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도와 낙서와 선후천 팔괘는 문왕의 작품이 아닐까?

작성일
2013-06-02 17:02
조회
2899
 
[5] 하도와 낙서와 선후천 팔괘는 문왕의 작품이 아닐까?
 
 
 
 

 
 
  문왕(文王)은 낙서(洛書)를 보고서 영감을 얻어서 후천팔괘(後天八卦)를 그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하도와 낙서 자체를 문왕이 만든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하고 있는 낭월이다. 그래서 참으로 천재였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물론 혼자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면 옆에는 엄청난 술수의 대가인 강태공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작품을 만인이 우러러보는 곳에 높이 올려놓고 싶다면 누구라도 문왕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겠지 싶다. 그러니까 이 생각의 전제(前提)는 복희씨가 하도와 선천팔괘를 그린 것도 아니고 우임금이 낙서를 만든 것도 아니라는 것에 있으며 그 모두는 바로 문왕의 걸작(傑作)이라는 생각을 갖고서 접근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궁리하다가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위에 이마를 찧고 나자빠지게 된다면 다시 생각을 해 볼 요량으로 시작하는 것이니 무모한 도전인 셈일까?
 
 
[두산백과사전]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상(商)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상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민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허강[黃河]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베이[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渡河點)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상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만년에는 위수(渭水)에서 만난 현상(賢相) 여상(呂尙: 태공망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상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상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왕(발 發)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
 
        
 
  대략적인 소개는 그만하면 되겠다. 여기에서 특기사항은 전설적인 강태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그럴싸 한 냄새가 솔솔~ 나는 것도 같다. 문왕의 능력으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강태공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하도낙서 정도는 주무를 만큼의 해박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다시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더욱 상세한 이야기가 있으니 혹 궁금하신 경우에는 '주문왕'을 찾아서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다만 주왕(紂王)의 미움을 받아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역경(易經)을 연구하여 64괘(卦)의 이름을 짓고 또 각 괘의 효(爻)에다가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이야기가 빠져있어서 약간 보충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역경(逆境)은 자아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감옥에서도 뭘 하는지 항상 감시를 하는 바람에 역경의 뜻을 밝힘에 있어서도 명료하게 쓸 수가 없어서 길(吉), 흉(凶), 회(悔), 인(吝)과 같은 글로만 표현을 하는 바람에 그 속에 깃든 의미는 후학이 유추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만약에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문왕이 주역을 만들었다는 역사적인 사건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문득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서 사기를 쓰게 되었다는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등따시고 배부를 적에는 걸작이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보면 역경이 클수록 결과도 크다는 음양의 법칙이 그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강태공을 너무 없이 그린 것 같기는 하지만 위수(渭水)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으니 모습은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문왕이 후천팔괘를 만들면서 강태공의 자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옆에 있다면 없던 역사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득한 옛날이었으니까.
 
  문왕은 약 3천년 전에 생존했던 사람이다. 주역에서는 삼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복희, 주문왕, 그리고 공자이다. 적어도 공자이전에 존재했을 하도낙서와 선후천 팔괘라고 한다면 문왕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전설보다는 역사쪽의 관점에서 타당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해 본다. 그냥 전설이라고만 하기에는 두 그림이 너무나 세련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7천년이나 4천년 전의 작품이라고 보이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하도낙서에 대해서 강태공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 자료는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두고서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의 작품처럼 닮아있는 두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주문왕을 생각하면서 문득 떠오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초보자의 무리한 억측일 수도 있으니 나중에 전혀 아니라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올 때까지만 그대로 두고 볼까 싶다.

    

  누군가 사실감있게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은둔의 천재인 강태공이었기 때문에 문왕을 도와서 무슨 일을 했더라도 남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제대로 관심을 두고 중점적으로 그린 것은 후천팔괘에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주역의 철학적인, 아니 도학(道學)적인 씨앗은 발아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자신의 이름을 슬쩍 내세운 것에 가장 큰 비중이 있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생각을 해 보면 오히려 하도와 낙서는 물론이고 복희씨의 선천팔괘도 문왕팔괘도를 위해서 사전작업을 한 것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알 수가 없기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의 사정이 어느 정도 타당성만 있다면 그것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왕이 만들었다고 해도 대단하고 강태공이 만들었다고 해도 대단하겠지만 공자님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할 정도로 세상에 무엇인가를 내어 놓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셨다고 한다면 문왕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정리하는 것에는 문왕이 후천팔괘를 논하기 전까지 그 이전의 자료들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다고 한다면 그 전설을 만든 사람이 문왕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자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원래 주역이 갖고 있는 엄청난 도리(道理)는 전혀 손상을 받을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좀 더 자료를 찾아보다가 문왕의 이전에도 있었던 자료가 발견되기만 한다면 즉시로 수정을 할 요량이다.
 
짜잔~~~! 드디어 문왕팔괘~~!
 
