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 뜬금없는 삼전도비(三田渡碑) 타령

작성일
2017-04-24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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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뜬금없는 삼전도비(三田渡碑) 타령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만화방창(萬花方暢)이 흥겨워서 동서남북으로 구경 다니느라고 분주한 4월입니다. 가다가다 이제는 서울까지 가 봤습니다. 뭐 서울이래야 일이 있으면 가끔 가기는 합니다만, 구경을 가기 위해서 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4월 20일 부터 23일까지 강남의 코엑스에서 사진과 영상전(P&I)을 한다기에 나들이를 해 봤습니다. 물론 강력한 탐심을 즐기러 간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머지 않아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니A9카메라를 볼 수가 있다는 유혹의 덧에 걸린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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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삼전도비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잡아야 하겠네요. 물론 삼전도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으니 사전 지식도 있을 턱이 없지요. 어쩌면 어딘가에서 흘려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관심이 없으면 남의 이야기가 될 뿐이라는 점. 만고의 진리인가 싶습니다.

서울 간 목적 중에는 123빌딩을 가보려는 생각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63빌딩이었는데, 이제는 그 두배가 되는 123빌딩이 그 자리를 꿰어 차게 되었네요. 롯데타워빌딩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울 가는 길에 구경한 번 할까... 했었더랬습니다. 이제 서울 온 김에 안 가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건물도 구경하고, 내친 김에 한 바퀴 돌아서 석촌호수(石村湖水)도 구경하고, 덤으로 백조도 보면서 서울 구경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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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타워라지요? 건물을 보고서 느낀 점은,

'위용(威勇)은 있으나 후덕(厚德)은 없구나.... '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삐쭉하게 올라간 것은 남보다 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생각이었겠거니.... 싶었습니다만, 저렇게 위로만 솟구쳐 올라가고 그에 상응하는 옆퍼짐이 없다는 것은 틀림없이 양(丨)의 건물이지, 음(一)의 건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양의 기운이 넘쳐서 세상이 시끄러운데 건물마져 그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세상의 평화를 생각하는 산골화상의 생각에는.....

'도리도리.....'

여하튼, 그것이 높기 때문에 이목을 끌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단 목적달성은 한 것이라고 봐도 되지 싶습니다. 롯데가 겪고 있는 정치적인 어려움이 어쩌면 이렇게 양으로만 치닫기 때문에 그것을 시샘해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쭝얼쭝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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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나마 균형을 맞춰보겠다고 백조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어서 약간의 의미는 부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설치미술가의 전시물이라고 하네요. 전에는 노랑 오리를 여기에 설치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백조로군요. 여하튼 볼꺼리를 만들어 놓아서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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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5월8일까지만 뒀다가 가져갈 모양입니다. 봄빛이 온 천지에 가득한 석촌호수를 거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봄기운이 한가득이지 싶었습니다. 각설하고.

 

[헛소리]
아이구~~ 죄송해서 어쩝니까..... 오전에 시작을 했는데 손님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못하고 이제서야 손님 보내고 들여다 보니 그 사이에 시작도 못한 글을 클릭하신 벗님이 80명이 넘으셨으니... 제목에 '작성중'이라고 써놓기는 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어여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1. 생각없이 보게 된 삼전도비

그냥, 석촌호수가 있어서 둘러 봤을 뿐이고,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삼전도비가 있다는 조그만 안내푯말을 봤을 뿐이고, 그래서 한바퀴 돌아 나오는 길에 찾아 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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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커다란 비석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삼전도비라는 것을 직감한 것은 다른 것이 있을 곳은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거북이만 있고, 비신이 없었는데, 그것도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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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碑身)이 없는 귀부(龜趺)의 유래]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정황을 근거로 청의 강요에 의해 귀부가 새로 제작된 것 이라고 문헌사료를 통해 검토하여 기록한다.


아하~! 설명이 되어 있었군요. 그러니까 청나라 태종이 전승기념비를 만들라고 했는데 조선에서 만드는 비가 너무 작다고 꿍시렁 댔다는 이야긴가 봅니다. 그래서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거북은 그냥 두고 다시 제작을 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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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비도 거대합니다. 전체 높이는 5.7m이고, 비신은 3.95m, 폭은 1.4m라고 되어 있다는데, 전승기념비를 조선에다가 세우다니..... 참 자랑질을 어지간히도 하고 싶었나 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지배할 조선이라는 것을 천하에 드날리고 싶었나 보네요.

