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제22장. 연승점술관/ 8.보시(布施) 바라밀(波羅蜜)

작성일
2020-06-20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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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9] 제22장. 연승점술관(燕蠅占術館)


 

8. 보시(布施) 바라밀(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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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라서 춘매에게는 생소했던 모양이다.

“아, 사미승(沙彌僧)은 20세가 되지 않은 어린 스님을 말해.”

“그렇구나. 그냥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면 모두 다 똑같은 스님인 줄 알았지. 그래서?”

“사미승이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큰스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어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라고 다그쳤다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그러니까 말이야. 사미승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까 밥을 먹는데 국 속에 새끼 쥐가 삶아져서 들어있더란다.”

“우웩~!”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저걸 어떡해?”

“그러니까 사미도 난처했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다 씹어 먹었더란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냥 먹어?”

“그냥. 먹었지.”

“나 같으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네. 그럼 대사님께 혼났겠지? 고기를 먹었는데도 부처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는 것은 아무래도 주지 스님이 잘못 보셨던가 보네.”

“그러니까 주지가 왜 그랬느냐고 물었을 거 아냐? 그랬더니 사미가 하는 말이 ‘이것을 꺼내놓으면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못 하실 것 같아서 그냥 먹어버렸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더래 그 말을 들은 주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만 가보라고 했더란다. 부처가 어린 사미에게 ‘나중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마를 짚어주는 것이 잘못 본 것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음..... 오빠가 그 사미였으면 어떻게 했겠어?”

“나였으면 살짝 일어나서 국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겠지.”

“사미는 그 고통을 견디면서 그냥 먹었던 거였네? 오빠보다 더 대단하다는 말이잖아?”

“맞아.”

“그런데 그 이야기는 좀 다르잖아?”

“뭐가 달라?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의미로 보면 같은 이야기지. 다른 대중스님들이 공양을 잘 드실 수 있도록 보시를 했다고 보면 되니까. 하하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보시라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고받으면 되는 거란 말이지?”

“당연하지. 병든 스님에게는 꽃을 공양하지 말고 치료가 되는 약을 주는 것이 보시야. 그리고 몸이 채식에 맞지 않아서 허약한 스님에겐 고깃국을 드리는 것이 보시이고, 헐벗은 스님에겐 옷을 드리는 것이 보시라는 말이지. 다만 중요한 것은 보시하면서 대가를 바라거나 생색을 내면 이미 보시가 아니라고 하는 말도 있지.”

“그러니까 보시를 하더라도 고정관념의 틀에 매이지 말라는 거잖아?”

“옳지. 제대로 이해를 했네. 그러니까 핵심은 거기에 있는거야.”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뭔가 자유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네. 그러니까 베푸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또 그것을 받는 사람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 보시하는 물건을 받으면 되는거지?”

“당연하지.”

“난, 스님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을 했었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잖아. 오늘 좋은 것을 배웠어.”

“출가를 한 사람도 청정한 사람이 있고, 탐욕으로 뭉쳐진 사람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겉일까? 속일까?”

“그야 당연히 속이겠네. 겉모습만 보고서 예단(豫斷)을 하면 안 되고 그 마음이 어떤지를 살펴야 하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속마음이잖아? 근데 언제까지 보시의 이야기만 할 거야?”

“왜? 뭐가 바빠서? 하하하~!”

춘매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의미로 말을 돌렸지만 우창은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상담도 보시와 마찬가지야. 방문한 사람이 외로워하면 위안(慰安)을 하고, 힘들어하면 격려(激勵)를 하면 되고, 또 화가 나 있으면 인과(因果)를 말해주면 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실체(實體)를 알려주면 되는 거야. 그 이외에 또 해야 할 것이 뭐가 있겠어? 이것을 상담가의 보시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그런가? 그럼 상담가의 보시법이 아닌 것도 있을 거잖아? 음양의 이치라고 본다면 말이야. 그건 뭘까?”

