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 간지(干支)와 팔괘(八卦)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작성일
2013-05-19 21:0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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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93화] 간지(干支)와 팔괘(八卦)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이제 누가 뭐래도 여름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봉축행사(奉祝行事)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습니다만 온 종일 내리는 비로 인해서 온 산천이 촉촉한 것이 감성(感性)을 건드리는 것 같네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생각을 해 보고 싶었던 간지(干支)와 주역(周易)의 관계에 대해서 잠시 망상을 해 봤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그냥 심심파적으로 가볍게 생각해 보는 것이니 내용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시작합니다.

 

1. 서로 닮아 있는 부분(部分)

  우선 천간(天干)은 십간(十干)이고 주역(周易)의 기본형은 팔괘(八卦)입니다. 숫자로만 봐서는 2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서로 닮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십간(十干)과 팔괘(八卦)의 비교

十干

八卦


  표에서 보듯이, 목토금(木土金)은 음양(陰陽)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공통(共通)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수화(水火)입니다. 십간(十干)에서는 음양(陰陽)으로 나눠져 있는데, 팔괘(八卦)에서는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슷하면서도 서로 약간의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왜 주역(周易)에서는 수화(水火)를 음양(陰陽)으로 나누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낭월의 좁은 소견으로는 수화(水火)의 성질에 의해서 음양으로 나눌 수가 없었겠다는 결론(結論)을 내렸습니다. 즉 화(火)는 양극(陽極)에 해당하므로 다시 음양(陰陽)으로 나눌 필요가 없었고, 수(水)도 마찬가지로 음극(陰極)에 해당하므로 다시 음양(陰陽)으로 나눌 필요가 없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만약에 목(木)이나 금(金)이나 토(土)에서 이러한 현상(現象)이 생겼다고 한다면 낭월도 어찌 해 볼 방법이 없었겠습니다만 다행히도 그것이 수화(水火)이기 때문에 양극(兩極)에 머물러 있는 오행(五行)이라는 점을 잡고 늘어지면 그런대로 해결책(解決策)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혹 여기에 대해서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알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간지(干支)는 조합(組合)이 60가지인데, 팔괘(八卦)의 조합은 64가지가 됩니다. 서로의 숫자를 보게 되면 겨우 4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지만 똑 같지는 않은 것이 참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무리 서로 같도록 해 보려고 해도 간지(干支)에서 네 개를 늘여 볼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팔괘(八卦)에서 네 개를 잘라 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서로 다른 부분(部分)

  간지와 팔괘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간지(干支)는 22글자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주역(周易)은 오로지 8자 뿐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라고 봐야 하지 싶습니다.

  물론 22글자나 되지만 본질(本質)을 들여다본다면 지지(地支)는 천간(天干)의 확장(擴張)에 불과하므로 십간(十干)으로만 거론을 해도 될 수는 있겠지만 지지(地支)가 없어져버리면 60가지의 조합(組合)이 불가능(不可能)해져버립니다. 그래서 이해는 되지만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지지(地支)의 열두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가장 큰 차이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 조합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주역(周易)의 조합은 곱하기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국단처럼 표시하면 8×8=64라는 공식(公式)에 그대로 부합(附合)이 됩니다. 이렇게 간단명료(簡單明瞭)한 방법을 통해서 육십사괘(六十四卦)가 구성(構成)되므로 이것을 얻어서 해석(解釋)하면 됩니다.

  그런데 간지(干支)는 묘한 공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방법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여하튼 10과 12의 배열에서 2가 남거나 부족한 것으로 다시 연결을 하여 서로 맞아떨어질 때까지 나가다가 보면 60번째에서 해결이 납니다. 참 이렇게 설명하려고 생각해 보니까 없어 보이네요. 하하~

  간명(簡明)하게 팔팔육십사라고 하면 멋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렇지만 ‘난 개똥벌레라서 어쩔 수가 없다.’는 노랫말처럼 간지(干支)는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달리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고 해야 할 모양입니다.