참,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누구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긴 적국의 왕을 칭송하는 비가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이러한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구미가 확~ 땡겼습니다. 그 역사의 스토리를 좀 추적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이지요. 물론 이전에 이에 대한 기억은 없었습니다. 아마 들었더라도 그냥 흘려들었던 모양이네요.

그래서 공부도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이제서야 삼전도비에 대해서 공부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벗님께서는 그 정도는 알고 계신다고요?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다만 낭월만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혹 낭월과 비슷한 벗님들도 한둘은 계시겠거니 하고 공부 삼아 정리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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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 불쌍해라~! 옆에 있는 거북은 가볍게 띵까띵까 놀고 있는데 이 놈은 무슨 팔자에 거대한 돌덩어리를 등에 짊어지고 낑낑대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래서 흘린 눈물이 앞에 흥건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참 조선인들도 대단합니다. 기왕 작아서 못쓴 거북이는 따로 폐기하던가 할 일이지 굳이 그 자리에 나란히 남겨두는 꽁심은 또 뭐랍니까? '요 나쁜 놈들...'하는 마음이 그 안에 배어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처지에 있는 벼슬아치들을 향한 석공들의 작은 반발일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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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조선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알아줘야 합니다. 정교하게 조각한 용트림이 바로 살아서 튀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한 바퀴 돌아 보고서는 비면(碑面)을 살펴 봤습니다. 그런데 글씨들이 마모되었는지 식별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위쪽의 일부분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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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저건..... 자금성(紫禁城)에서 현판에 써 있던 글자인데....? 이것은 생각 밖이었습니다. 왜 여기에서 만주문자(滿州文字)를 만나게 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청 나라가 나오고 태종이 나오는 것을 다시 떠올려 봤습니다. 오호라, 그냥 한문만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도 자기네 문자인 만주문으로 기록을 했던 모양이다....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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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부분만 확대를 해 봤습니다. 아무리 봐도 틀림 없는 그 문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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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금성의 건청문 현판입니다. 문자를 읽을 줄은 몰라도 볼 줄은 안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일본 글을 읽지는 못해도 가나를 보면, 그것이 일본 글인 줄은 알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비의 내력에 대해서 호기심이 일었고, 그 자료를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동기가 생겼으니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자료를 찾아가기 시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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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에서 표기해 놓은 정보입니다. 1638(인조17)년에 세웠다는 기록입니다. 읽을 정도의 크기로 저장했으니 살펴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네요.

비석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문자, 오른쪽에는 만주문자, 뒷면은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이경석이라는 관료가 한문으로 작성한 문서에 그들이 몽고 문자와 만주 문자로 다시 번역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네요.

고종이 굴욕적인 내용이 싫어서 땅에 묻으라고 했는데 일제가 다시 발굴해서 세워놨다고 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것이었다면, 석수를 불러서 모두 깨어버리고 축대를 쌓는 재료로 써버리라고 했으면 다시는 볼 일이 없었을텐데 그것을 묻은 것은 또 무슨 심사였을까요? 그것이 궁금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생각을 해 봐도, 땅에 묻힌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당연히 그러한 일을 명한 것을 보면 그래도 차마 없애버릴 수가 없는 어떤 여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그로 인해서 일본 사람들은 있는 사실도 아니라고 하고 감추는데 조선 사람은 이렇게 굴욕적인 것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대인배라고 우쭐거릴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이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삼전도(三田渡)는 무슨 뜻일까?

비의 이름이 삼전도비입니다. 뜻을 생각해 보면, '밭을 세 개 건넌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겠는데, 밭을 세 개를 건너게 되는 곳의 지명이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자리가 잠실이라는 설도 있고, 마포 부근이라는 설도 있네요. 그렇지만 여러 가지의 정황을 고려하여 잠실의 이 부근이라고 판단을 했던가 봅니다.