“물론이야. 흥분된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채질을 하거나, 허욕(虛慾)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일확천금(一攫千金)을 얻을 수가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부채질을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우울(憂鬱)한 사람에게 ‘그대로 있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생명을 지키려면 특별한 비법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공포심(恐怖心)을 넣는다면 이러한 것은 악덕(惡德)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맞아, 나도 예전에 물어보러 다니면서 별소리를 다 하는 사람을 만났었어. 한번은 내 관상을 보니까 자기와 살을 섞지 않으면 결혼하는 첫날 밤에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서 소름이 돋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네. 그 자리에서는 그냥 알았다고 하고 나왔지만, 며칠 동안은 그 말이 머리를 맴돌아서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니까. 이제 보니까 그놈이 바로 나쁜 상담가였네. 맞지?”

“당연하지.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굿을 하면 해결이 된다고 하면서 거액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울한 사람이 찾아와서 힘든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 우울하게 하는 것에 대한 그 허상을 말해주고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상담가의 덕목(德目)이겠지.”

“오늘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더 기억하고 뼈에 새겨야겠네.”

“그렇지만 오히려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 협박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일일이 열거를 할 수도 없을 지경이지. 그리고 이러한 일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이어질 거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중심을 잡고 번뇌와 망상을 떠나는 것이 최선이지.”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이네. 처음에는 시시한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해를 하고 보니까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였어. 탁발승에게 고깃국을 대접할 자신은 없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봐도 비난은 하지 않을 것 같아.”

“사기꾼은 어느 분야에서나 교묘(巧妙)한 언설(言說)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그 틈을 노려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뤄내지. 종교나 신(神)을 빙자(憑藉)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정말 그렇구나. 나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아야 할 것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만약에 오빠를 만나서 이러한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냥 바보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을 거야.”

“세상 물정을 몰라서 교활(狡猾)한 사람들에게 잘 속으면 그것도 바보라고 하는 거야. 문제는 바보가 아니라 그 순수(純粹)한 사람을 이용하고 등쳐서 자기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에 있으니까 그런 것을 모르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부족한 것과 순수한 것은 다른 것이었구나. 말하자면 ‘어리석은’ 사람과 ‘어리숙한’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구나. 예전에는 그 말의 차이도 이해를 못 했었잖아. 호호~!”

“옳지, 제대로 이해를 했구나. 하하하~!”

“근데 오빠는 공부만 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아?”

“그래서 속담에 백로통장안(百路通長安)이라고 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간단한 거야,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뜻이지. 어떤 분야에서건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다른 이치에 대해서도 평균은 알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네. 하하~!”

“아하~! 그래서 대가(大家)는 대가를 알아본다는 말이 나온 건가?”

“한 분야(分野)에서 절정(絶頂)의 고수(高手)가 되면 다른 분야의 고수와 서로 통한다는 말이니까 당연히 말이 되지.”

“그렇지만 얼른 이해는 되지 않네.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건지 말이야? 더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문인(文人)은 붓으로 종이 위에서 밭을 갈고, 무인(武人)은 검으로 강호에서 밭을 갈고, 농부(農夫)는 쟁기를 소에게 매달고서 밭을 갈잖아. 이렇게 서로 다루는 도구와 펼치는 공간은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이치야. 그래서 학문(學問)을 연마하는 사람에게는 필경(筆耕)이 되고, 무예(武藝)를 연마하는 사람에게는 도경(刀耕)이 되고,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농경(農耕)이 되는 거지. 만약에 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해봐.”

“그게 서로 통할 수가 있을까?”

“농부가 이렇게 말을 해. ‘처음엔 쟁기로 밭을 갈 적에는 밭의 이랑이 삐뚤삐뚤하나 자꾸만 갈다가 보면 나중에는 반듯하게 자로 잰 듯이 된다오.’라고.”

“그건 어려서 많이 봐서 알아. 그렇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은 쟁기질은 모르잖아? 그러니까 설명을 해 준들 어떻게 알아듣겠어?”

“그 농부의 말을 들은 선비가 이렇게 말을 해.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도 같소이다. 처음에는 붓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인내심을 갖고서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보면 마침내 자를 대고 그은 듯이 반듯하게 되는 이치와 같구료’라고 말을 한다면 그게 이상할까?”

