진이 필요해서 말이지요. ㅋㅋㅋ

 

4. 엉? 내 이름자도 솥과 연관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낭월의 이름은 박주현(朴珠鉉)입니다. 구슬주에 솥귀현. 어려서는 솥귀현을 소캐현이라고 했었는데, 도대체 소캐가 무엇인지를 물어도 부친께서는 그게 뭔지 설명을 명쾌하게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이름은 돌림자로 지었지만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잘 모르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솥귀라는 것을 미뤄서 생각하기를 솥의 전이라고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 당연히 귀는 옆에 붙어 있고, 솥 옆에 붙어있는 것은 전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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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하는 말이 정답입니다.

솥귀 → 솥의 귀 → 솥에 귀라고 할만 한 것은? → 전

부뚜막에 솥을 걸 적에 바쳐주는 것을 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솥에 귀라고 할만 한 것은 전이고, 그래서 솥전이 솥귀려니..... 했다는 것 아닙니까. 솥귀가 만들어 질 적에 생긴 글자를 이 시대의 솥에서 답을 찾으려니까 제대로 될 턱이 있나요. 정말 나이 환갑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름자에 들어있는 뜻을 알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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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모공정으로 인해서 말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솥전인 줄만 알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자에 대한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은 나름 경이롭기조차 하다는 것을 현(鉉)자를 이름자로 사용하는 모든 국민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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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봅니다. 귀가 보이십니까? 세상에~~~!!!!

이제서야 솥귀가 보이다니~~!! 이게 솥귀였구나~! 여태 그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참말로 무지하면 봐도 모른다는 말이 과연 정답이네요. 모공정에도 선명하게 붙어있는 귀가 이제서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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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솥에는 모두 약간의 모양은 달라도 귀가 붙어 있습니다. 여기에 막대기를 걸어서 메고 다녔거나, 이동수단으로 사용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솥귀가 없으면? 솥을 들고 다닐 방법이 많이 불편했겠네요. 하물며 속에 뜨거운 밥이나 탕이 들어있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지겠습니다. 빈 솥이라면 뭐 아무렇게라도 이동해 보겠습니다만서도.

그냥 삼현(三鉉)이라고 해서 삼정승이 왕을 보필한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솥에 귀가 없으면 솥을 도울 수가 없었겠네요. 그렇다면 솥은 왕을 나타내니까, 왕의 귀가 되어준다는 의미가 바로 삼정승, 삼현의 뜻이었을까요? 좌의정 우의정이 두 귀가 되어서 영의정에게 전하면 영의정이 왕에게 전하는 것이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삼정승은 솥의 세 발로만 생각을 했었지요. 모공정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난데없는 이름타령으로 전개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여하튼 자신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숙제 하나를 풀었으니 오늘의 한담은 그 공로가 이미 차고 넘친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하하~!

그럼, 글자까지 풀어 봤고, 겸해서 이름의 숙제까지도 했으니 이제 모공정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글이 그 안에 쓰여져 있는지, 무슨 연유로 그러한 솥이 세상에 남게 되었는지 역사의 탐험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다만 중국어도 어려운데 까마득한 고문(古文)이야 더 말을 해서 뭘 할 것이며, 더구나 금문이니 갑골문에 가까운 글자들인지라 해석하는 학자도 고생하셨을 것이므로 대략적인 의미만이라도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살펴보면 족하지 싶습니다. 물론 가뜩이나 난해한 원문이므로 해석에 대한 보증은 하지 않습니다. 하하~!

모공정의 크기 
높이 : 53.8cm
깊이 : 27.2cm
구경 : 47.9cm
무게 : 34.7kg

 

5. 모공정(毛公鼎)에 적힌 사연


銘文原文(명문원문)의 구조와 내용 - 해설자의 요약

《毛公鼎》腹內鑄有32行、共500字銘文,是西周晚期一篇完整的冊命書。文中提到周宣王在位初期,想要振興朝政,遂命叔父毛公瘖(有一說是毛公歆)處理國家大小事務,又命毛公一族擔任禁衛軍,保衛王家,並賜酒食、輿服、兵器。毛公感念周王,於是鑄鼎紀事,由子孫永保永享。

《毛公鼎(모공정)》의 안쪽에는 32줄로 된 50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서주(西周)의 늦으막에 한편의 명령서(命令書)로 완성된 책이다.