그런데 원래의 이름은 이것이 아니었겠지요? 원래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이러한 위압적인 이름을 조선 사람들이 그대로 불러주고 싶었을 리가 없었겠습니다. 그래서 그냥 비가 서 있던 위치를 어림잡아서 삼전도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을 하게 됩니다.

송파구에는 삼전동(三田洞)이 있답니다. 그래서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해 봤습니다. 뭐 바쁠 일이 있나요. 그렇게 차근차근, 역사여행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천천히 흔적들을 찾아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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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그렇군요. 삼전동에 붙어있는 것이 석촌호수이고, 그 중간에 삼전도비가 서 있으니 이제 왜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역사여행은 이러한 조각들을 찾아서 퍼즐을 맞추듯이 꿰어가는 재미가 쏠쏠하잖아요. 이렇게 해서 이름이 삼전도비가 된 이유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비문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3. 비문의 내용은?

굴욕적이든 치욕적이든 뭔가 내용이 있어야 살펴 볼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서 비문의 내용을 찾았습니다. 위키소스(Wikisource)에 가면 다 있습니다. 여하튼 아무나 퍼다가 활용할 수가 있도록 복사도 자유롭게 하겠습니다. ㅎㅎㅎ

이렇게 보니까 그야말로 검은 것은 한자요, 무슨 글인지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굴욕적인 상황에서 조선의 왕은 어떤 글로 청의 태종을 흐뭇하게 했으려나.... 싶은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번역하는 문체는 감히 대청황제에게 올리는 글임을 감안하여 최대한 경어와 존경을 포함해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해 봤습니다. 기왕 허리를 굽히는 김에 코가 바닥에 닿도록 해 보는 거지요 뭐. 하하하~!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위대한 청나라 황제에 대한 공덕을 기리는 비문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대청숭덕원년동십유이월)

위대한 청국의 숭덕1년의 겨울 12월에

寬温仁聖皇帝 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관온인성황제 이괴화자아 시형연노 이무림지 직도이동 막감유항자)

인품이 너그러우시고 온화하시며 어진 성군이신 황제께서 우리 조선이 화해의 협약을 깨는 것에 대해서 잘 참고 견디시다가 비로소 크게 노하셔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오셔서는 바로 동쪽을 공격하시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時我寡君棲于南漢  凛凛若履春氷而待白日者(시아과군서우남한 늠름약리춘빙이대백일자)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황제를 두려워하기를 봄날의 얼음을 밟고서 햇볕을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内 不能進一歩 城中食且盡(태오순 동남제도병 상계붕궤 서남수두요협내 불능진일보 성중식차진)

그렇게 50일이 지나자 동남쪽의 모든 군사들은 연달아서 붕괴되고 서북쪽의 장수들도 골짜기에 머무르면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성 안에는 먹을 식량도 모두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燎鴻毛而(당차지시 이대병박성 여상풍지권추탁 노화료홍모이)

이때에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마치 서리바람에 가을 풀이 날리듯하고  화롯불에 새의 털을 태우듯 하였으나

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勅諭之曰 來朕全爾否屠之(이황제이불살위무 유포덕시선 내강칙유지왈 래집전이부도지)

황제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무도(武道)라고 하시고, 또 덕을 베푸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마음을 갖으시고 항복하기를 칙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짐에게 와서 항복하면 모두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有若英馬諸大將 承皇命相屬於道  於是 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유약영마제대장 승황명상속어도 어시 아과군집문무제신위왈)

영마(윙얼다)와 같은 모든 장수들에게 황제가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할 즈음에 우리 부족한 임금께서는 문무 백관을 모아놓고는 말씀하시기를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茲矣 由予惛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여탁화호우대방 십년우자이)

"내가 큰 나라에 의탁하기를 10년이 지났는데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하늘의 엄벌을 재촉한 꼴이니 이로 인해서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게 생겼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오.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황제유불인도륙지 유지여차 여갈감부흠승 이상전아종사 하보아생령호 대신협찬지 수종수십기 예군전청죄)

황제께서는 이들을 차마 도륙하지 못하시고 타이르시니 내가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서 위로는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대신들과 함께 말 수십 필을 이끌고는 황제의 군대 진영에 다달아서 죄를 청하셨습니다.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即還我寡君于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황제내우지이례 부지이은일견이추심복 석뢰지은 편급종신 예파즉환아과군우도성 입소병지남하자 진여이서)