“와~! 완전히 똑같네~! 그렇다면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은 이러겠네. ‘무예도 마찬가지라오. 처음엔 칼을 들고 허공에 초식(招式)을 펼쳐도 칼이 마음대로 휘둘러지지도 않고 걸음도 바르게 나아가지 않소이다. 그렇지만 꾸준하게 계속해서 연마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칼이 내 몸과 하나가 된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자로 잰 듯이 그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니 완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소이다’라고 하겠네?”

“이제 누이가 제대로 이해를 했군.”

“완전히 같은 말이네. 그렇구나. 체험(體驗)을 한 사람은 다른 환경(環境)을 접하더라도 그것을 비춰서 깨달을 수가 있으니까, 겪어 본 사람은 안다는 말은 비록 전혀 다른 것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듣거나 접하게 된다면 그 의미를 즉시에 파악(把握)할 수가 있는 것이었구나. 내가 맞게 이해한 거지?”

“그러니까 한 분야에서 제대로 연마를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더욱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은 따뜻한 마음인 거지.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헤아리는 것이 급선무(急先務)니까.”

“맞아. 따뜻한 마음이 중요한 거네. 잘 안다고 우쭐대는 것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보살심(菩薩心)이야.”

“보살심이라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마음이란 거야? 그게 무슨 보살심이야. 그냥 춘매심이지. 호호호~!”

“보시를 행하면 그것도 보살이 가야 할 첫 번째 수행이니까 그렇지.”

“보살이 가야 할 길이라니 그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

“아, 불교수행의 기본이 여섯 가지가 있거든.”

“여섯가지나? 그 중에 하나가 보시라는 거야?”

“그렇지. 그것을 보시바라밀(報施婆羅蜜)이라고 하는 거야.”

“보시는 알겠는데 바라밀은 또 뭐야?”

“응, 불경에 나오는 서역(西域:인도)의 말이야. 바라밀을 도(道)라고 풀이하니까 보시하는 방법으로 수도(修道)한다는 뜻이지.”

“아하~!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가지는 또 어떤 것이 있어? 이름이라도 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호호호~!”

“그야 뭐 어려운 일이라고,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가지를 말해. 뜻은 대략 이해가 되지?”

“와~! 듣고 보니까 보시는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잖아?”

“맞아. 우선 수행자는 소유욕(所有慾)을 벗어나라는 의미로 보시행(布施行)을 수행하는 거지. 다만 더 깊은 것은 몰라도 되니까 이 정도로만 해. 하하하~!”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많긴 하구나. 그래도 그 중에 하나만 수행을 해도 도를 닦는다고 한다는 거지? 그것을 보살심(菩薩心)이라고 하는 거였어?”

“원래 춘매심이 그렇게 보시를 하는 길로 들어가면 보살심으로 가는 거고, 분별하고 베풀지 못하면 중생심으로 가는 거야. 주체는 하나인데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중생도 되었다 보살도 되었다 하는 것이지.”

“간지를 공부하다가 보니 별것을 다 배우네?”

“원래 학문(學問)은 벽이 없는 거야. 무엇이거나 인연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면서 그렇게 완숙(完熟)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지.”

“어쩜~! 오빠가 어쩌다가 곡부까지 오게 되었을까? 난 그게 너무 신기해서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아.”

“그야 알 수 없지. 그냥 한마음이 이끌어서 왔을 뿐이고, 또 한마음이 이끌면 떠나겠지.”

“떠난다는 말은 왜 해?”

“그게 자연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꼭 말로 해야 하느냔 말이야. 아직 공부할 것도 태산인데 떠난다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잖아.”

“만약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면, 그 생각을 할 때도 철렁하겠지? 그렇게 날마다 철렁철렁한다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냥 잊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잊는 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회자정리(會者定離)니까 언젠간 떠나겠구나.... 하면 되고. 만나는 순간에 헤어질 것도 같이 받아들이게 되면 무슨 망상이 필요할까?”

“그것도 망상인 거야?”

“오지 않은 일을 생각하니까 번뇌가 아니라 망상이겠지?”

“정말 명쾌하네. 그래도 좋은 만남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라고, 나쁜 만남은 빨리 헤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 마음이잖아.”