                        
 
  이제서야 익숙한 모양의 괘상(卦象)이 등장한다. 이른바 문왕의 후천팔괘이다. 증사강 선생의 설명을 보면 복희씨를 이야기하면서 거론하는 것은 오로지 팔괘(八卦) 뿐이다. 그냥 팔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복희씨를 거론하는 정도로도 설명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국 주역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후천팔괘도이다. 그리고 어차피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하락팔괘라고 한다면 함께 놓고 궁리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그 사이를 관통하는 의미가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학자는 하도와 선천팔괘를 연결하고, 낙서와 후천팔괘를 연결한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학자들의 설명으로는 하도와 후천팔괘를 연결하고 낙서와 선천팔괘를 연결해야 한다는 설명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분석과 교차하여 대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서로 같은 에너지파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낙서와 후천팔괘는 서로 연관이 있을까? 적어도 팔방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 낙서는 숫자판으로 봐야 하겠고 후천팔괘는 괘상판으로 봐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부터 주역을 공부하는 핵심으로 이야기하는 '이상수(理象數)'의 이치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주역을 살펴보면 구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둘은 이미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짐짓 든다. 그러니까 애초에 서로 갈 길이 달랐다고 봐야 하겠는데 낙서가 가야 할 길은 기문둔갑(奇門遁甲)과 구성학(九星學)으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하면, 팔괘는 아시다시피 주역에서 꽃을 피워서 역경(易經)의 대명사로 추앙(推仰)을 받게 되었으니 제각기 자신의 길에서 성공의 꽃을 피웠다고 보면 되겠다.
 
  출발은 어떠했는지 설왕설래하지만 그들이 각자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삼고 정리를 해 본다. 물로 최초에 누가 그렸느냐는 것은 이제 논외로 하고 그 기능적인 면에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 갔는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 볼 요량이다. 중요한 것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고 내일이기 때문이다.

 
 
1) 하도(河圖)는 오행(五行)을 타고 간지(干支)의 의 길로 갔다.

 
                     

 
  이것이 하도가 가야 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본적인 바탕에서 이미 오행(五行)을 전제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가 가야할 운명은 당연히 오행이었고 그 오행은 결과적으로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꽃을 피운 간지학의 밑거름이 되었고 꽃이 되었고 열매가 되었고 더불어서 자평명리학을 연구하는 낭월에게는 위대한 가르침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도가 가야 할 길은 주역과는 다른 길로 정해졌던 것이었나보다. 물론 그래서 더욱 친근하기도 하다.

 
 
2) 낙서(洛書)는 수리(數理)를 타고 구성궁(九星宮)의 길로 갔다.
 
 
                                
 

  낙서는 자신의 운명이 안내하는대로 구궁의 길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서 기문둔갑과 구성학에서 큰 꽃을 피웠고 다시 현공풍수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 낙서의 미래도 창대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구궁을 순역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천지의 기밀을 낱낱이 들춰내는 능력은 현공풍수를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맛을 봤다고 해도 되지 싶다. 그래서 다행히 낙서가 가고 있는 길도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 셈이다. 여하튼 많이 배워야 하고 그것도 넓고 깊게 배운다면 언제라도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3) 복희팔괘(伏羲八卦)는 구름을 타고 도교(道敎)에서 노닌다.

 
                   
 
  처음에 언뜻 생각키에는 선천팔괘는 설 곳이 없어진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까 오히려 민중의 가슴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종교적인 존재로 변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주역의 배경으로 스며들어서 자리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의 역할을 하고서는 도교의 사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도교의 사원에서 선천팔괘판을 가슴에 들고 있는 신을 만나게 되는데 생긴 형상은 다 다르더라도 들고 있는 것만 봐서 선천팔괘라면 그 신은 틀림없는 복희씨이다. 이렇게 민중의 뿌리에서 삶의 액운을 막고 복을 내려주는 신령의 존재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가호호마다 영업하는 사업장마다에는 여지없이 복희의 팔괘판이 걸려있다. 복을 부르고 액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가운데의 태극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울을 매달고 있는데 이 거울은 사물을 비춰보라는 것이 아니고 추길피흉의 용도로 붙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게 될 장소에다가는 오목거울이 달린 복희팔괘도를 걸어두고, 반대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자리에다가는 볼록거울이 달린 복희팔괘도를 걸어서 나쁜 기운을 반사시키라는 용도이다. 팔괘의 모양을 보면 분명히 복희팔괘임을 알 수 있겠다. 절대로 후천팔괘는 아니라는 점에 주목.

 
       
 
 
                  
 
  복희묘에는 이렇게 천장의 인테리어도 팔괘이고 하도판이다. 아마도 선천팔괘도를 알게 된다면 이러한 것을 보는 순간 바로 그 의미가 전달이 될 것이니 역시 많이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중생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도록 공덕을 쌓고 있다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도 충분히 존재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마치 늙은 노인이 손자들을 돌보면서 심심소일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도사들이 사용하는 용품으로도 그대로 적용이 될 것이고 부적을 그리는데에서도 복희팔괘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면 아마 도교의 정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까 복희씨는 도교의 중요인물이 되어서 삼황전(三皇殿)에 모셔져 있다.


 
4) 문왕팔괘(文王八卦)는 주역(周易)에서 황금기를 구가(謳歌)한다. 
 

            
 
  참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사랑을 받고 존중을 받은 것이니 가장 크게 성공을 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이렇게 휴대폰 속에서도 의연하게 들어가서 자신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스타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된 것에는 문성(文聖) 공자님의 공덕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공자의 십익(十翼)으로 인해서 생명력을 얻어서 장생불사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낭월도 이 공부에 관심이 슬슬 생기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이 땅에서 하늘의 이치를 밝힌 위대한 지혜종자(智慧種子)라고나 해야 할까 싶다.
 
 
  이렇게 생각이 나는대로 자료들을 뒤지면서 하락과 선후팔괘를 살펴보면서 약간의 생각을 정리해 봤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정리를 하고 나니까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라도 해 놓지 않으면 자꾸만 께름칙해서 신경이 쓰이는 까닭에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잊어버리기 위한 선행작업(先行作業)을 한 셈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역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 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