황제께서는 후하게 예로써 우리 임금을 대하시고 크신 은혜를 베풀어 위로하시면서 한번 봄에 마음으로 복종한다는 것을 판단하시고 재물을 하사하시어 동행한 신하들에게도 골고루 미쳤습니다. 그 즉시로 부족한 임금은 한양의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그 자리에서 남하하던 군대를 불러들여서 서쪽으로 물러나서 진을 치셨습니다.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小邦之獲罪上國久矣(무민권농 원근지치조산자 함복궐거 거비대행여 소방지획죄상국기의)

놀란 백성들을 다독여서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멀고 가까운 곳으로 꿩이나 새처럼 흩어진 자들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만, 작은 나라의 죄가 상국에 지은 죄는 이미 오래였습니다.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 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기미지역 도원수강홍립 조병명조 병패피금 태조무황제 지류홍립등수인 여실방회 인막대언 이소방미부지오)

기미(1619)년에도 명나라에 부역하느라고 도원수인 강홍립이 군대를 이끌고 본의 아니게 명나라를 돕다가 크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을 때에 태조이신 무황제께서는 다만 이홍립등 몇 사람만 잡아 두시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은혜가 어찌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작은 나라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丁卯歳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 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정묘세 금황제명장동정 본국군신 피입해도 견사청성 황제윤지 시위형제국 강토복완 홍립역환의)

정묘(1627-인조5)년에도 지금의 황제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을 하셨는데 우리 임금과 신하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는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을 때에 황제께서는 형제국이라고 보시고 윤허하시는 덕택에 강토는 다시 회복되었고 이홍립도 또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自茲以往 禮遇不替 冠盖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即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丁寧反覆 不翅若提耳面命 而終未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자이이왕 예유불체 관개교적 불행부의선동 구성난제 소방신칙변신 언섭불손 이기문의사신소득 황제유관대지 부즉가병 내선강명지 유이사기정령반복 불시약제이면명 이종미면언 즉소방군신지죄 익무소도이)

그때부터 계속해서 예우가 바뀌지 않아서 사신들도 계속해서 자취를 남겼으나, 불행히도 근거없는 의논들과 선동질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빌미를 만들었으니 작은 나라의 주변의 신하들에게 불손한 명을 내린 문서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서 모두 알게 되었음에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파병하지 않았고 먼저 조서를 내려서 언제 군사를 보낼 것이라고 반복해서 간절히 귀속말로만 전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정성을 보였음에도 끝내 재앙을 면하지 못했으니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의 죄이니 어디로 도망으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皇帝既以大兵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倶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内侍看護既而(황제기이대병위남한 이우명편사 선함강도 궁빈왕자기경사가소 구피부획 황제계제장 부득요해 영종관급내시간호기이)

황제께서 이미 대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셨고, 왕궁의 비빈이며 왕자와 관리들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았지만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시들과 신종들에게 간호를 하게 하셨습니다.

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既亡而復存 宗社已絶而還續 環東土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實古昔簡策所稀覯也(대패은전 소방군신급기피획권속 복귀어구 상설변위양춘 고한전위시우 구우기망이복존 종사이절이환속 환동토수천리 함유어생성지택 차실고석간책소희구야)

가뭄에 큰비를 내리듯이 은전을 베푸시니 우리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들과 그에 따른 가족들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었으니 마치 서리와 눈이 변해서 따사로운 봄 볕이 된듯하고, 가뭄으로 말라가는 나무가 비를 만난 것과 같이 이 영역의 온 천지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생존한 것과 같으며, 종묘사직도 또한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고, 동쪽 땅의 수천리도 모두 황제의 살려줌에 의한 은택을 입었으니 이것은 실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於戯盛哉 漢水上流三田渡之南 即皇帝駐蹕之所也 壇塲在焉 我寡君爰命水部 就壇所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어희성재 한수상류삼전도지남 즉황제주필지소야 단장재언 아과군원명수부 취단소증이고대지 우벌석이비지 수제영구 이창부황제지공지덕 직여조화이동류야)