“사람의 마음은 항상 그렇지.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머무르지 말고 도인의 마음에 머무르도록 스스로 깨우쳐 가는 것이기도 하지.”

“아이참, 다정하게 보이는 오빠도 그런 때는 참 냉정하네. 결국은 공부하는 목적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번뇌와 망상을 벗어나는 것에 있다는 거잖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재미는 없을 것 같아.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재미의 기준이 달라서 그래.”

“재미의 기준이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어떤 사람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 사람이 고마워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동물을 죽이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재미있게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니까.”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오빠의 재미는 어디에 있어?”

“그야 누이가 묻고 내가 답하는 것에 있지.”

“진짜? 그게 무슨 재미야? 귀찮은 것이 아니고?”

“그래서 저마다 재미가 다르다잖아. 나는 선생 노릇이 재미있고, 누이는 학생 노릇이 재미있는 것이니까 서로 만나서 재미있는 것이겠지.”

“그런가? 듣고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네.”

“난 오빠에게 배워서 소득이 있지만, 오빠는 아무런 소득이 없잖아?”

“왜 소득이 없어? 마음에 즐거움이 가득한데.”

“아, 그런 것이었구나. 사람마다 본성이 다르다는 것은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네. 나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배운 것을 나눠주게 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해.”

“물론이지.”

“그러니까 나는 신축(辛丑)의 본성에 따라서 재미있는 것을 찾고, 오빠는 무진(戊辰)의 본성에 따라서 재미있는 것을 찾으니까 서로 같을 수는 없겠구나. 이렇게 보면 말이 되나?”

“누이는 신금(辛金)이고, 나는 무토(戊土)라는 것도 고려해 봐.”

“토생금? 좋은 거잖아?”

“좋은 것이기도 하지. 또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보면 무진(戊辰)은 금(金)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신(辛)은 토(土)를 만나는 것이 즐겁다는 것도 알 수가 있을 텐데?”

“어? 그건 생각하지 못했네? 무슨 뜻이야. 그게 궁합인가?”

“궁합(宮合)이라고도 하고, 인연(因緣)이라고도 하지.”

“그럼 좋은 거네?”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

“궁합은 좋은 거잖아?”

“좋은 궁합은 좋은 것이지만, 나쁜 궁합은 나쁘지.”

“아, 맞다. 나쁜 궁합도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부부는 전생의 원수가 이번 생에 복수하려고 만난 것이라는 말이 나온 거지?”

“맞아, 그래서 좋고 나쁜 것은 사주의 상황에 따라서 결정이 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금이지만 용신은 토라서 토를 만나면 좋은데 오빠가 무토이고, 오빠는 토지만 용신은 금이라서 금을 만나면 좋은데 내가 금이라서 우린 좋은 궁합인 거잖아? 맞지?”

춘매의 사주에서 토가 용신이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해줄 수도 있으려니 싶어서였다. 그래서 대충 적당히 둘러댔다.

“사제지연(師弟之然)이기 때문에 좋다고 할 수 있겠지.”

“하여튼 좋은 거잖아. 난 지금 뭐든지 좋게 해석하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그냥 동의해 줬으면 좋겠어. 호호~!”

“그러다가 관계가 나빠지면 온갖 것을 끌어다 붙여서 증오하려고?”

“원, 그럴 리가. 호호호~!”

“마음은 평정심이 최고야.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이라야 주변의 환경에 흔들리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길을 바라보고 가게 되니까.”

“오빠의 마음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기는 한 거야?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희노애락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거잖아?”

“당연하지, 내 희노애락을 들어 볼래?”

“응 들러줘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도 없는 사람 같아.”

“방문자가 찾아와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면 희(喜)가 되고, 그가 세상의 못된 관리들에게 시달리고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 노(怒)가 되며, 아무리 노력을 했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소연을 할 적에는 애(哀)가 되고, 궁금한 보따리를 들고 왔다가 모두 해결하고 고맙다고 하면서 돌아갈 적에 락(樂)이 되지.”

“와우~! 정말 차원이 다르네. 어떻게 희노애락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지?”

“누이의 희노애락은 뭔데?”

