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제43장. 여로(旅路)
3. 깨진 접시의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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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삼진도 자원에게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생각만 했다가 자원의 말 한마디로 일거에 해결되었다.
“그야 누이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나도 기꺼이 가르쳐 줘야지.”
“고마워요. 그렇다면 이제 과연 여정이 이 공부를 마무리할 수가 있을 것인지를 알려줘요. 자원도 궁금하거든요. 이번엔 무엇으로 득괘(得卦)를 삼을지 흥미진진(興味津津)한걸요. 호호~!”
자원이 이렇게 말하면서 여정을 보니까 생각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을 보고는 찻잔에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자, 차 마셔~!”
“예, 누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찻잔을 들었다. 그것을 본 삼진이 종이에 글자를 썼다.
“그건 감괘(坎卦)가 아닙니까?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삼진이 쓴 것을 보고서 여정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삼진이 말없이 찻잔을 가리켰다. 방금 자원이 따라준 차를 보면서 수(水)를 적용해서 감수(坎水)를 찾은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여정도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점원이 음식을 먹고 간 손님의 상을 치우다가 그릇을 떨어뜨렸는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쨍그랑~!’
그 소리를 듣고서 모두 삼진을 쳐다봤다. 이것도 무슨 조짐이 되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삼진이 다시 감(坎)의 위에 한 글자를 추가했다.
“이것은 천둥과 번개를 의미하는 진괘(震卦)가 아닙니까? 접시며 밥그릇이 깨어지는 것에서 우레를 찾은 것입니까?”
이번에는 여정도 이해가 된다는 듯이 말했다.
“옳지~!”
그러자 여정은 두 괘를 모아서 대성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공부가 부족해서 그 이상은 생각이 미치기 어려웠다. 그것을 본 우창이 거들었다.
“오호~! 봐하니, 이번 괘는 뢰수해(雷水解)로구나.”
“그렇습니다. 스승님. 점기(占機)가 제대로 발동한 것으로 생각해 봐도 되지 싶습니다. 아마도 여정 아우가 공부할 때가 저절로 도달했지 싶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여정은 어떤 내용이기에 저렇게 긍정적으로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면 풀이를 해 줄 것이라고 여겨서 눈만 멀뚱하게 뜨고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삼진이 말했다.
“여정이 무척 궁금한가 보구나. 해괘(解卦)는 얽혔던 일들이나 모르는 것도 분해가 되어서 낱낱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의미로 보면 되지.”
“좋은 뜻인 것은 알겠습니다만 조금만 더 상세하게 풀이해 주시겠습니까?”
여정은 스스로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파고드는 면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은 삼진이 다시 설명했다.
“아래의 물은 응고(凝固)하는 성분이지.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일체 만물이 모두 생명을 버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동장군(冬將軍)과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러한 얼음이 벼락을 맞아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잖은가? 이것은 그릇이 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지.”
“와~! 이제야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 알고는 싶었으나 여러 환경에 묶이게 되어서 마음대로 공부할 수가 없어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했는데 이제 얼음이 산산조각이 나듯이 그러한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산천(山川)에 봄이 되어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춘삼월(春三月)이 되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 잘 이해했군. 더구나 우레는 번갯불로 해석도 가능하니까 이것은 밝은 빛이기도 하다네. 빛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이 점괘를 얻은 사람이 수행(修行)하거나 학문(學問)을 연마하고자 한다면 그 조짐은 더욱 좋은 암시가 될 테니 이제야 좋은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음을 축하해도 될 듯싶으이. 하하하~!”
이렇게 풀이를 한 삼진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가왔는지 탁자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자 우창 일행은 하룻밤을 묵을 2층의 객사로 안내되었다. 다행히 다른 객은 없는지 조용해서 맘에 들었다. 주인이 과일을 쟁반에 담아서 들고 올라오자 가장 넓은 우창의 방으로 모여서 다시 이야기꽃을 비웠다.
“과일도 들면서 담소하시고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는 나가자 자원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참, 오라버니, 아까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이야기해 봐요.”
자원이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이렇게 묻는 말에 우창도 삼진의 설명이 궁금해서 쳐다봤다. 그러자 삼진이 나직하게 설명했다.