이렇게 훌륭하신 치적을 한강의 위쪽에 있는 삼전도의 남녘에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의 제단이 있는 곳에 우리 임금이 물을 공사하는 부서에 명하여 높은 단을 더 높이 고쳐 쌓게 하고 또 돌을 잘라서 비를 세워서 영원도록 그 공을 드리우게 하니 황제의 공덕과 그 조화가 강물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豈特我小邦 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茲也 顧搴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기특아소방 세세이영뢰 억역대조지인성무의무원불복자 미시불기우자야 고건천지지대 화일월지명 부족이방불기만일 근재기대략 명왈)

어찌 특히 우리 작은 나라 뿐이겠습니까. 또한 세세토록 영원히 영원히 대국을 의지하고 올바른 군대의 위력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천지와 같은 위대함과 일월같은 밝음을 그려낸다는 것은 만분의 일조차도 표현하기에 부족하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합니다. 그 명에 이르기를.

天降霜露 載蕭載育(천강상로 재숙재육)
惟帝則之 竝布威德(유제칙지 병포위덕)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 것을 펴시는데
오직 황제께서는 칙령을 내려서 위엄과 덕을 베푸십니다.

皇帝東征 十萬其師(황제동정 십만기사)
殷殷轟轟 如虎如豼(은은굉굉 여호여비)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시니 그 군사는 십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는 호랑이나 표범 같습니다.
西蕃窮髪 曁夫北落(서번궁발 기부배락)
執殳前驅 厥靈赫赫(집수전구 궐령혁혁)

서쪽 변방의 털도 없는 벌판과 북쪽 변두리의 사람들까지
창을 들고 진격하니 그 위세가 눈부십니다.

皇帝孔仁 誕降恩言(황제공인 탄강은언)
十行昭回 既嚴且温(십행소회 기엄차온)

황제께서는 공자의 인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니
열 줄의 밝은 회답은 엄숙하고도 따뜻했습니다.

始迷不知 自貽伊慼(시미부지 자이이척)
帝有明命 如寐之覺(제유명명 여매지각)

처음에는 미혹하여 모르고서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서 비로소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我后祗服 相率而歸(아후지복 상솔이귀)
匪惟怛威 惟德之依(비유달위 유덕지의)

우리 임금이 황제의 명에 감복하여 도성으로 돌아가신 것은
다만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오직 그 크신 더거에 의지함입니다.

皇帝嘉之 澤洽禮優(황제가지 택흡례우)
載色載笑 爰束戈矛(재색재소 원속과모)

황제께서 아름답게도 은택과 예우가 넉넉하게 베푸시니
얼굴빛도 웃으면서 창과 칼을 거둡니다.
何以錫之 駿馬輕裘(하이사지 준마경구)
都人士女 乃歌乃謳(도인사녀 내가내구)

무엇을 주셨냐면 준마와 갑옷이라
도성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합니다.

我后言旋 皇帝之賜(아후인선 황제지사)
皇帝班師 活我赤子(황제반사 활아적자)

우리 임금이 궁궐로 돌아간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리시니 우리 자식들도 살아났습니다.

哀我蕩析 勸我穡事(애아탕석 권아색사)
金甌依舊 翠壇維新(금구의구 취단유신)
枯骨再肉 寒荄復春(고골재육 한해복춘)

떠돌던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농삿일을 권하시고
옛날의 풍습고 그대로 따르게 하고 비취의 단도 새롭게 고치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생겨나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왔습니다.

有石巍然 大江之頭(유석외연 대강지두)
萬載三韓 皇帝之休(만재삼한 황제지휴)

우뚝하게 솟은 큰 비석은 큰 강의 머리에서
만년토록 삼한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겠습니다.

 嘉善大夫禮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 臣呂爾徴 奉敎篆
(가선대부예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신여이징 봉교전)

 資憲大夫漢城府判尹 臣吳竣 奉敎書
(자헌대부한성부판윤 신오준 봉교서)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臣李景奭 奉敎撰
(자헌대부이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신이경석 봉교찬)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숭덕사년십이월초팔일입)

 

헥헥~~~!!!

이렇게 긴 글이었네요. 그리고 어쩜 이렇게도 완벽하게 황제를 떠받드는 문장인지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비록 발번역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대략적인 내용에 대한 윤곽은 이해를 할 수가 있을 정도로 풀이를 했습니다. 하하~!

