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희씨 이후 3천년이 흘러 낙서(洛書)가 등장했다.

작성일
2013-06-02 11:48
조회
2439
 
[4] 복희씨 이후 3천년이 흘러 낙서(洛書)가 등장했다.
 
 
 
 
 
  하도(河圖)에 대한 궁금증은 뒤로 미루고 낙서(洛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잘 모르겠는 것은 붙잡고 고민하기 보다는 잠시 밀쳐놓고 우선 다음의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보면 의외로 앞의 문제점을 풀 수가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궁리해봐야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낙서는 낙수(洛水)라는 강에서 올라온 거북의 등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천년 전의 일이다. 복희씨가 7천년 전에 하도를 얻은 것과 비교한다면 참으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다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냥 전설로만 흘러왔는데 중국의 공정론에 의해서 전설조차도 역사로 집어넣으려는 시도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그야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나저나 해답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달팽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신구(神龜)여서 그런 모양이다. 고서에 있는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것을 다시 손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그림 보다는 위의 그림 실력이 조금은 더 나아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등가죽에 새겨진 문양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당시에 치수(治水)를 하던 하우(夏禹)씨의 눈에 띄어서 후천팔괘라고 하는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우씨에 대해서 또 조금 살펴봐야 하겠다. 그냥 대충 생각하기에는 문왕의 후천팔괘라고 해서 이 그림도 문왕이 얻은 것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조금만 자료를 뒤적이면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을 모르고서 무식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저 거북이가 살았을 낙수(洛水)의 풍경이다. 비록 전설이라고 할 망정 그래도 위치가 눈으로 생생하게 보이면 왠지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낙양의 왕성(王城) 공원에 있는 하도낙서의 기념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설은 더욱 설득력을 갖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중국 고대 전설에서 '대우치수(大禹治水)'는 남녀노소가 다 아는 고사다.우의 이름은 문명(文命)이고 성은 사(姒)다. 기원전 2000년 무렵 하(夏) 부락의 추장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사천성 서북부 북천현 우리(禹里) 강족향(羌族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제왕세기』에는 "우가 하백에 봉해졌다. 예주 외방의 남쪽으로 지금의 하남 양적이 그곳이다"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양적은 지금의 하남성 우현이다.
 
또 『한서』에서는 "전욱 이후 5대에 이르러 곤(鯀)이 태어났다"고 했는데, 곤은 우의 아버지다. 치수사업의 대명사 하우는 자신의 일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정강이 털이 다 닳아 다시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차단이 아니라 소통의 논리로 치수사업에 신기원을 이룩한 모략가였다. 홍수를 다스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천하의 왕이 되다 우의 총명함과 재능 및 지혜가 가장 집중적으로 실현된 분야가 수해를 다스리는 '치수'였다. 그는 여기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일은 요·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루는 요가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의 근심을 풀어줄 사람이 누군지 자문했다. 신하들은 곤이 괜찮다고 말했다. 요는 신하들의 추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요가 생각하기에 곤은 다루기 힘들고 동족을 해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곤만 한 사람이 없다면서 한번 써보고 안 되면 그때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요는 할 수 없이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곤에게 치수를 맡겼다.그로부터 곤은 9년을 치수에 매달렸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무렵 요는 천하의 대업을 이을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었고, 마침내 순을 얻었다.
 
순은 치수에 실패한 곤을 멀리 우산(羽山,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 동남)으로 보내 동방 소수민족을 다스리게 하라는 건의를 요에게 올렸다(일설에는 처형했다고 한다). 순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도 홍수는 여전히 천하의 큰 근심거리였다. 순은 곤의 아들 우를 기용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우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기꺼이 명을 받아들였다. 우는 순에게 설(契)·후직(后稷)·고요(皐陶) 등 세 씨족 수령이 자신의 치수사업을 협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요 임금 순 임금 하우가 보좌했던 전설상의 성군들인 요·순이다. 홍수를 다스리려면 물길을 틔우는 방법을 사용하여 물 흐름에 따라 강을 열고 물이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런 정도는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상고시대 사람들은 자연계와 투쟁하는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의 아버지 곤도 9년이나 치수에 매달려 매번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막으려 했지만 해마다 홍수에 제방은 무너지고 말았다. 우가 이 일을 맡은 뒤로 부친의 실패를 몹시 가슴아파했다. 그는 이전 시기 공공의 치수와 아버지 곤의 치수가 남긴 교훈을 바탕으로, 선배들이 성공하지 못한 주요 원인이 물의 흐름이라는 자연스러운 원칙에 따라 물길을 이끌지 않고 그저 높은 제방만 쌓아 막는 방법을 취했다는 데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는 치수방법을 바꾸어 물길을 대대적으로 소통시켜 시원스럽게 흘러가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국어』(「주어」)에서 말한 대로, 천지자연에 따라 높은 곳은 흙을 쌓고 낮은 곳은 준설하여 강물이 잘 흐르도록 하고, 막힌 곳은 뚫어 물길을 냈다. 『맹자』(「이루」 하)에서는 이 부분을 두고 "우의 치수는 억지로 행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우는 물의 주된 흐름은 더욱 넓고 깊게 파서 물이 땅속을 흐르게 하여 흘러갈 곳으로 흘러가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류들도 길을 터서 주류로 흘러들게 했다. 물이 자기 갈 길로 흘렀기 때문에 물이 없는 곳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우가 대규모 치수사업을 주도한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원인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위험을 마다 않고 고통을 견디며 오로지 공적인 자세로 일을 했다. "몸소 쟁기와 삽을 들고 백성들보다 앞장섰다(『한비자』 「오두」),"
 