  다른 점은 또 있습니다. 간지는 반드시 시간이 있어야 표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팔괘는 시간보다는 공간에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시간이 언제인지도 묻지 않습니다. 그냥 하늘의 뜻을 바로 물으면 답이 나오는데 새벽에 낳았는지 동이 틀 무렵에 낳았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이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팔괘는 오로지 음양(陰陽)을 위주로 생성됩니다. 그래서 일음일양시위도(一陰一陽是謂道)라고 하기도 하네요. 그런가 하면 간지는 오행(五行)을 위주로 대입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음양의 이치로 형성되었고 또 하나는 오행의 이치로 구성되었지만 이 둘은 서로 충돌이 되지 않고 때로는 융합하고 또 때로는 분리하면서 제각기 자신의 모습대로 대자연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는 음이고 하나는 양이군요. 아마도 오행은 음의 기운이라고 본다면 음양은 양의 기운이므로 간지학은 음의 고정된 의미가 있고 역학은 양의 변화무쌍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타당하겠습니다.

 

3. 간지(干支)와 팔괘(八卦) 중의 최고령자(最高齡者)는?

  그러니까 간지(干支)와 팔괘(八卦) 중에서 누가 더 오래 되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단편적(斷片的)인 자료(資料)를 의지하여 판단하는 것이 정확(正確)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를 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봐서 생각해 봤습니다.
 
                        
                                          (열두 동물의 갑골문자)

 

 

  무엇보다도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자(文字)가 생겨나기 이전에 팔괘(八卦)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간지(干支)는 분명(分明)히 문자(文字)로 보이는 까닭이지요. 그래서 혹시라도 간지는 팔괘의 훨씬 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은 갑골문(甲骨文)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입니다.

  갑골문을 설명한 책을 살펴보니, 간지(干支)를 표시(表示)한 글자는 나타나고 있는데 팔괘(八卦)를 의미하는 글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문자 이전에 있었다고 전하는 괘상(卦象)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과연 전해들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이야기가 맞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해 보게 되네요.

 

  《주역철학사》라는 책을 보니까 갑골문에는 오늘날과 같은 팔괘의 표시가 아니라 숫자로 나타냈다고 합니다. 한 쪽을 이미지로 올려봅니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숫자를 사용해서 점괘를 나타내기는 하였지만 복희씨가 그렸다는 세련된 괘상은 아니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어쩌면 이후로 가면서 점차로 숫자를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수족(水族)의 문자(文字)라고 전하는 수서(水書)에도 마찬가지로 간지(干支)에 대한 표시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어느 것이 더 오래 되었다고 단언(斷言)을 할 상황(狀況)은 아니라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심증(心證)으로는 팔괘(八卦)가 더 오래 되었을 거 같고, 물증(物證)은 간지(干支)가 더 오래 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여하튼 오래 전의 이야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4. 간지와 팔괘의 인식(認識)에 대한 차이(差異)

  상도(常道)란 그렇게 민중(民衆)의 의식(意識) 속에서 무심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일상적(日常的)으로 느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면, 팔괘(八卦)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반면에 간지(干支)는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지지(地支)의 대명사(代名詞)인 띠에 대해서는 말을 배우자마자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네요.

  반면에 주역(周易)은 공자(孔子)도 만년(晩年)에 연구할 정도로 난해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습니다. 그렇다면 학자(學者)들이 좋아하는 것이 역경(易經)이라고 한다면 민간인(民間人)들이 좋아하는 것은 육갑(六甲)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서민적인 것과 귀족적인 것으로 구분을 한다면 주역은 과연 있어 보이는 분야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전문가(專門家)에 대한 인식(認識)도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지(干支)를 연구한다고 하면 사주쟁이라고 하거나 기껏 대접을 한다고 해도 명리학자(命理學者)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역(周易)을 연구한다고 하면 단번에 철학자(哲學者)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만 봐도 둘 사이에는 실로 커다란 강이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싶습니다.

  어쩐 일인지 다 같은 동양철학(東洋哲學)이면서도 주역(周易)을 이야기하면 있어 보이고 간지(干支)를 이야기하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는지 말이지요. 물론 둘의 사정을 제대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밖에서 바라보고 대접하는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5. 간지는 인간(人間)이고 팔괘는 자연(自然)이다.

