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제21장. 천하유람/ 1.제나라 옛 수도에서의 기연

작성일
2020-03-20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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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제21장. 천하유람(天下遊覽)


1. 제나라 옛 수도에서의 기연(奇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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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노산을 떠난지 두어 달이 지나서야 임치(臨淄)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공부의 길로 서둘러서 가느라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제는 천하를 유람하면서 공부를 한 내용을 강호에서 적용하면서 살펴볼 목적이었으므로 서두를 일도 없었기에 느긋하게 불구경 물구경을 하면서 오느라고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지만, 그중에서도 항상 생각나는 것은 노산에서 공부하고 있을 자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원에게는 말을 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조용히 만났을 적에 눈가에 맺힌 이슬이 반짝이는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노산에서는 공부를 다 하셨어요? 이렇게 이른 새벽에 소리도 없이 훌쩍 떠나시면 어떡해요?”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한들 또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만나게 될텐데 뭘 그렇게 아쉬워하나? 그리고 자원도 본래 왔던 곳으로 떠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지나는 길에 바람결에 소식이 들리면 또 찾아가면 되지.”

“진싸부, 어쩜 그렇게 무정하세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휑하니 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고월사부님도 얼마나 아쉽겠어요? 함께 열심히 토론하면서 웃고 떠들던 날들은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예요.”

우창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마음은 이미 산을 떠난 새가 되었는데 감정은 거미줄처럼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이러다가는 모처럼 큰마음을 냈는데, 그냥 주저앉을까 봐서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서 방으로 들어간 자원이 작은 주머니를 하나 건네준다.

“길을 떠나시는데 웃음으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너무 제 마음만 앞세웠어요. 부디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시고 다음에 만나면 또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건 여비에 보태세요.”

감정은 흐느끼면서 마음은 웃는 표정이란, 가슴이 찌릿찌릿해서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쁜 손으로 건네주는 주머니를 차마 받고 싶지 않았지만, 자원의 표정으로 봐서 받지 않았다가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흔쾌히 받기로 했다.

“오호, 고맙군. 요긴하게 쓰이지 싶네. 항상 생각이 날 거야. 다음에 만나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이만 출발할 테니 잘 지내.”

“어디에서라도 항상 보중(保重)하세요.”

그렇게 전송을 받으면서 이른 새벽의 여명을 틈타서 노산을 떠났고, 청도(靑島)를 거쳐서 방향을 서쪽으로 잡고서 해가 지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는데 이제 임치에 도착하고 보니 과연 제나라의 옛 수도에서 느낄 수가 있는 적막감과 공허함이 느껴졌다. 춘추전국시대의 화려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오랜 세월을 방치한 채로 옛날의 영화를 회상하는 듯한 풍경에서 인생의 무상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것 같은 감상이 절로 들었다.

멀리서 본 풍경은 그러했으나 막상 중심지로 걸음을 옮기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오랜 도읍의 면모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서 숲을 보는 것과 나무를 보는 것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가을의 긴 해도 뉘엿뉘엿 서산을 향해서 기울어가고 있는 시간에 낮의 더위를 피해서 집에 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조용하기만 했던 거리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을 보니 우창도 덩달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풍화객잔(風和客棧)」

“어서옵쇼~ 안으로 들어가시면 맛있는 음식이 나옵니다요~!”

긴 세월과 함께 하여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객잔을 지나치는데 10여 세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우창을 향해서 죽은 삼촌이라도 돌아온 듯이 반겨하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관심이 가서 바라다봤다.

“먼 길에 많이 지치셨네요. 어서 위층으로 올라가서 먼지부터 좀 씻으세요. 향기로운 술과 천하의 진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그래, 고맙구나. 이 객잔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야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풍화객잔’아닙니까요.”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물어봤다만?”

“아, 선비님이셨네요. 상인들은 전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니까요. 소인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풍화객잔의 풍화(風和)는 동서남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오가는 손님들께서 모여서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로 즐겁게 드시고 쉬었다가 다시 바람처럼 자기가 갈 곳으로 떠나간다는 의미라고 들었습니다요.”

“오, 그런 뜻이었구나. 그럼 나도 바람이 되어서 함께 어울려 볼까.”