 

4. 누가 이 글을 지었는가?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이러한 글을 누가 지었는가를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누군들 자신의 왕을 칭송하는 글이야 꺼리낄 것이 있겠습니까만서도, 이것은 문제가 다릅니다. 청나라의 황제를 칭송하고 우리를 최대한 낮춰서 거슬리지 않아야만 살아남게 된다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순간에 처한 입장임을 고려한다면 누구라도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 봤습니다. 처음에 이 글을 써야 할 위치에 있는 직책을 알아 보면, 예문관 대제학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에는 그 자리가 공석이었다는 군요. 그래서 인조(仁祖)는 청나라 태종이 원하는 대로 비문 지을 사람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에게 지으라고 명을 했습니다. 다만 모두가 이러한 비문을 지을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사퇴를 했을 것은 당연지사였겠습니다. 그러나 다급한 것은 인조였으니 그러한 사정을 들어 줄 입장이 못되었던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인조14(1636)년에 청군 7만명, 몽골군 3만명, 한족군 2만명 등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엿새 만에 개성을 통과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을 치려다가 청나라 군대가 물밀듯이 몰아쳐 오자 우선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달아나게 되었답니다. 대신들이 북방을 방비하라고 그렇게 했지만 버티다가 보름 만에 한양성이 함락되었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급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이때가 간지로는 병자년이고 그래서 이 난리를 일러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참으로 남북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두지를 않았네요.

왕이 되어서 권세를 누리다가 하루 아침에 청에게 패하여 황제 앞에 나아가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의 예를 갖추는 삼고두례(三叩頭禮)를 했으니 그 치욕이야 일반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으로 짐작만 해 봅니다. 여하튼 누군가는 글을 지어서 청황제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지요.

이렇게 다그치자, 신하들도 어쩔 수가 없었던지라 이경석은 이틀 만에 비문을 받치고, 장유는 사흘 만에, 조희일은 나흘 만에 비문을 받쳤지만 이경전은 끝까지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하튼 대단한 기개였던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헐뜯던 틈바구니에서 그의 마음에 헤아려 준 선비가 있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이경석의 무덤은 삼전도비에서 20km정도 떨어진 판교너머 청계산 자락에 있다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넘어가는 옛길을 가다가 보면 표지판이 나타난다니까 혹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여다 보고 절이라도 한 자리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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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1&aid=0002813792&sid1=001]
 

그 곳에는 신도비 두 기가 세워져 있는데, 왼쪽의 오래 된 비석에는 불과 300여 년의 세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글자를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깎여나갔답니다. 누군가 고의로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송시열문인의 소행일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석은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글이라고 하는데, 그는 비문을 통해서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하고, 이경석을 봉황에 비유하여 영혼이나마 위로를 하였겠습니다만, 정작 박세당은 그 글로 인해서 또 곤욕을치뤘다고 하니 참으로 돌고 도는 인연의 사슬은 이렇게도 선악과 무관한가 싶습니다. 언제 기회가 오면 그 비문도 좀 읽어 봐야 하겠습니다.

 

5. 중국인과 일본인들의 희망사항

겉으로는 이웃사촌이라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자기네 속국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일부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흔적들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겸해서 들었습니다. 이것이 삼전도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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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이 트럼프를 만나서 했다는 그 말, '한국도 원래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은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삼전도비의 내용을 살펴보고서야 명료하게 이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냥 우연히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내심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그들의 야망과 같은 신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지요.

그러한 말을 듣고 분개하는 것은, 또한 힘없고 가진 것이 없는 국민들의 마음 뿐입니다. 대통령 되기에 정신이 없는 잘난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그것이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지 불확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합니다.

비록 38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상황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잊고 싶은 역사이고, 중국에게는 잊고 싶지 않은 역사로 역력하게 살아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는 애둘러서 청나라는 중국인의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지배한 시대였다고 아무리 힘주어서 말해봐야 낚시 바늘에 걸린 지렁이의 자존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야, 이리와서 나좀 당겨봐! 인간을 한 놈 낚았는데 힘이 부족하네~!"

