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제36장. 동평객잔(東平客棧)/ 9.육갑패의 임상(臨床)

작성일
2023-04-1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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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제36장. 동평객잔(東平客棧) 


9. 육갑패의 임상(臨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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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담소하는데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정색하고는 찾아온 남자를 현지가 안내했다. 우창의 앞에 앉은 사람은 나이가 육십 세 전후로 보였다. 우창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오시게 되셨는지요?”

“선생님의 명성을 듣고서 한 번 뵙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마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창이 보기에 말투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우선 호칭에서부터 도사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다. 상대가 이렇게 말하니 우창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말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혹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귀담아듣도록 하겠습니다.”

“실은 고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이는 들어가는데 하나 있는 아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무슨 방법이 있으려나 싶은 마음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자제(子弟)의 나이는 어찌 됩니까?”

“임인(壬寅)생으로 올해 서른 살입니다. 현숙(賢淑)한 처도 얻었고, 귀여운 손자까지도 얻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밖으로 나돌고 있으니 며느리 보기도 민망하고 무슨 귀신이라도 씌었으면 굿을 해서라도 마음을 붙잡아야 하겠는데 백방으로 알아봐도 명쾌한 답이 없던 차에 허기를 달래려고 들렸다가 객잔의 주인이 하는 말을 듣고서 꼭 뵙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이렇게 말을 하는 남자의 고뇌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염재에게 사주를 적으라고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가 나올 수가 있지 싶었다. 하나는 아들의 배우자(配偶者) 궁이 부담이어서 겉돌 수가 있다. 이것은 온전히 본인의 문제에서 나오는 것이니 해결할 방법이 없다. 또 하나는 배우자 궁은 무난한데 궁합이 매우 불리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다. 이런 경우에는 부득이 부부의 인연을 바꿔서라도 마음을 잡도록 할 방법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염재가 사주를 적어서 앞으로 갖다 놓고는 다시 물러났다. 우창은 사주에 눈길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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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염재가 적어놓은 사주를 살펴보니 배우자 궁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일지(日支)에 용신을 두고서 아내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겠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내의 사주가 임계수(壬癸水)라고 하더라도 흉하다고 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연법(因緣法)을 감안(勘案)해서 보더라도 목화(木火)의 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할 테니 며느리의 사주를 물어볼 것도 없이 팔자로 풀이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님을 짐작하는 데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진명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 혹시 육갑패(六甲牌)를 사용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제야 우창도 육갑패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재가 천을 깔고는 육갑패를 우창의 앞에 가지런히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우창이 잠시 침묵했다. 그 숙연한 모습에 남자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우창이 육갑패를 흡사 부채 펼치듯이 바닥에 펼쳐 놓고서 입을 열었다.

“자, 우선 합장하신 다음에 올바른 답을 알려달라는 마음으로 손길이 가는 대로 다섯 장을 뽑으십시오. 천천히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물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실제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임의로 뽑은 다섯 장의 육갑패는 어떻게 나올지 참으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도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지 매우 신중한 자세로 한 손으로 도포의 소매를 잡고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다섯 장의 육갑패를 뽑아서 오른쪽부터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자 우창이 하나하나 뒤집어서 간지가 보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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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하고 바라보던 남자도 간지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이렇게 된 구조는 어떻게 해석이 될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우창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한 우창이 설명을 시작했다. 모두 우창의 말에 집중했다.

“원래부터 자제분은 속박을 싫어하셨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항상 하고 싶은 대로 뛰어다니고 걸핏하면 몇 달씩 집에 안 들어와서 혼인을 시켜주면 안정이 된다는 어느 도사의 말을 듣고서 또 참한 규수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도 붙어있지 않고는 또 원래의 병이 도져서 저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것인지가 더 큰 걱정입니다.”

우창이 오른쪽의 병오(丙午)를 가리켰다. 남자도 우창의 손길을 따라서 병오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러자 또 풀이를 이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연주(年柱)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습관이란 이런 것이었다.

“혹 명학(命學)을 공부하셨다면 참고로 들어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가운데의 갑(甲)을 주체(主體)로 삼아서 풀이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아드님의 행동을 막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친께서도 그러셨지 싶습니다. 막을 수가 있었더라면 진작에 막았겠지요. 더구나 과거에는 병오(丙午)인 것으로 봐서 제 멋대로이고 부친의 말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어떻습니까?”