본문 중에는 주선왕(周宣王)의 재위초기(在位初期)에, 조정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중요한 생각들을 숙부인 ,모공음(毛公瘖-일설에는 모공흠(毛公歆)이라고도 함)이 국가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일을 보고 처리하는 일과, 또 모공일족을 보호하는 호위군과 왕가를 수호하는 군사들에게 주식(酒食)과 병기(兵器)를 제공하는 내용과, 모공(毛公)이 주왕(周王)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글귀를 써서 솥을 만들 적에 새겨서 넣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자손들은 영원히 행복을 누리라는 내용이다.

銘文原文(명문원문)

王若曰:「父瘖!丕顯文武,皇天引厭劂德,配我有周,膺受大命,率懷不廷方,亡不覲於文武耿光。唯天將集厥命,亦唯先正略又劂辟,屬謹大命,肆皇天亡,臨保我有周,丕鞏先王配命,畏天疾威,司余小子弗,邦將曷吉?跡跡四方,大從丕靜。嗚呼!懼作小子溷湛於艱,永鞏先王」。

주왕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瘖)의 아버지시여! 위대하고 영명하시기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과 같으십니다. 하늘의 옥황상제께서도 그들의 덕행에 만족하셨는지, 우리 주나라를 그들과 잘 지내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충심을 하늘의 옥황상제께서 받으시고는 위대한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하를 다스리니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문왕과 무왕의 빛나는 은덕을 입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신께서 은(殷)나라의 천명(天命)을 거둬들이시고, 우리 주나라에 천명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나신 여러 대신들이 우리 주군(主君)을 보필하여 크고도 큰 선왕의 명령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엄숙하신 옥황상제께서 갑자기 위엄과 노함을 나타내셔서 후사를 아직 내리지 않으신 것도 또한 하늘의 위엄을 드리운 것이라고 하겠으니 도리어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사방이 소란스럽고 대단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것은 이렇게 물에 빠진 것 같은 어려움 중에서도 선왕의 유지를 영원토록 이어가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王曰:「父瘖囹余肇經先王命,命汝□我邦我家內外,□於小大政,□朕立,□許上下若□四方,死毋動餘一人在位,弘唯乃智,余非庸又昏,汝毋敢妄寧,虔夙夕惠我一人。雍我邑小大酋,毋折緘,告余先王若德,用仰邵皇天。□□大命,康能四國,欲我弗作先王憂。」

주왕이 말씀하셨다. 「음(瘖)의 아버지시여! 제가 선왕의 명령을 엄격하고 올바르게 지키고, 명령하신 대로 이치에 맞게 국가와 우리 가족이 안과 밖을 다스림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조심하겠습니다. 저의 왕위(王位)를 잘 지켜서 상하가 협조하고 관리들은 사방에서 실적을 올리며, 시작부터 끝까지 저의 왕위는 동요됨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당신의 지혜가 발휘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나 평범하고 못났으며 혼미한 귀머거리라서 당신도 또한 잠시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오니 이렇게 정성을 올리는 것을 어여삐 여기셔서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고, 우리의 국가에서 행하는 크고 작은 계획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항상 입을 닫고 말씀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선왕의 아름다운 공덕을 말씀해 주셔서 저로 하여금 하늘의 뜻에 부합되도록 해 주시고, 계속해서 큰 분부를 받자옵기 위해서 노력하도록 보살펴 주시옵고 사방의 모든 나라들이 강력하고 안정되어서 선왕의 근심과 걱정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를 원합니다.」

王曰:「父瘖!□之庶出入事於外,専命専政,兿小大楚賦。無唯正昏。弘其唯王智,□唯是喪我國。歷自今,出入専命於外,厥非先告父歆,父歆捨命毋又敢□専命於外。」

주왕이 말씀하셨다. 「음(瘖)의 아버지시여! 이렇게 많은 관료들이 일을 좇아서 출입하고 밖을 향해서 정부의 명령을 널리 알리며, 각종의 임무들을 수행하고 세금을 거둘 적에도 잘못되는 일이 없을 적에, 모두가 저의 영명함으로 인해서라고 말하지 않도록 해 주소서.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인 까닭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출입하거나 명령을 선포하거나 일의 선후를 먼저 당신께 알리지 않는다면 또한 당신이 우리를 불러서 분부하신다면 털끝만큼도 정치가 잘못 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王曰:「父瘖!今余唯先王命,命汝亟一方,弘我邦我家。汝椎於政,勿雍建庶人?毋敢龔苞,龔□孜侮鰥寡。善效乃有正,毋敢湎於酒。汝毋敢墜,在乃服,□夙夕敬念王畏不□。汝毋弗師用先王作明型,欲汝弗以乃辟,陷於艱。」

주왕이 말씀하셨다. 「음(瘖)의 아버지시여! 현재 저는 다시 선왕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당신의 명령으로 일방적인 정치의 기준을 삼아서 우리의 국가와 가족이 크게 빛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서 정치와 일들은 거칠거나 게으르지 않게 해 주시고, 서민들의 삶이 옹색하지 않게 해 주시고, 관리들이 자기들 주머니만 채우지 않도록 해 주시고, 불쌍한 홀아비와 과부들을 속이거나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소서.

