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화산영당

작성일
2020-12-17 07:06
조회
814

공주 화산영당(華山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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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려고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다. 코로나19가 2.5단계니, 3단계니 하는 상황에서 어디를 가기도 꺼림칙하지만, 또 간다고 한들 돌아다녔다는 이바구를 하기도 눈치가 보이기도 하는 상황이다. 이때에는 지난 시절에 찍어뒀던 사진을 정리하다가 문득 미처 챙기지 못한 사진을 정리하는 것도 사진놀이를 즐기는 방법이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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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7일에 들렸었군. 잊고 있었다가 사진 폴더를 뒤지는 과정에서 발견한 자료이기도 하다. 항상 지나다니면서 보였던 팻말인데 일부러 가보지 않으면 갈 일이 없는 곳인데 이름이 궁금해서 일부러 올라갔다. 화산(華山)이잖은가. 왠지 뭔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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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가든, 세종을 가든, 대전을 가든 항상 거치게 되는 화마루이다. 보통 말하기는 하마루라고 한다. 그런데 화헌리를 보나 화산영당을 보나 하마루는 화마루의 오류라고 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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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鄭奎漢) 선생의 사당이었구나. 그런데 왜 사당이라고 하지 않고, 서원이라고도 하지 않고 영당(影堂)이라고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고인(故人)의 사진은 영정(影幀)이라고 하고 고인의 초상화는 진영(眞影)이라고 하고, 임금의 초상화는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당인 것으로 봐서 화산 선생의 초상화라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냥 단순하게 위패를 모셔놓고 영당이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한 까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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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 가보면, 격식을 갖춘 곳도 있고, 조촐한 곳도 있는데, 화산영당은 조촐한 형태였다. 외삼문 내삼문으로 규모가 좀 갖춰진 곳도 있지만, 이렇게 외삼문만 있는 경우도 흔하다. 제자를 많이 거두고 학풍을 드날렸다면 규모도 크게 자리를 잡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즐기면서 누군가 찾아오면 더불어 나눈 정도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게 되는 풍경이다. 아호에 운수산인(雲水山人)이라고도 했었다는 것을 보면 선생의 의식세계는 시끌벅적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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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밀어봐서 열리면 들어가고 안 열리면 못 들어간다. 보다 적극적으로 참관을 하려면 관리자를 찾아서 부탁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다. 만약에 화산 선생이 남겼다는 화산집을 보고 감동을 해서 반드시 막걸리라도 한 잔 올려드리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냥 지나치기만 하다가 문득 들여다 보는 사당이나 서원에서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날 이 시간에 여기를 둘러 봤다.'

이 정도의 느낌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쪽문을 지그시 밀어봐서 문이 열리면 고마운 것은 당연하다. 적어도 담을 너머서 사당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서이다. 사실 담넘어서 뭘 본다는 것은 뭔가 찝찝한 마음이 살짝 들기는 하는 까닭이다. 흡사, 남의 집을 훔쳐봤다는 느낌 정도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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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하게 지은 맞배지붕 3칸짜리 사당이다. 운수산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고 사당의 문을 당겨보니 고맙게도 열린다. 열리지 않으면 밖에서 합장 배례만 하고 갈 일이지만 문이 열리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당연히 들어가 봐야지. 내심으로는 선생의 초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60%이다. 이름값을 하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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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사(華山祠)로군. 글씨가 검은 것은 그렇겠거니 하겠는데 현판의 바탕이 초록색인 것은 좀 특이하다. 단쳥을 하면서 현판의 바닥도 같이 칠해버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흰색으로 칠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하겠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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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저 안에 영정이 있겠구나.... 단정하게 닫힌 제단의 문을 보면서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80%의 상승이다. 그냥 마룻바닥에서 절을 해도 되지만 기왕이면 문을 열어놓고 인사드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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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뵙습니다~!"