  물론 낭월은 간지(干支)를 연구하는 사람이니 명리학자(命理學者)라는 호칭(呼稱)에 만족(滿足)합니다. 간지의 오묘한 변화를 읽으면서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연결시키는 재미는 여전히 큰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수준이 간지나 연구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쩐 까닭인지 요즘에 와서는 주역에 대해서도 자주 관심을 두게 되네요. 수준이 높아지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나이가 들어가는 까닭일까요? 무엇보다도 대만의 증사강(曾仕强) 선생의 동영상을 보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영상만 보다가 아무래도 양에 차지 않아서 아예 대만으로 책을 주문했습니다. 마치 영화(映畵)가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작(原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과 같이 뭔가 책을 보면서 차근차근 정리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봅니다.   
 
                 

  오늘도 증사강 선생의 도덕경 강의를 한 편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습관대로 '도가도, 비상도'라고 중얼거렸던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칼같이 정리를 해 버리는 것을 보고 과연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경우로 나눠서 설명하면서 도(道),가도(可道),비상도(非常道)로 읽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없이 읽었던 것이 멋적어졌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지대방의 고전의 향기에 있는 내용입니다.

   간지(干支)를 공부하게 되면 여하튼 인생(人生)의 모습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타고 난 사주팔자(四柱八字)의 모습을 보면서 풀이를 할 수가 있는 것도 간지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칫하면 인간에게 갇혀서 더 넓은 곳을 바라볼 수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반면에 팔괘는 자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항상 자연에 대해서 말하게 되기 때문에 멋이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없는 자연도 존재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에서 자연으로 향하는 것이 간지학(干支學)이고, 자연에서 인간으로 향하는 것이 팔괘학(八卦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6. 어느 것이나 목적지는 하나같이 행복(幸福)

  자연에서 배우는 것도 보다 행복하고 번뇌를 벗어나는 것이 분명할 것이고, 인간이 타고난 업연(業緣)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어제보다는 행복한 내일을 추구(追求)하는 것이 그 목적일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어느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 존재해야 할 의미는 없다고 봐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언제는 간지(干支)가 매력적(魅力的)으로 보이더니 또 언제는 팔괘(八卦)가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간지에 심취(心醉)했다가 내일은 팔괘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자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서는 사주를 적느라고 돋보기를 찾지 말고 괘상(卦象)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뜻을 살피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언제부턴가는 낭월도 사주(四柱)와 점괘(占卦)와 타로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정성(精誠)만 있다면 어느 것을 사용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읽어 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대방의 질문이 다 마무리되기도 전에 해결책(解決策)이 먼저 떠오르기도 해서 너무 경망(輕妄)스러워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만 실은 좀 더 생각해 봐도 그것이 최선(最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그냥 느낌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벗님의 공부는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은 간지(干支)에 머물러서 공부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검색어(檢索語)에 이끌려서 낭월학당에 접속하게 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또한 아름다운 인연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것은 여하튼 팔괘이든 간지이든 그 핵심(核心)을 얻게 된다면 결과(結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7. 오직 희망하는 것은 단순명쾌(單純明快)하고자.

  문득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언자부지(言者不知)’ 떠드는 놈은 진짜를 몰러~!

  ‘지자무언(知者無言)’ 참으로 아는 놈은 말이 없제~!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을 많이 하면 자주 막히게 된다니깐!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결론은 행복(幸福)에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最大限)으로 단순(單純)하고 명쾌(明快)하게 설명(說明)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慾心)도 가져봅니다. 부처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법(說法)했지만 그것을 요약(要約)하니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다 담기더라는 말도 있지만 다시 반야심경을 요약하니 ‘무(無)’라는 한 글자에 다 들어 가더라지요? 그렇게 생각을 해 보면 많이 배우는 것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 봅니다.

  오늘의 하루가 너무나 감사하고 그래서 순간순간이 짜릿한 흥분으로 가득한 시간으로 점철(點綴)되시기를 기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가볍게 하고 배는 채우라’는 가르침대로 너무 많은 지식(知識)은 오히려 번뇌(煩惱)의 씨앗이 됨을 생각하고 가끔은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숲 속을 거닐어 보시는 여유(餘裕)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허튼소리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소서~!

  

                         2013년 5월 19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