이는 우 자신이 직접 치수에 필요한 장비를 들고 노동에 참여하여 치수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시범을 보였다는 말이다.치수를 명령받은 뒤로 우는 한결같은 자세로 십여 년을 보냈다. 몸은 말랐고, 정강이의 털도 다 닳아 없어졌다. 머리를 묶는 비녀와 모자를 떨어뜨려도 허리를 굽혀 주울 수조차 없었다. 치수라는 중책을 완성하기 위해 우는 도산씨(涂山氏)를 아내로 맞이한 넷째날 집을 떠나 13년 동안 외지를 떠돌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이 "세 차례 대문 앞을 지났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만고의 미담으로 전해온다.
 
우의 치수는 나라를 이롭게 다스린다는 종합적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핌으로써 강국으로 나아가는 큰 방략이었다. 수해를 다스리는 동시에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물고기를 기르고 나무를 심고 수상교통을 크게 일으켰으며, 한 지방을 다스릴 때마다 씨족 부락의 추장들을 단결시켜 정권을 다지고 사회를 안정시킴으로써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치수에 참여하는 부락이 갈수록 늘었고, 이에 따라 우의 명성도 높아져만 갔다. 많은 부락들이 한결같이 우의 명령을 받들어 치수에 뛰어들었고 우의 공로는 천하에 두루 미쳤다.
 
순은 씨족부락의 추장들을 소집하여 성공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순은 치수사업의 성공을 선포하는 한편 우에게 검은 현규(玄圭)를 상으로 내렸다. '현규'는 검은 옥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형태로, 위대한 공적을 상징한다.일찍이 공자는 우가 치수사업으로 이룬 공적을 찬양하면서 "나는 솔직히 그의 결점을 찾지 못했다. 궁실이 허름해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온 힘을 쏟아 물과 땅을 다스려 물길을 내고 농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을 노동에 종사하도록 격려했다"고 말했다(『논어』 「태백」).치수의 성공으로 하 부락의 세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무렵 순은 벌써 80세가 넘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우를 하늘에 추천하고 후계자로 삼았다(『사기』 「하본기」)." 그러고는 '선양(禪讓)'의 전통에 따라 우에게 천자 자리를 양보한 다음 자신은 더 이상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다.
 
 
  오호! 상당히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통 말하는 우임금이 하우씨이다. 순임금의 명을 받아서 물을 다스린 공로로 왕이 되어서 하나라의 시작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렇게 넉넉한 이야기가 있으니 다른 자료는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생략한다.
                      
                                              
 
 우임금이 통치했던 지역이 표시된 지도를 찾았다. 
 
                         
 
  지도를 보니 꽤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가 보다. 다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 글자가 보이지 않으니 대략적인 범위만 파악할 뿐이다. 낙수는 지금의 낙하(洛河)를 말하는데 원류는 화산에서 시직하여 낙양(洛陽)을 거쳐 황하로 흘러들어가는 지류라고 한다. 그러고보니까 낙양도 낙수의 양지쪽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겠다. 마치 한강의 양지쪽에 한양이 있듯이 말이다. 그래도 대략 위치라도 파악이 되니 그 부근에서 이 낙서의 역사는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본다.

 
                                                                
 
  문자의 시대라고 하였는데 과연 하우씨가 썼다는 문자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낙서가 글자라는 이름은 붙어있지만 사실 글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름과 내용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기는 한다.
 