실로 우창도 결과가 궁금해서 남자의 말을 듣고 싶었다. 남자는 우창의 말을 들으면서 탄식(歎息)했다.

“이런 놀라운 비법이 있었습니까? 듣느니 처음인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간지는 무술(戊戌)이잖습니까? 이것은 높은 산으로 알고 있는데 혹 산으로 가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간지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하나 있는 외아들이 자신을 버리고 산으로라도 가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인데 하필이면 무술이라니 이것은 또 무슨 징조일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기 때문에 우창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것을 보고는 다시 풀이를 이어갔다.

“선생께서는 혹 낙타(駱駝)라는 동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창의 갑작스러운 말에 남자는 의아한 모습으로 보면서 말했다.

“그야 사막을 오가는 대상(隊商)들이 끌고 다니는 짐승이 아닙니까?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등에 혹이 있는데 말보다 크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아드님의 심경(心境)이 대막(大漠)을 누비는 고삐 풀린 낙타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을 누구라 말리겠습니까? 천하를 누비면서 속에 들어있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오늘도 그렇게 누비고 다닐 것입니다.”

우창의 말에 남자는 억장(億丈)이 무너지는 마음이었다. 넋을 놓고 우창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에 핏기조차 사라진 모습은 보는 사람들도 그 마음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우창이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손가락을 세 번 접었다 펴면서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제자들도 이러한 모습은 처음인지라 무슨 특별한 비법이 나오는가 싶어서 숨을 죽이고 우창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다가 다시 육갑패를 바라보고는 남자를 향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보름 이내로 귀가한 아들은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허물을 뉘우치고 아내에게 잘 대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될 것이니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듣자 남자는 기쁘면서도 의심에 가득한 모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할 말을 잊은 듯이 멍하게 우창만 바라봤다. 물론 진명과 현지도 같은 마음이었다. 다만 염재는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이다. 염재를 본 우창은 다시 계유(癸酉)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을 보시면 이해되실 것입니다. 사막의 낙타가 사막녹주(沙漠绿洲)를 만났습니다. 다른 곳은 메마른 사막에 풀도 한 포기 없으나 이 녹주(綠州)에는 싱싱한 풀이 자라고 맑은 물이 철철 넘쳐나는 곳이지요. 비로소 선생의 자제는 집이 사막의 녹주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돌아오는 중입니다. 여기에는 선생의 간절한 염원을 알고서 조상이 적극적으로 애를 썼으니 아들이 돌아오면 크게 제사상을 차려서 조상님께 감사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우창이 재차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듯이 기쁨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잘못 들었나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그래봐야 열흘도 가지 못하고 집을 나갈 것이 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과연 얼마나 집에 머무르겠습니까?”

“여기 임신(壬申)을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임신이 아니라 다시 무술(戊戌)이었다면 또 어디론가 사라질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지요. 그러나 임신은 작은 초원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를 얻은 셈입니다. 마치 사자가 초원을 누비면서 백수의 왕이 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앞에 드린 말씀이 맞는다면 뒤의 말씀을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앞에 드린 풀이가 틀렸다면 지금 드리는 말씀도 믿을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창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기 위해서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러자 남자는 두 손을 모아서 합장하면서 말했다.

“앞의 말씀에 가슴이 쓰리고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잘 맞을 수밖에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마음을 잡게 된다는 말씀도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우창이 생각해 봐도 과연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주를 앞에 당겨놓고 설명했다.

“사주를 보면 배우자의 자리에 보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달이면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달이란 입동(立冬)을 말하는데 지금은 술월(戌月)도 마지막인 상강지절(霜降之節)입니다. 그래서 보름 내로 돌아온다고 한 것입니다. 다만 심신이 무척 지쳐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라지 마시고 따뜻하게 감싸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시는 밖으로 나돌지 않을 것이니까요. 미리 축하드려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이번에도 우창은 약간 큰 소리로 웃었다.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남자도 그제야 우창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의 긴장이 풀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은자 세 개를 꺼내어 놓고는 다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는 총총히 돌아갔다. 너무나 좋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그 좋은 것이 행여라도 달아날까 싶은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떠나는 남자를 염재가 전송하고 돌아왔다.