“실은 올해 겨우 20세의 소년을 사모하고 있답니다. 점괘의 내용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고 하더군요. 여인의 나이는 이미 45세인데 이웃에 사는 아이에게 정신을 빼앗겨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어머! 그럴 수도 있구나. 호호호~!”
자원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는 것을 꾹 누르고 재미있다는 듯이 조용하게 웃었다.
“아이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는데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것이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하다가는 큰 난리가 날 것이 빤하기에 마지막으로 큰 다툼에 대한 조짐을 듣고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합니다. 스승님, 이러한 고민에 대해서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요? 어떤 조언이 필요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아서 나중에 스승님께 여쭤보겠다고만 했습니다.”
저녁밥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조용하게 되자 주인은 다시 차를 들고 와서 기척을 했다.
“차 한 잔 가져왔어요~!”
그 말에 여정이 얼른 문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고 와서는 한 잔씩 따라줬다. 우창이 여인의 뜻을 헤아리고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대략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다면 아래로만 흐르겠으나 실은 바람과 같아서 상하좌우에 흐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듣자니 지금 원하지 않는 곳으로 마음이 흘러서 번뇌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예, 참 마음대로 안 되네요. 어떡하면 좋을지 현명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인도 눈치가 있어서 무슨 뜻으로 묻는지를 알고 답했다.
“마음으로야 당연히 순리를 따라야지요. 자식과도 같은 사람을 사모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요. 더구나 그 아이는 아들의 친구인걸요. 그래도 이끌리는 마음으로만 생각한다면 냉정히 돌아서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가 봐요.”
“이해합니다. 감정은 생각대로 잘 따르지 않으니까요. 고민하시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점괘에 있습니다. 함지췌(咸之萃)는 아시니 이것을 조금 더 풀어보면, 함(咸)은 감정(感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참으로 오묘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췌(萃)의 글자는 ‘모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풀[초(艹)]아래에 졸(卒)이지 않습니까? 이 글자를 풀이해서 생각해 보면 소인들이 풀밭에 모여든다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오합지졸(烏合之卒)’과 같다고도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다만 뜻은 이해가 잘 되지......”
“다른 책을 보면 「함지췌는 걸왕(桀王)과 도척(盜跖)이 같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흉악함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포악하기로 유명한 걸왕은 부인이 사모하는 아이가 될 것이고 천하의 가장 큰 도적으로 알려진 도척은 부인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런 말씀을 드려서 미안합니다만, 그 결과는 큰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포기하느니만 못하다는 뜻이 뚜렷하게 들어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창의 풀이를 듣고 있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까지나 일이 커진단 말인가요? 그건 너무 확대해석한 것은 아닌가요?”
여인의 말을 듣고서 우창이 다시 조곤조곤 설명했다.
“비록 한 나라의 입장으로 보면 작은 마을의 소소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인과 그 도령의 관점으로 본다면 과연 소소한 일일까요? 부인이 도척이라는 뜻이니 도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어머~! 그건 맞네요. 남의 마음을 훔치려고 하니까요. 호호호~!”
여인도 그제야 이해되는지 같이 웃으며 얼굴이 펴졌다. 우창도 이 정도면 절반은 해결이 되었다고 봐도 되지 싶었다. 다시 확실하게 희망을 주려고 풀어서 설명했다.
“만약에 마음을 바꾸면 점괘도 바뀔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겠지만요. 그 말씀은 지금 마음의 갈등을 잊으라는 뜻이겠지요?”
“만약에 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 조짐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정말 궁금해요. 어떻게 될지 알려주세요.”
“췌괘(萃卦)는 택지췌(澤地萃)가 됩니다. 이것을 놓고서 그대로 걸왕과 도척이 싸우는 상황이 되는 것을 지켜보게 되겠지만 그 마음을 뒤집는다면 이번에는 점괘가 지택림(地澤臨)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머~! 재미있어요. 마음이야 자기가 먹을 나름이잖아요? 그런데 임괘(臨卦)는 무슨 뜻인가요?”
“그야 사모(思慕)하는 사람이 문 앞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광림(光臨)의 뜻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종이에 괘상을 그려서 보여줬다.
“왼쪽의 췌괘(萃卦)가 마음을 바꾸니 지괘(之卦)인 지택림(地澤臨)괘가 되었습니다. 괘의 모양을 볼까요? 췌괘는 음양이 뒤섞여서 어지러워 보입니다만, 뒤집힌 오른쪽의 임괘는 어떻습니까?”