행여 졸으시다가 놀라실까봐 미리 통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華山 鄭先生

위패에는 화산 정선생이라고만 되어 있다. 관리자가 후손이 아니라 문하생이라는 의미로 봐도 되지 싶은 위패의 이름이었다. 감히 이름도 쓸 수가 없었던 존경심을 담은 것으로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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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조촐할 줄 알았으면 향이라도 하나 챙겨 오는 건데 그랬다는 생각은 이미 늦은 것이었다. 한 평생 학문으로 삶을 즐기신 선생의 고고한 인품을 생각하면서 3배를 올리고는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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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사용되었음직한 패가 보여서 그것도 한 장 담았다. 참고삼아서 검색을 해보니 사준(司樽)이 나온다. 술통준이란다. 그러니까 술통을 담당하는 제관임을 표시하는 표찰인 모양이다. 가슴에 달게 되진 않았으니 손에 쥐어줬을까? 직접 보진 못했으니 짐작만 할 따름이다.

20201217_064830[인터넷에서 얻은 자료:환봉서원유회]


아마도 임진년 4월 1일에 환봉서원에서 제례를 봉행할 적에 만든 진행표인가 싶다. 환봉서원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본다. 이것도 인연이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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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 있구나. 언제 지나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면 들어가 봐야 하겠다. 내년 봄에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장미가 만개하거든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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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가냘픈 햇살을 화사하게 받고 있는 묘지. 옛날 같으면 좌향이며 지맥이며 등등을 살펴봤음직도 하지만, 이제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냥 풍경만 볼 따름이다. 만고 편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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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화산 정선생지묘

통훈대부는 당하관의 최상이란다. 당상관 당하관 하더니만 그 자리인 모양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벗님을 위해서 링크라도 붙여놓자.

통훈대부 (naver.com)

사헌부는 요즘의 검찰과 비슷한 직책인 모양이다. 지평(持平)이라? 이건 처음 보네. 물론 조선시대 직함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셈이다. 정5품이란다. 검색하면 다 나오니 얼마나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느냔 말이지. 그래서 감사할 따름이다.

청송심씨와 성산이씨와 같이 살았던 모양이다. 조촐하게 살아도 풍류는 즐겼던가 싶기도 하다. 요즘 개념과는 다른 시대였으니까 그런가보다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벼슬을 줘도 나가지 않았다니까 만고에 속편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본다. 문집으로 남겼다는 『화산집(華山集)』이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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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가 보다. 내용도 붙어넣는다. 이것은 낭월을 위해서이다. 나중에 문득 살펴봤을 적에 참고하고자 함이다.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정규한(鄭奎漢)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30년(순조 30) 정규한의 아들 정수린(鄭秀麟)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1830년에 쓴 송흠대(宋欽大)의 서문, 권말에 1825년에 쓴 정재풍(鄭在豊)의 발문이 있다. 서문에 따르면 저자는 문장이 부섬(富贍)했으면서도 문장을 내세우지 않았고 학문이 정밀하고 독실했음에도 학문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서지적 사항

6권 3책. 목활자본. 장서각 도서와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규장각 고도서본은 9권 4책으로 서문은 없고 권말에 발과 동일한 정재풍의 지(識)가 있는 필사본이다. 장서각 도서에도 목활자본 6권 5책이 있다. 

내용

권1에 사(詞) 7편, 부(賦) 2편, 시 185수, 권2∼4에 서(書) 22편, 권5에 서(序) 6편, 기(記) 7편, 발(跋) 1편, 잡저 7편, 잠(箴) 2편, 명(銘) 9편, 송(頌)·전(箋)·전책(殿策) 각 1편, 상량문 3편, 권6에 제문 20편, 축문 2편, 행록 4편, 묘갈명 1편, 전(傳) 1편, 부록으로 행장·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 가운데 「신추재야경(新秋齋夜景)」은 보살만(菩薩蠻)에 가사를 넣은 것이다. 시에는 주희(朱熹)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추유화양동(秋遊華陽洞)」 10수가 있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 인물답게 철학적인 기풍이 강하다. 「관물(觀物)」로 제목을 붙인 작품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에 연유하며, 화산(華山)에서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정(性情)을 노래한 시가 많다. 「팔음시(八音詩)」나 「십이진시(十二辰詩)」 등의 이체시(異體詩)도 들어 있다.

서(書)는 주로 성리학·『주역』·예학에 관한 것으로, 박종열(朴宗悅)·송환기(宋煥箕)·정만석(鄭晩錫)·정재면(鄭在勉)·정재풍·정재응(鄭在應) 등에게 보낸 것이다. 그 가운데 박종열과의 편지에는 『주역』과 『중용』에 대한 성리 철학적 견해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이 방대하여 당대인의 관심을 끌었다.

