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 돈을 따를 것이냐? 재능을 찾을 것이냐?

작성일
2013-04-1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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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돈을 따를 것이냐? 재능을 찾을 것이냐?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요즘은 토크방송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특히 종편들에서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적으로 수십 명의 유명인들을 앉혀놓고는 이야기를 풀어하는 형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 잘 골라보면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것도 있더군요. 그러다가 한 마디의 명언(名言)이 나오면 메모도 하면서 즐기곤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사업을 하면서 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방문자들의 모습과 연상되어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서 정리를 해 봅니다. 뭔가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1.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얼마요?

  상담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부분이 그렇기는 하지만 특별히 금전적(金錢的)인 면에 대해서 집착(執着)을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이 있는 분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되면서도 항상 염려스러운 것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물욕(物慾)을 채워 줄 운은 없기 때문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탐욕(貪慾)의 크기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덮을 수가 없는 까닭이지요.

  무엇이나 다 그렇지만 큰 쪽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고, 지금도 또한 마찬가지로 여전히 강대국의 입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세상살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주팔자(四柱八字)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주에 많이 있는 글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과 사대주의는 유사(類似)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인성(印星)이 많으면 그에게 공부가 깊다고 하지는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공부에 관심이 적다고 해야 할 경우가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재성(財星)이 많은 경우에는 예외(例外)가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物質的)인 면에 대해서 관심(關心)을 많이 갖게 되는 현상(現象)을 보게 되네요. 이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 그래서 일률적(一律的)으로 이론(理論)을 세울 수가 없어서 인성(印星)의 방향과 재성(財星)의 방향은 상반(相半)된 관찰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재성(財星)이 많은 사람은 결과(結果)에 대해서 상당히 집착(執着)을 하게 되는 것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서(古書)에서도 ‘재다신약(財多身弱)은 부옥빈인(富屋貧人)’이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재성(財星)이 과다(過多)하게 많은 사람은 부잣집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봤던 것 같은데, 가난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돈이 많은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형태를 논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향(性向)을 갖게 되는 경우에는 과정(過程)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결과적으로 그 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를 ‘돈을 따르는 사주의 구조’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이름을 붙여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의 방문자(訪問者)를 만나게 되면 다른 이야기는 그냥 대충 흘려듣다가 자신의 사주에서 얼마나 많은 재물이 인연이 주어졌는지에 대해서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어떻게 해야 돈을 모을 수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간해서는 묻지 않더군요. 그야말로 자신이 만만해서 결과에 대해서만 마음이 머무르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이 되는 경우인데 상담실을 찾는 경우를 보면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은 그만큼 자신의 미래에 어떤 부유(富裕)함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올 해의 운에서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수가 있을 것인지를 묻지, 어떻게 하면 좋은 결실을 거둘 수가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方法論)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돈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얼마인지를 알고 싶은 생각이야 백번이라도 이해가 되지만 그것을 수치로 논하고자 하는 자체가 얼마나 성급한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역시 아직도 생각해야 할 것이 많겠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지게 됩니다. 결실의 액수에 대한 결과를 물어서 될 일이 아니겠는데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개선(改善)이나 노력(努力)에 대해서는 관심(關心)이 적게 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사실은 오늘 하루가 모여서 평생(平生)을 살아가는 여정(旅程)이 되듯이, 화가(畵家)도 붓을 한 번 들어서 물감을 찍는 것에서부터 그림이 시작되는데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결과물에 가게 되면 내가 이 그림을 팔아서 얼마를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을 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항상 접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로또를 1회부터 2억 5천만 원어치를 구입했던 할아버지가 등장을 하시더군요.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얼마간의 수익이 발생하면 그것을 모두 로또 구입하는 것에 퍼부었던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의 삶이 넉넉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그만두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투자해서 당첨이 된 금액은 2백만 원 정도라던가 그랬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에게서의 과정은 참으로 의미가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벗님은 자신의 성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돈을 따라가는 성향이지는 않으시는지요?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으니까 돈만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있겠습니까만서도 그것을 지속적인 염원(念願)으로 삼아서 간구(懇求)하게 된다면 그의 삶에 대해서 나중에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인지는 하늘만이 안다고 하겠지만, 최대한의 큰 결과물을 얻더라도 더욱 많은 성과를 위해서 다시 허둥대야만 하는 나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영원(永遠)히 영혼(靈魂)의 안식(安息)을 얻을 날은 없어질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사주와 무관하게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할 사색(思索)의 영역(領域)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팔자가 그래서 그렇다고 하는 것도 모양이 나는 것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보시고 혹시라도 결과물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으시다면 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떨지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시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일순간(一瞬間)에 흘러가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요. 그 할아버지처럼 나이 70이 넘어서야 후회(後悔)를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러한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직업(職業)과 성별(性別)과 연령(年齡)을 막론(莫論)하고 누구나 빠져들 수가 있는 매력(魅力)이 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경영(經營)을 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또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 회한(悔恨)을 남기는 것이겠지요.