“정말 가지런하네요. 아래의 두 양을 위의 네 음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서 보이는 것일까요?”
“잘 보셨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결과가 빤한 것에 집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정리하고 문전(門前)을 깨끗하게 쓸어놓고 멋진 낭군(郎君)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여인은 잠시 말이 없이 우창이 그려놓은 괘상을 바라봤다. 심사(心思)가 복잡하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다그치지 않고 가만히 차를 따라서 마셨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 좋은 사람이 찾아오게 될까요?”
“그야 난들 알겠습니까? 점괘에 나타난 것을 그대로 풀이해 드릴 따름입니다. 다만, 제대로 점기가 동한 것으로 봐서는 그렇게 될 조짐이 다분하다고 봐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인이 다짐하듯이 묻자 목소리에 힘을 실어서 대답했다. 이런 경우에는 흔들리는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을 한번 뒤집었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평온해질 수가 있을까요?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하던 마음이 평온한 앵두호의 수면처럼 잔잔해진 것같이 느껴졌어요. 그간 왜 그렇게 집착하고 힘들어했나 싶은 정도예요. 과연 점괘가 뒤집히듯이 마음도 뒤집힐 수가 있는 것이었네요. 정말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니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마워요!”
“그러시다면 참 다행입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 술이라도 한 병 대접해야 하겠어요. 잠시만 계세요. 대문을 닫고 돌아올게요.”
여인이 바삐 나가자, 이번에는 여정의 눈이 동그라지면서 말했다.
“스승님. 참으로 감동했습니다. 칼로 사람을 살리면 활인검(活人劍)이라고 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말로써 사람을 살리면 활인술(活人術)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활인설(活人舌)라고 해야 할까요? 참으로 세상에는 이런 이치도 있다는 것을 오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우창은 여정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자원이 한마디 거들었다.
“여정아 촌철살인(寸鐵殺人)은 들어봤지?”
“예, 누님. 그런 말은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살인이 아니잖습니까? 그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촌철활인(寸鐵活人)이라고 하면 되잖아?”
“아, 맞아요~! 과연 누님의 말씀도 활인구네요. 하하~!”
“원, 어림도 없지. 나야 싸부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에 불과한걸. 그나저나 여정이 이번 여행에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축하해~!”
“고맙습니다. 누님도 많이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보는 것이나, 듣는 것 하나가 모두 신기막측(神奇莫測)한 것들이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칫 돌아버릴지도 모르겠으니까요. 귀한 어르신들을 모시게 해 주신 자사 어른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여정이 진심으로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자원에게 말하는데 주인이 다시 술병과 안주를 챙겨서 들어왔다.
“혹 고단한데 귀찮게 해 드리는 건 아니죠?”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얼른 받았다.
“원 그럴 리가 있나요. 그렇지 않아도 그냥 잠을 자기가 왠지 섭섭했는데 주인장이 그것을 용케도 알고 이렇게 먹거리를 챙겨오셨으니 같이 들면서 이야기 나눠요. 호호호~!”
여주인은 붙임성이 좋아서 객잔을 운영하기에는 적성이 잘 맞아 보였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 대로 편안하게 쉬면서 응대하고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는 정성을 기울여서 길손을 챙기는 모습에서 모두 호감이 갔다. 자원이 웃으며 가져온 과일을 집고서 말했다.
“어쩌다가 어린 사람에게 마음을 쏟으셔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으니 참 재미있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네요. 호호호~!”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여인도 포기한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감정인가 봐요. 한쪽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그립고 궁금하고 그래서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것조차 막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러한 경우는 아무래도 제 심성이 음탕해서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해요. 호호~!”
두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창과 삼진은 미소만 지었다. 여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술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주인이 우창을 보면서 문득 묻는 것이었다.
“참, 도사님께 여쭤봐야 하겠어요. 이미 공부가 깊어서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신 도사님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생각과 같으시겠지요? 우리 같은 범인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걷잡을 수 없이 휩쓸리는 일은 없을 것이잖아요?”
그 말을 듣자 문득 옛날에 겪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마음속에서 이미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잊었는데 여인의 말에 문득 그 장면이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자원이 놓치지 않고 우창에게 물었다.
“오호라~ 싸부도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언제 적의 이야긴데요?”