매우 좋은 가르침으로 당신의 후손들을 이끌어 주시고,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해 주소서. 당신께서 높이 올려놓으신 지위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시시각각으로 힘써 주소서! 공경하고 또 공경하오니 나라를 경영함에 변함없는 가르침을 주소서.

당신께서 선왕이 심어놓은 규칙과 법률을 잘 드러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오니, 당신의 군주가 함정에 빠지거나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살펴 주소서!」

王曰:「父瘖!巳曰及茲卿事寮、大史寮,於父即尹,命汝司公族□叄有司、小子、師氏、虎臣、□朕執事。以乃族干捍吾王身。取卅。賜汝□□一鹵,裸圭瓚寶,朱市□、□黃、玉環、玉□、金車、賁爰較、朱亂、□□、虎□、熏裹、右厄、畫□、畫□、金甬、錯衡、金踵、金豪、束□、金□弼、魚箙、馬四匹、□ 勒、金巤、金膺、朱□二鈴。錫女茲,用歲用政。」

주왕이 말씀하셨다. 「음(瘖)의 아버지시여! 저는 이미 공경대신과 태사 등의 관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의 관리를 받을 것이며 도리여 당신의 가족들과 작은 아들과 문무의 신하들과 저를 포함한 모든 관리들은 당신이 만든 법령과 가족과 저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저는 당신의 가족들에게 30웅큼의 돈과 향기로운 술 한 단을 주겠습니다. 제사를 지낼 보배로운 귀한 그릇과 붉은 색의 비단과 무릎을 덮는 청색의 보자기와 옥으로 만든 가락지와 옥으로 만든 홀과 황금으로 만든 마차와 문양으로 장식한 멋진 가마와 붉은 가죽으로 만든 가죽끈으로 매도록 하고, 호피로 만든 마차 덥개와 감색의 의자, 멋진 장식으로 꾸민 마차와 황금으로 된 말발굽과 물고기 껍질로 만든 화살통, 말 네필, 황금으로 된 말의 모자, 금으로 된 방울, 붉은 깃발 두개를 당신의 제사에 쓰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전쟁을 할 적에도 그렇게 쓰겠습니다.」

毛公瘖對揚天子皇休,用作尊鼎,子子孫孫永寶用。

모공 음(瘖)이 천자의 휘황찬란한 미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쇠를 녹여서 보배로운 솥을 만들어서 자자손손이 영원토록 보배롭게 쓰고자 함.

 

6. 풀이를 해 보니.....


어떻습니까? 이렇게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내용을 읽어 보니 어제 그제 말하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글맛으로 인해서 고문을 읽어 보는 재미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쯤 와서 보니까, 주왕 음(瘖)이 어느 시기의 왕이었는지가 궁금해 졌습니다. 다시 주왕의 계보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뭐 바쁜 일도 없으니 이렇게 흐름따라 가 보자는 것이기도 하네요. 하하~!

《中国碑帖经典:毛公鼎》内容为周宣王策命毛公 厝,委以政务,整肃纪纲,兴革政治的策命,洋洋洒洒,蔚为大观。

책의 소개에서 나오는 《중국비첩경전:모공정》에서 모공정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살펴봅니다. 내용은 주의 선왕(宣王)이 모공(毛公)인 조(厝)에게 책명을 내리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주왕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주(周)의 11대 왕인 선왕이로군요. 정치도 잘 했다는데 이렇게 역사적인 기록을 남겨서 후대에도 기념이 되는가 봅니다.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히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려서 선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니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왕이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40년간 공화정을 기준으로 백성을 위해서 통치하다가 아들에게 물려 준 것이 기원전 (BC) 782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기로 따져서 (곱작... 곱작...) 대충 3천년 전이었나 봅니다. 물론 그 아들은 또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지 못하고, 망나니로 주색탕진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참 역사의 운명이려니 싶습니다.