 

2. 나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문자를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돈을 얼마나 많이 주무르면서, 큰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가 있을 것인지를 묻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것은 저 깊은 내면에 묻어놓고 우선 자신의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가장 시행착오(試行錯誤)를 덜 겪으면서 목적지(目的地)에 도달(到達)할 수가 있을 것인지를 묻는 경우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래도 방법론(方法論)에 비중(比重)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패(失敗)를 할 가능성(可能性)을 최대한(最大限)으로 줄이는 현명(賢明)한 판단(判斷)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잘 할 수가 있는 방면(方面)에서 노력(努力)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의 과정(過程)은 풍요(豊饒)로울 수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진인사(盡人事)와 대천명(待天命)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재물을 묻는 사람은 최소한(最小限)의 진인사(盡人事)를 우선적(優先的)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지요. ‘진인사(盡人事)’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선(最善)을 다 하는 것’이 아니겠느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가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 하라는 것이지 돈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하라는 의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찾는 사람은 일류(一流)가 되고 싶지만 남을 따라서 일류(一流)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류대학교를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잘 할 수가 있는 일을 배울 수가 있는 대학교를 찾아 갈 것이고, 그 학교가 도시에 있거나 시골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介意)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일류가 되지 않으면 성공(成功)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과는 맞지도 않는 의대(醫大)나 법대(法大)를 추구(追求)하는 젊은이들도 결코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분(身分)을 상승(上昇)시켜야만 일류의 인생(人生)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학교를 선택하지만 그것조차도 마땅하지 않으면 아예 학업보다는 취업(就業)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외국으로 나가서 전문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技倆)을 연마해서 크게 성공하여 한 분야에서 떵떵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能力)을 극대화(極大化)시켜서 역량(力量)을 키운 다음에 비로소 그에 대한 보답(報答)으로 주어지는 보수(報酬)를 얻는 것이야말로 진인사(盡人事)의 진면목(眞面目)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자신의 적성(適性)이 법률가(法律家)라면 법대(法大)를 가는 것이 진인사(盡人事)이고 의술(醫術)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대(醫大)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最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두 말을 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3. 천명(天命)을 기다리기 전에 선행(先行)해야 할 일

  그렇다면 아직도 나에게 기회(機會)가 있다고 할 경우에 어떤 선택(選擇)을 해야 할 것인지도 명료(明瞭)해 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최선을 다 할 수가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겠습니다. 그런데 조급(躁急)한 마음에 진인사(盡人事)는 안중(眼中)에 없고 오로지 천명(天命)만을 묻고 있는 가련한 삶을 보게 되면 씁쓸한 감회(感懷)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상담실에서 찾아온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신 철학자(哲學者)께서는 모두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말을 해 줘도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은 빤하고, 그렇다고 그의 장단만 맞춰주자니 학자의 자존심(自尊心)은 뒷전으로 미루고서라도, 그것이 과연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에 옳은 것인지 부터도 갈등(葛藤)입니다. 더구나 열심히 돈을 따라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데 불쑥 한다는 말이

  “어? 이상하네요. 어디에 가 봤더니 사주에 재물이 다섯이나 있어서 큰 부자가 되겠다고 하던데 스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반문(反問)이라로 할 경우에는 참으로 난감(難堪)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는 뭐라고 해야 할 것인지가 참 거시기 하지요. 그래서 가끔은 먼 산을 바라볼 때도 있답니다. 하하~!

  그러나, 현명하신 벗님은 이치를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혹 누군가 이러한 것에 대해서 묻거든, ‘조국이 널 위해서 뭘 해줬는지를 묻지 말고 네가 조국을 위해서 뭘 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지만, 최소한(最小限) 자신의 내면(內面)에서 들리는 타고 난 능력(能力)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봤는지는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생각하고 그림을 처음부터 그리는 것이 고치는 것보다도 훨씬 빠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면 또한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미 잘못 된 그림이라면 아무리 고쳐봐도 제대로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말이 있잖아요. ‘헌 집을 고치는 것이 새로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든다.’는 만고(萬古)의 진리(眞理)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잠시 방문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생각하다가 한 마음이 일어나서 몇 자 적어 봤습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생각을 해 볼 점이 있었다면 더없이 감사(感謝)하겠습니다. 오늘도 오늘에 집중(集中)하신 날이셨기를 기원(祈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3년 4월 10일 저녁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