염재가 들어오려고 하는데 이내 뒤따라서 들어오던 사람이 말했다.

“실례합니다. 도사님을 뵈려고 기다렸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염재가 돌아다 보니까 중년의 남자가 도포를 입고는 포권하고 예의를 갖춰서 인사하는 것이었다. 염재도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합장하고는 물었다.

“봐하니 수행자이신 듯한데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생은 무당파의 제자입니다. 긴히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소문을 듣고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조금 전의 남자가 너무나 기뻐하면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좋은 답을 얻었나 싶어서 빈도(貧道)도 도사님을 뵙고 귀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마침 스승님께서 지금까지 상담하느라고 잠시 쉬고 계십니다. 조금만 계시면 준비되는 대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도사가 빈 의자에 걸터앉아서는 정좌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본 염재가 방으로 들어가서 우창에게 말을 전했다.

“스승님 도사 한 분이 뵙기를 청합니다.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말을 해뒀습니다.”

“그래? 들어오시라고 하지?”

“여태 상담하느라고 수고하셨는데 좀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찮네. 들어오셔도 되겠어. 어서~!”

우창이 허락하자 염재가 밖으로 나가서 말했다.

“도사님 들어가셔도 되겠습니다.”

“고맙소.”

방으로 안내가 된 도사는 우창의 앞에 서서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창도 일어나서 마주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다. 도사는 다시 포권하고 우창은 합장했다. 도사가 그러고서도 앉을 생각을 하지 않자, 우창이 선 채로 물었다.

“혹 무슨 가르침이 있으셔서 왕림하신 것이라면 말씀하시지요. 앉으셔도 됩니다만.”

그제야 도사는 혀를 차면서 털썩 앉았다. 염재에게 하던 행동과는 다른 사뭇 거만한 모습에 제자들은 의아했지만 우창은 개의치 않았다. 앉아서 차를 권했다.

“여기 차를 좀 드시지요.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연배는 대략 50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우창을 보면서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한 모습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손님의 대접을 하느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소생은 진하경(陳河鏡)이라 합니다. 가르침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우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이고~! 전생부터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다니더니만 이번 생에도 여기에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구나. 쯧쯧~!”

염재와 현지는 기가 막혔으나 우창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혀를 차면서 말을 멈추자 비로소 물었다.

“말씀을 듣기에는 소생이 도사님의 제자였다는 말씀이시네요. 이거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우창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도사는 도도하게 앉아서 다시 말을 했다.

“어떻게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키워놨더니 그렇게도 들락거리면서 딴짓이나 하는 것을 겨우 막아놨는데 이번 생에는 또 여기에서 만났군.”

“몰라뵌 것은 죄송합니다만, 힐난(詰難)하시니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된 인연인지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면 잘 접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우둔한 소생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천천히 풀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염재는 이미 노기(怒氣)가 슬며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누르고 있었고, 진명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 도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현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라도 하고 싶은데 마음만 있을 뿐인지라 우창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사가 다시 말했다.

“아니, 산에 가고, 도관(道觀)에 가면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지 않아?”

“맞습니다. 매우 편안하고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야 전생에 무당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기억이 정신에 남아있어서 그런 거지 왜 그런지도 다 잊어버렸구나.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고~!”

“감히 여쭙겠습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돌아다니면 파문(破門)시켜버리실 일이지 왜 여기까지 찾아오시게 되었는지요? 그 인연이 궁금합니다.”

“그야 내가 전생에 그대를 제도(濟度)하겠다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지 왜겠나? 그래서 이번 생에도 그대를 찾느라고 온 천지를 헤매다가 이제 여기에서 겨우 만났잖은가.”

“그나저나 도사님의 도호(道號)는 어찌 되시는지요?”

