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떠밀려 농부
작성일
2022-04-1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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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떠밀려 농부
겨우내 잠자던 관리기가 굉음을 내고 있을 적에 낭월에게는 불길한 예감이 새벽 안개처럼 밀려 든다. 아니나 다를까.
낭월 : 청원이가 관리기를 켰나 소리가 나네?
연지 : 어? 그러면 비료랑 퇴비를 뿌려야 하니까 어서 가요.
낭월 : 비료? 퇴비? ..... 그...래...야 겠지?
연지 : 올해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요.
낭월 : 퇴비는 몇 개나 뿌리면 되지?
연지 : 한..... 열 포만 갖다 뿌리면 될 거에요.
낭월 : 음...... 열 개.....
하긴 한 포는 20kg로 묵직하지만 막상 밭에 흩어 놓으면 또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퇴비는 지금 넣고 갈아줘야 먹거리를 심어도 발육상태가 좋으니 달리 할 말도 없다. 그러나 뿌리다 보니까 열 개로는 부족해서 추가로 두 포를 더 뿌려야 했다.
고추, 상추, 파, 토마토, 수박에 참외까지.... 작년에는 10여 종의 먹거리들이 자라던 밭인데 가뜩이나 약해진 토양에는 영양제를 뿌려줘야지. 올해는 또 뭘 심으실랑강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등을 떠밀려서 농부가 되는 것은 일 년 중에 대략 이 쯤이지 싶다. ㅋㅋㅋ
하긴, 운동삼아서 이 정도는 해도 해롭진 않지 싶지만 그래도 꽃향기나 맡으면서 산책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선놀음이려니 하는데 농부놀이를 해야 하니.... ㅎㅎ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저 호랭이를 떠넘겼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관리기를 끌고 다녔는데 이제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들 덕을 보는 것이 뭐 별 것이겠느냔 말이지. 이렇게 하니씩 물려주면서 땡땡이를 치는 것이겠거니. ㅎㅎ
이제 낭월의 일년 농사는 끝이 난 걸로. 만고에 편한 농부다. 가끔 가지나 호박을 따놓고서 가지러 오라고 하면 산책삼아 나가서 들어다 주면 될 게고.... 참, 여주도 심어야 하는데...
일하는 것은 싫어도 먹는 것은 좋아서 말이지. 게으른 농부의 봄날 수채화다. 일을 다 하고 났더니 연지님 한 말씀.
"일 했다는 증명서요~!"
그래 고맙지. 그나마 도움을 줄 수가 있어서 다행이로구나.
작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올해는 현호색도 군락을 이루고 피어있었구나. 고사리를 꺾으러 갔나 보다 싶어서 고사리 밭에 가다가 문득 바라보니 이렇게 만발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들풀의 매력이다.
활명수에 약재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나니 현호색을 보면 활명수가 떠오른다. ㅎㅎ
오늘 아침에는 고사리가 많이 나오지 않았더란다. 그제 동생들이 와서 거들어주는 바람에 작은 것들도 모조리 꺾어버려서 그렇다며 허탈하게 웃는 구나.
그런데 또 혼 났다. 여태까지 고사리를 꺾어야 할 것과 놔둬야 할 것을 몰랐다. 그냥 길면 꺾는 것으로만 알았더라는 말이다.
굽어있는 것은 아직 더 자라야 한단다. 그래서 꺾으면 손해라는 이야기지. 그것을 꺾었다가 혼났다는 말이다.
키가 작아도 꼿꼿하게 서있는 아이들은 곧바로 피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꺾어야 할 시기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또 하나 배웠다.
낭월 : 엄나무 순도 많이 피었던데?
연지 : 그래? 바빠서 못 본 사이에 자랐나 보네.
말은 해 놓고도 엄나무에게 약간은 미안함도 어쩔 수가 없다.
어릴때 부터 나무를 잡아줘야 하기 때문에 맨 위에 자라고 있는 것부터 따서 웃자람을 막아야 옆으로 퍼져서 나중에 관리하기가 좋단다. 저절로 알게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미안함은 잠시, 오늘 점심 상에는 데친 엄나무 순이 오르겠다는 생각으로 흐뭇해진다. 뭐 그러자고 싶은 거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