 
                                       
                                                                               낙서(洛書)
  
   이름은 낙수(洛水)에서 나온 문서(文書)인데 보시다시피 아무리 살펴봐도 문자라고 할만 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하도가 나타난 이후로 3천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다시 나타난 그림인데 이 둘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닮은 곳이 있을까?
 
                      
                        하도(河圖)                                        낙서(洛書)
 
  하도와 낙서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이것은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의 작품인 것처럼 느껴진다. 동그라미의 모습이 같고 흑백으로 색칠을 한 것도 그렇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서로 배치가 조금 달라서 혹 하나는 십년 전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십년 후에 그린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적어도 두 그림 사이에 공백이 3천여년이 있었는데 이렇게 닮아있는 것을 보면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점점 원류(源流)에 대한 생각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즉 '전설은 전설일 뿐이니 다 믿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면, 하(夏)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과연 복희씨의 팔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예전 사람들도 영감을 논한다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도 어쩐 일인지 팔괘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참 오묘(奧妙)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중국의 역학자들 간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과 못믿는 사람들 간에 논쟁이 뜨거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낭월이라고 한다면 원래가 의심쟁이이므로 당연히 못믿는다는 쪽에 줄을 서고 싶어지는 것이다. 주역을 못믿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복희씨가 하도를 얻어서 팔괘를 그리고 다시 3천년이나 지난 후에 하우씨가 낙서를 얻었다는 이야기 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더욱 의심의 끝에 쇠말뚝을 박는 것은 갑골문(甲骨文)이다. 갑골문이 출토되어서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어서 연구를 한 결과 갑골문의 기록 시기를 은나라로 잡고 있는데 은나라는 하은주(夏殷周)로 이어지는 왕조에서 하나라보다 뒤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갑골문의 대부분은 점괘를 적어놓은 기록물이다. 그리고 팔괘도 점괘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갑골문에서 적어도 한 두 개의 팔괘에 대한 원형은 나왔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상식에서 본다면 과연 은나라나 혹은 상나라라고 하는 시기까지도 팔괘라는 개념이 있었겠느냐는 의구심이 강하게 드는 것은 갑골문에 관심을 두고 읽은 몇 권의 책들로 인해서이다.
 
  그러니까 팔괘의 이치를 그렇게 세련된 그림으로 남길 정도의 선구자들이 수처년을 지나오면서 그렇게도 하나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갑골문을 사용했던 시기가 대략 3천년 전이라고 한다면 하우씨로부터도 다시 1천년이 지난 시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감안을 해서 믿으려고 해도 납득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전설로 놔두면 속이 편안하겠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해 보려니까 목에 딱 걸려서 넘어가질 않는 것이다.
 
  갑골문에서 간지(干支)는 존재했다고 한다. 간지가 존재하는데 팔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전해진 자료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 봐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하도와 낙서와 복희씨가 그렸다는 선천팔괘는 모두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믿을 수가 없음으로 정리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음.... 공부를 하겠다는겨? 말겠다는겨? 아 물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공부라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면 이렇게 머릿속에 쌓여있는 의문과 궁금증들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주역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 급하게 서둘러서 믿을 수가 없는 족보를 갖고 있으니 공부고 뭐고 접어버리자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기로 든다면 세상에서 마음놓고 공부를 할 것은 별로 없겠기 때문이다. 원래 공부는 신화로 시작해서 전설을 거쳐서 철학으로 가는 여정(旅程)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자평명리학도 그렇게 시작되어서 이어져 온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 정확히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의 최초 시작이 언제였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절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물론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면 되지만 공부를 하려고 생각한다면 전설은 전설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생각된다. 궁리해봐야 아무도 증명해 주지 않는 것이 전설이기 때문이다.
   
 전설을 만들 적에는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필요했던 사람은 최초로 팔괘를 구성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리를 해 본다면 레이더망에 걸리는 인물은 주(周)의 문왕(文王)이다. 아무래도 낭월은 이러한 전설의 출처가 문왕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뭔가를 만든 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가전(家傳)된 비방(秘方)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를 하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문왕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복희씨는 팔괘를 만들고, 황제씨는 의학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주역을 만든 장본인이 문왕이라면 모든 발화점은 바로 문왕을 가리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 다른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데 홀로 역을 만든 사람만이 역사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일리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낭월이 혼자 자작총명을 지어서 하는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인터넷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나름대로 한가닥 하는 학자들이 이 문제로 인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면 찬성을 할 명분도 있었을 것이고 또 낭월처럼 반대를 할 명분도 있었을 것임을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논쟁꺼리가 되지 않았을 것은 더욱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서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하고 문왕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