백성들이 옹색하지 않도록 하라는 분부를 봐서 멋진 왕이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의미있는 역사적인 유물이 되어서. 국립 대만고궁박물원의 3대 유물이니, 4대 유물이니 하는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중국의 복인가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솥타령을 해 봤습니다. 아마도 원문에서도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로 처리한 것이 여럿 보이는 것으로 봐서 말이지요. 그런대로 누군가 위키피디아에 풀이를 해 놓은 것을 참고하여 대충 번역해 봤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7년 5월 2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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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 주왕조(周王朝)의 연대표 (자료출처)


원조(元祖) 기(棄) : 有邵氏의 딸 姜嫄이 人道없이 낳아 버려졌다가(棄) 異蹟으로 收養되어, 相地之宜하여 敎民稼穡하여 陶唐虞夏之際에 農師가 되어 邰(陜西省 武功縣)에 봉해지고 后稷이라 칭호하였다.


子 不窟 : 后羿簒弑之亂에 失官奔狄하였고, 손자는 鞠陶이다.


曾孫 公劉 : 后稷의 善業을 다시 일으켜 豳에 봉해짐으로써 周의 始祖가 됨.


古公亶父 : 公劉로부터 10세. 獯鬻(狄人名)의 침략으로 岐山之下 周原에 作邑하고 國號를 周라 하다. 古公(妃太姜)의 三子 季歷(妃太任), 文王(名昌, 西伯, 妃太姒)을 지나 武王(名發)에 이르러, 800諸侯와 연합하여 商을 정복하고 周王朝를 세움.


宗周와 成周 : 宗周(西都, 鎬京, 在豊邑東)와 별도로 중원에 成周(東都, 洛陽)을 건설하여 河南의 陜州 서쪽은 召公이 주관하고 그 동쪽은 周公이 주재하여 통치하여 2대 成王을 거쳐 3대 康王 때까지 40여 년간 형조(刑錯)를 不用하는 태평을 누렸으나,


4대 소왕(昭王) : 향락에 빠져서(溺而不返) 이때부터 周室 衰弱이 시작됨.


5대 목왕(穆王) : 徐子 作亂함에 討誅하고 犬戎을 정벌함으로써 以德服人하지 못하여 遠方諸侯들이 不朝하고 諸侯間에도 不睦함.


9대 이왕(夷王) : 君弱臣强이 표면에 드러났으니, 천자가 下堂하여 제후를 대하고 楚國이 王이라 僭稱하기 시작함.


10대 려왕(厲王) (殺戕不辜曰厲) : 暴虐侈傲하므로 河東 彘縣으로 逐出되어 崩할 때까지 14년간 東西都 二相()周召之後)이 和協하여 共理國事하는 共和政治를 함.


King_Xuan_of_Zhou


11대 선왕(宣王) 모공정의 주인공. (聖善周聞曰宣) : 召穆公․方叔․尹吉甫․仲山甫 등의 輔相으로 周室中興함. 召穆公은 東平淮夷하고 方叔은 南征荊蠻하고 尹吉甫는 北伐玁狁하고 仲山甫는 以輔袞職함.


12대 유왕(幽王) (壅遏不通曰幽) : 寵愛褒姒 廢申后黜太子宜臼 伐申國(在鄧州)한대 申后 犬戎을 끌어들여 宗周(鎬京)를 유린하고 廬山之下(在華州)에서 幽王을 시해함.


13대 평왕(平王) (諸侯立宜臼) : 東遷 政敎號令不行於天下 春秋時代 시작. 周室衰微 諸侯 弱肉强食 漫行


16대 리왕(釐王) (희왕) : 齊桓公始覇


18대 양왕(襄王) : 晉文公始覇


21대 정왕(定王) : 楚莊王 問鼎輕重(欲逼周取之) 王孫滿이 郤之曰在德不在鼎 周德雖衰 天命未改 鼎之輕重未可聞也 楚使慙懼而退


22대 간왕(簡王) : 吳國이 王이라 僭稱하기 시작함.


23대 령왕(靈王) : 孔子 誕生


25대 도왕(悼王) : 庶子弟 子朝가 弑害하거늘 晉人이 子朝를 討誅하고 敬王을 세움.


26대 경왕(敬王) : 孔子 卒


29대 애왕(哀王) : 弟 思王(30대)이 襲弑하여 自立, 또 少弟 考王(31대)이 思王을 攻弑하고 自立


32대 위열왕(威烈王) : 晋의 大夫 趙,魏,韓 3씨가 3분하여 제후가 됨. 東遷이래 二十世에 周室愈微諸侯爭强하니 號爲戰國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