“내 도호? 일각자(一覺子)라네. 전생에 쓰던 도호인데 그대로 쓰니까. 그대는 전생의 도호가 현능(賢能)이었는데,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하루해는 짧기만 하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우창은 약간 혼란이 생겼다. 하는 것으로 봐서는 매우 진지한데 그 내용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생각 같아서는 ‘헛된 소리 그만하고 나가 달라’고 하고 싶으나 또 그렇게 매몰차게 하기도 참으로 애매했다. 어쩐지 뭔가 인연이 있을 것도 같아서였다. 그래서 진명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전생에 대해서는 진명의 공부가 쓸만한데 이 도사가 하는 말이 계속 전생의 이야기라서 뭔가 연결이 될만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으려나 싶어서였다. 우창이 자신을 바라보는 뜻을 안 진명이 비로소 일어나서 도사 앞으로 다가와서 공손히 합장하고는 말했다.

“도사님 제가 기억나시는지요?”

도사는 기세가 등등하게 우창에게 호통을 치다가 젊은 진명이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린 모양이었다. 멍하게 바라보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사이에 진명이 일각자의 전생을 훑어봤기 때문에 담담하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낭자는.....?”

“낭자라니요. 전생의 부친이라고 하셔야지요. 전생에 제자만 중하고 부친은 아랑곳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건 너무 무심하잖아요?”

진명이 얼마나 처연(悽然)하게 말을 하는지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고, 도사는 기세를 누그러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명의 말이 이어졌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조상의 가문을 이어받을 생각은 아예 없고 도를 닦는답시고 집을 떠난 후로 나는 자식을 찾아서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못 보고 죽으면서 눈도 감지 못했는데 이렇게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와서는 겨우 제자나 힐난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경우일까요?”

진명이 이렇게 말하면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도사를 바라봤다. 도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염두를 굴리느라고 눈알만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명이 더욱 확고한 모습으로 말했다.

“어떻게 할 건가요? 전생의 아비가 더 중요한가요? 전생의 제자가 더 중요한가요? 제자는 남이고 아비는 먹여 살려서 키워 준 인연이니 그 경중을 잘 생각해서 판단하세요. 아니 얼른 절하고 뉘우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이렇게 따져 묻자 도사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 왔는지 말했다.

“아니, 그게.... 저....”

이번에는 진명도 다소 너그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둬요. 전생은 다 지나갔고, 아들을 찾아서 산천을 누비다가 나도 도의 세상에 입문한 인연이 있고, 이렇게 전생에 아들의 제자를 만나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걸로 퉁 치죠. 이번 생은 또 이번 생의 삶이 있으니 그만하고 떠나세요. 나도 그대와 얽힌 전생을 말끔히 잊을 테니까요. 그리고 기왕에 도문(道門)에 귀의하셨거든 열심히 수행해서 도인이 되시기를 바랄게요.”

이렇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하자, 도사는 얼떨결에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모두 잠시 말을 잊고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비로소 진명이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호호~! 왜들 그러고 계세요? 스승님도요. 호호호호~!”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이 진명을 바라보는데 우창도 얼떨떨한 기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놀라셨죠? 가끔 저런 사람들이 있어요.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되니까 그만 잊어버리세요. 호호호~!”

“아, 그런가? 창졸간(倉卒間)에 일어난 일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란 말이지. 진명이 설명을 좀 해주려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저 도사는 또 어떤 사람인지 말이네.”

“예전에도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다만 일부러 저러는 것은 아니에요. 스스로 착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자신의 환상(幻想)을 믿고는 행동하는 것인데, 공부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면 저런 행동을 하면서 남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 건가? 전생에 스승이라는 말은 그럼....?”

“자신이 지어낸 환상을 믿고서 저러는 것이거든요. 그러다가 어리벙벙한 사람을 만나면 한동안 스승으로 대접을 받기도 해요. 스승님께서는 순수하셔서 자칫하면 그 망상에 놀아날 뻔하셨지만 서도요. 호호호~!”

“아, 그 말은 나도 어리버리하다는 말이구나. 맞는 말이네. 하하하~!”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거든요. 만약에 달려들어서 싸운다고 하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상처만 입을 따름인데 스승님께선 잘하셨어요. 왜냐면 도사의 내공도 보통이 아니거든요. 음성을 들어봐서 스승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보통 수준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맞아, 그래서 정신착란(精神錯亂)을 한 사람인가 싶었다가도 중후한 내공이 실린 소리를 들으니까 판단하기 어려웠네.”

그제야 현지와 염재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대략 이해하고는 공부하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된 도사를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