권4의 후반부에는 송환기의 시호에 대한 것, 유계(兪棨)·정시(鄭蓍) 등의 제사에 대한 것, 동산서원(東山書院)과 천동서원(泉洞書院)의 사액(賜額)에 대한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잡저는 성리 철학을 논하고 있거나, 훈학(訓學)·향약절목(鄕約節目)에 대한 것이다. 「전책」은 1790년(정조 14)에 지은 것으로, 당대인에게 널리 알려진 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산집 [華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추재야경은 보살만에 가사를 넣은 것이라니까 보살만은 악곡이었다는 말인가보다. 악곡이라도 가사가 있다면 그것도 찾아봐야지. 이름도 특이하네 보살만(菩薩蠻)이라니, 보살오랑캐? 오랑캐보살? 거참.... 보살행, 보살심, 보살마하살, 하고 많은 글자 중에 오랭캐라니 그래서 또 궁금해진다.

織(평림막막연여직)
碧(한산일대상심벽)
樓(명색입고루)
(유인루상수)


立(옥계공저립) 
宿急(숙조귀비급) 
程(하처시귀정) 
亭(장정연단정)

어떤 내용이기에 보살만에 신추재야경()을 붙였을까 싶은 생각에 보살만을 찾아봤다. 칠언절구로 시작해서 오언절구로 끝내는 괴이한 구조로군. ㅎㅎㅎ

평림은 아득하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옷감 짜는듯
차가운 산 주변엔 짙푸른 빛에 마음은 우울하고...
어둠이 짙어지지는 높은 누각에
홀로 앉아 시름에 잠기는 이는 누구뇨...

대궐의 섬돌에 올라봐야 부질없는 것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의 날갯짓이 바쁘다
갈곳없는 나는 어느 곳에서 머물꺼나....
크고 작은 정자들은 연이어 있건만.. 

뭐야.... 이렇게 쓸쓸한 시였어? 그러니까 이 시에 정선생이 교감하셨다는 말이잖여.... 운수산인에게 어울림직한 시였군. 대략 풀이를 해 보니 이와 같다. 그러니까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는 짙어지는데 갈 곳이 없는 나그네의 심경을 잘 표현하긴 했네. 혹자는 이태백의 시라고 하고, 또 혹자는 가탁한 것이니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보살만이 뭔지는 알았으니 이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인 거지. 그래도 좀더 찾아보면 자료가 있을 것 같아서 뒤적뒤적....




보살만[菩薩蠻]

요약

이 작품은 만당(晩唐) 때 발표된 것으로, 향염(香艶)의 풍격을 지닌 사(詞)이다. 중국 최초의 전문 사 작가인 온정균의 대표작으로, 「보살만」의 주제는 여성에 대한 곡진하고 세심한 감정과 관심, 그리고 애정이다. 이러한 작가의 심리를 여성의 복식과 의상, 용모와 자태, 감정과 소회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온정균은 이에 대한 성공적인 묘사를 위해, 여성이 치장하고 있는 다양한 장신구와 그가 기거하고 있는 환경을 동원하여, 최대한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살만 [菩薩蠻, 菩萨蛮]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중국문학, 2013. 홍병혜, 박재우,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랬구나. 온정균의 대표적이었단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감정과 관심이라고? 뭔 소리래? 시의 내용에서 여성이 보였나? 참 이해하기 어려운 요약이기는 하네.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어서 검색을 멈출 수가 없구나. 그렇게 해서 알아낸 얇팍한 상식은 보살만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시인들이 글을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는 자료들이 나타났다. 다산 선생도 글을 쓰셨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보살만을 쓴 사람은 온정균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니 위의 보살만도 누구작인지 모를 일이다. 앞의 2구는 7언으로 하고, 그 다음에는 5언으로 하는 것이 보살만의 특색인가 싶기도 한데 짧은 궁리는 여기까지인 걸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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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두석(望頭石)에 돌버섯이 가득 피었구나. 왜 망두석인지는 모른다. 무덤의 윗부분을 바라보고 있는 돌이라는 뜻일까? 뭐 대략 그 정도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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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조촐한 화산 선생의 묘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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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서 사당을 내려다 본다.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정갈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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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한 그루가 정선생을 대신하여 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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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이 여기에 머물다 가노라....

화산 선생의 영당이었다. 아, 영정없는 영당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