“오빠가 활짝 웃으면 희(喜), 손님이 오빠를 화나게 하면 노(怒), 오빠가 시무룩하면 애(哀), 오빠가 즐거워하면 락(樂)이지 뭐야.”

“음.... 큰일이로군....”

“아니, 왜? 당연한 거잖아? 그게 왜 큰일이야?”

“그 희노애락에는 정작 누이 자신이 없잖아. 그게 큰일인 거야. 그러면 상처만 받게 되거든. 자신이 있어야 하는데 누이는 어디로 간 거야?”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느끼고 말하고 듣고 있는데?”

“누이의 희노애락에는 주체(主體)가 없어서 그 대상인 내가 사라지고 나면 풀썩 쓰러지고 말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큰일이 아니고 뭐겠어. 쯧쯧~!”

“알아, 이제 차차로 그렇게 될 거야. 부디 바라는 것은 내가 홀로서기를 이룰 때까지 오빠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야. 공부하지 않고서도 한방에 깨달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이 있거든 내게도 좀 알려 줘. 나도 그걸 원하니까. 하하~!”

“쳇, 그냥 투정을 부려 보는 거야. 공부하지 않고 깨달을 수가 있다면 당연히 오빠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맞지?”

“알면서 어깃장을 놓아 본 건가? 그렇게 해서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 하하~!”

“그런데 말이야. 어차피 미래를 물어보러 오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잖아? 아무리 이치는 오늘만 살면 된다고 하는 것도 맞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렇게 온통 옳은 이야기만 하면 찾아온 사람은 어떻게 희망적인 해답을 얻게 될지도 걱정이네.”

“그야 조짐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는 거야. 그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는 오주괘(五柱卦)에서 분주(分柱)의 조짐을 통해서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여기면 되지.”

“분주의 조짐이야 공부를 하면 알겠지만, 오빠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사주를 풀이하는 것은 사소하게 느껴지고, 세상의 이치를 더 많이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 내게 사주를 가르치는 것이 맞긴 한 거지?”

“당연하지. 이렇게 공부하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지.. 하하하~!”

“놀라워, 어쩌면 어려운 이야기를 그리 쉽게 하는지. 호호호~!”

“그야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는 것과 같은 거야. 누이가 열심히 배우려고 하니까 나도 덩달아서 이야기를 해 줄 뿐이니까.”

“애고~! 말을 말아야지. 됐네,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듣던 중에 반가운 말이네. 하하~!”

“오늘은 너무 심오한 이야기를 들어서 인가 배가 더 고픈 것 같네. 뭐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만두~!”

“참나, 언제나 만두라지, 그렇게 날마다 만두만 먹어도 질리지 않아?”

“응. 누이가 만들어 주든, 만두집에서 사오든 다 좋으니까.”

“알았어. 뭐든 만들어 놓을 테니까 조금 이따가 건너와.”

춘매가 먹을 것을 마련하러 나가자 우창도 검객과 나눈 이야기와 점괘를 다시 살펴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간단히 비망록에 적어놓았다.

특히, 분주(分柱)의 생기(生氣)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감탄을 했다. 신미(辛未)가 아니라 경오(庚午)였더라면 또 어쩔 뻔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살리고자 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활로(活路)가 보이고, 죽이고자 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사로(死路)만 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경계(境界)에 머무르지 않고 호호탕탕(浩浩蕩蕩)한 마음으로 평상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최선(最善)인 줄은 알지만, 아직도 감정의 흐름을 모두 떠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생기가 보이면 힘이 나고 안 보이면 힘이 빠지는 자신의 마음을 관하면 속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춘매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날이 풀리면 다시 운수행객(雲水行客)의 길을 갈 수도 있는데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그네의 이별법으로 훌쩍 떠나고 나면 그 상심(喪心)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것도 부담스럽기는 했다. 해결책이 있다면 그 안에 춘매에게 중심을 심어주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춘매에게 중심을 잡아주고 떠나면 될 일인데 괜히 걱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는데 기다리던 춘매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서 와~!”

“그래, 바로 간다~!”

그렇게 답을 하고는 서둘러서 춘매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