일본도 겸해서 떠오릅니다. 왜 삼전도비를 찾아서 세워놓았을까요?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말살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대일본(大日本)이 백제든 신라든 잠시든 간에 상국(上國)으로 떠받들었었다는 잊고 싶은 역사의 조각이 있기 때문임을 미뤄서 짐작할 수가 있지 싶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지나갔지만 그 흔적은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조작하고 꾸미고 만들고 뒤집어 씌우고 싶어도 말이지요. 결국은 사실은 사실이고, 조작은 조작이라는 것을 항상 접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묻혀 있던 역사의 실마리들이 삼전도비처럼 땅 속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드러나니까 말이지요.

비문을 살펴보고 싶었던 것도 과연 그 속에 어떤 글을 써 놨길래 시진핑이란 인물이 국제적인 회의 석상에서 그러한 말을 했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뭡니까?

도대체 박정희가 일본에게 무슨 약속을 했길래....
도대체 박근혜가 아베와 무슨 협상을 했길래....
도대체 노무현이 미국에 갔다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참, 알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국민에게 당당하게 공개하지 못한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도 언젠가 삼전도비 처럼 세상에 들어나게 될 것이고, 그 부끄러움은 또다시 그 후손들의 몫이 되겠지요.

비록 정치는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손가락을 짓이기면서까지 비문을 쓰지 않은 사람도 있고, 왕의 뜻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붓을 잡았던 사람도 있었던 것도 또한 그 시대의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세월이 흐르면 이제 그 비문을 쓴 것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하는 비열한 인간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입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끌려갔던 조선의 딸들이 죽지 않고 살아왔을 적에(還鄕女) 과거의 부끄러운 시절이 떠올랐던 이 땅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화냥년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역사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에 최선을 다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거에서 바라봤을 적에도, 혹은 미래에서 바라다 봤을 적에도 과연 최선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이 글을 읽으시는 벗님들의 몫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비록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야 있을지라도' 후대에 비웃음으로 남게 될 삶은 살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경석 선생의 유언을....

"너희들은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허물을 물고 뜯으면서 오늘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현재의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럼에도 언제나 두쪽으로 나뉘어서 흑백논쟁을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

비판이 아닌 비방과,
창조가 아닌 모방과,
독립이 아닌 추종들.

그렇게 시류를 타고 부귀영화를 꿈꾸면서도 모두가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힘주어서 말을 하지요, 그래가면서 자기 주머니에 들어갈 이익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충현열사는 물론 제외하고입니다.

친일파,
친중파,
친미파,
친북파,
친박파,
친문파,
친........


그 모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는 무엇이고 민족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가는 존재하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게 어디있어? 그냥 우리가 오늘을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이름하여 국가라로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요. 호시탐탐(虎視眈眈)하고 있는 강대국 사이에서.... 오늘도 한국호는 광대처럼 줄타기를 합니다.

하긴..... 우리 나라를 침략한 중국이나 일본을 향해서 비난하면서도, 중원을 침략했던 광개토대왕은 칭송하는 것이 현실이니..... 불륜과 로맨스 사이에서 마음도 널뛰기를 하는가 봅니다. 평정심은 순식간에 어디로 사라지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애둘러 변명을 하는 누추함이라니... 쯧쯧~!

문득, 기개(氣槪)를 떠올려 봅니다.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오늘을 살고자 하는 정치인은 누구이며, 국민을 볼모로 삼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정치꾼은 또 누구일까요? 이러한 것을 구분이나 할 수가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있기나 한 것일까요?

아, 이럼 안 되는데.... 낭월에게 정치를 하라고 한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도 없으면서 이렇게 우물 속에 들어 앉아서 잘난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냉소(冷笑)를 날리고 있는 것도 숨은 겁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어? 이러려고 삼전도비를 찾아 본 것이 아닌데....

삼전도비를 따라서 줄줄이 나오는 비극적인 당시의 상황들을 보면서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안타까운 분노의 연기가 마음을 어지럽힌 모양입니다. 당파싸움으로, 체면전쟁으로 국민은 도탄에 빠져있건 말건 자신들만 양반이라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들 하지요....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짓거리는 끝이 없는 공회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깝기에 해 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삼전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봤습니다. 겸해서 당시의 상황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배웠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대로만 쓸 수가 없는 경우도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글은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음을.....

 

2017년 4월 2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