“아닐세, 이야기는 무슨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스승님이 겪은 것은 제자들에게도 교훈이 되는 것이니까 조금도 감추거나 보태지 말고 그대로 들려주셔야 해요. 앞으로 여정도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이보다 좋은 공부가 또 어디 있겠어요? 호호호~!”
자원은 가만히 있는 여정까지 물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우창도 이미 술이 서너 잔 마셔서인지 기분이 풀려서 이야기를 해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꺼냈다.
“그때가..... 아마도 이십 여세쯤 되었을 무렵인가 싶군. 화산 아래에서 도검(刀劍)을 만드는 대장간에 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지.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군. 하하~!”
“참 풋풋하셨던 시절이네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두가 이해되는 시절이잖아요. 그래서요?”
우창이 말을 시작하자 여인이 더 관심을 보이면서 말했다. 우창이 두 여인의 부추김을 받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던 시절의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하루는 대장간의 주인이 완성된 식도(食刀)를 주면서 모처의 아무개 댁에 가져다주고 오라고 말하기에 그러겠다고 말하고는 큼직한 칼을 상자에 담아서 들고 길을 나섰지. 그렇게 해서 두어 시진을 걸어서 변화한 거리에 있는 그 댁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지.”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눈은 허공을 배회했다. 그것을 본 자원이 얼른 말했다.
“오호~! 묘령(妙齡)의 낭자(娘子)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앞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지. 그것을 본 순간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낭자만 눈에 들어왔지. 그러한 경험은 처음이어서 머리를 한 대 두드려맞은 것만 같은 충격받았던 것 같더군.”
“아니,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싸부같이 둔한 남정네의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아 갔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어. 물론 당시에는 화용월태(花容月態)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구나.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쑥스럽게 웃자 다른 일행도 재미있다는 듯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인이 더 궁금해했다.
“어머나~! 그 말씀을 들으니 제 가슴속에 있는 그 아이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 순간에 내 모습을 주변에서 누군가 봤다면 ‘얼이 빠졌다’고 했을 겁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칼을 가져다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뒤를 따라갔으니까요. 아마도 그 낭자가 생전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자기 뒤를 따라온다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원도 우창에게서 처음 듣는 말에 흥미가 동해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나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일각(一刻)을 따라가다가 문득 정신이 돌아와서 걸음을 멈췄지 뭘 어떻게 되기는. 하하하~!”
“에이~ 뭐예요. 그게 무슨 이야기란 말이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아무도 탓하지 않을 거니까요.”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었지. 그러고는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던 거야. 학문을 연마해서 벼슬살이할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기껏 도검을 만드는 대장간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으면서 저 낭자를 따라가서 뭘 어쩌겠느냐는 것이냐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
“하긴..... 그렇기도 하겠어요. 호호호~!”
자원은 이해가 된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우창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음의 한쪽에서는 어서 쫓아가서 말이라도 걸어봐야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지만, 또 한쪽에서는 그래서 무엇을 할 수가 있겠냐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혼란에 빠졌었지.”
“싸부, 혹시 그 낭자의 모습이 노산(嶗山)의 상 언니와 닮지 않았었나요?”
자원이 문득 집히는 것이 있다는 듯이 말하자 우창이 내심을 들켰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참, 싸부도 아직 여인의 마음을 모르시나 보다. 그렇게 한집에서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런 느낌도 모를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에요?”
“아니, 난 그저.....”
“가끔 몽유원(夢遊院)에 갔을 적에 싸부의 표정은 꿈속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상 언니를 좋아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야 그 의문이 풀렸어요. 언젠가 잠시 스쳐 지나갔던 낭자의 모습을 상 언니에게서 발견하고는 그렇게도 존중하는 마음을 품었었군요. 맞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도 같군. 그 일이 있었던 뒤로 한동안은 여인에게 말이라도 걸어볼 것을 용렬(庸劣)한 마음에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고 자책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야말로 백일몽(白日夢)이구나 싶기도 하네. 하하하~!”
“싸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몸소 겪으셨네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호호호~!”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주인도 이해가 된다는 듯이 자원에게 말했다.
“어머, 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라는것을 알 수가 있겠어요.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인가 싶기도 하네요. 호호~!”
밤이 깊어 가도록 주객이 어우러져서 환담(歡談)을 나누다 멀리서 삼경(三更)을 알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