그러자, 아이는 반색을 하면서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귀한 손님 들어가십니다요~~!!!”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귀한 손님’이라는 말이 쑥스러웠지만, 으레 하는 상투적인 말이겠거니 생각하고는 안에서 나온 점원을 따라서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손님들은 드문드문 앉아서 담소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자자~ 이쪽으로 옵쇼~!”

점원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니까 길이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작은 자리를 잡아 준다. 한가롭게 쉴 수가 있는 자리여서 맘에 들었다. 원래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우창이를 용케도 알아보고 조용한 자리로 잡아 준 것이 맘에 들었다.

“먼 길에 시장하시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여기 손 닦으시고 조금만 쉬십쇼~!”

우창은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움직여 주고는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대략 잡아서 100리 길은 걸은 듯싶었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몰골로 들어왔으니 먼 길에 힘들었겠다고 할만도 하겠다. 우선 좀 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용케도 알았는지 다시 점원이 달려와서는 씻을 곳을 안내해 준다.

“손님~ 아래로 내려가서 왼쪽으로 보면 씻는 곳이 있습니다요. 시원하게 씻으시고 오셔도 좋겠습니다요.”

“아, 고맙소. 그럼 먼저 좀 씻고 오리다.”

점원이 알려준 대로 내려가서는 머리도 감고 손발도 씻으니 정신이 새롭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문득 편안하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있었던 노산의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집을 떠났으니 고생스러운 것은 당연하지만 또 항상 같은 것만 보고 있다가 시시각각으로 스쳐 지나가고 만나는 풍경들을 보니 여정에서의 피로감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여행자의 푸념이었다. 우연처럼 얻은 화산려(火山旅)의 점괘가 인연이 되어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 바람에 지금 이 자리에 와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손님~ 여기 드실 것을 가져왔습니다요. 그리고 술도 원하시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요~!”

모처럼 술도 한 잔 들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권하는 대로 술도 한 병 주문했다. 점원은 바람처럼 빠르게 술병과 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한 잔 가득 따라주고는 맛있게 드시라고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이제 손님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술부터 마시니 뜨거운 불줄기가 목줄기를 타고 기분 좋게 내려간다. 그렇게 식욕을 돋구고는 요리를 집어 먹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이 되었다. 나그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마시는 것인데, 지금 그것이 모두 다 이뤄진 까닭이다. 더구나 잠을 잘 곳까지 마련이 되었으니 마음이 갑자기 느긋해져서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접시를 비웠다.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배가 어지간히 채워지고 나니까 비로소 주변을 여유롭게 살펴본다. 그러다가 한 사람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진작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지 눈길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다. 우창도 오가는 바람이 서로 만나듯이 그런 마음으로 눈인사를 했다. 그도 혼자인 듯했다. 나이는 대략 봐서 60대 중반쯤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이었는데 쏘아져 나오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흠....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우창은 잠시 생각해 봤지만,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뜻에 대해서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 전에 본 적이 있는가 싶어서 기억 속을 뒤져봐도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합석해도 되겠소?”

생각에 잠겨있느라고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가 보다. 그 사람이 옆에 와서는 말을 건넸다. 갑자기 소리를 듣고서 흠칫했지만 이내 알아보고서는 자리를 권했다.

“그럼요. 이리 앉으시지요.”

“마침, 적적하던 차에 혼자 여행 중이신 것으로 보여서 무례했소이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세상 이야기나 나눠볼까 하고....”

“고맙습니다. 환영합니다. 소생은 진하경(陳河鏡)이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진형이셨구료. 나는 오인걸(吳仁杰)이라고 하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후배가 오 선생을 이렇게 뵙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봐하니 유람 중이신가 보오만....”

“예, 그렇습니다. 노산에서 몇 해 머물다가 세상의 풍경이 궁금하여 이렇게 유람을 하고 있습니다.”

“노산이면? 동해의 노산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혹 들려 보셨는지요?”

“그렇소이다. 반도봉(蟠桃峰)에서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혹 올라가 보셨소이까?”

“예? 반도봉이라고요? 그러시면 곽 사부님을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호~! 경순도인(景純道人)을 아시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 말을 듣고서는 우창이 벌떡 일어나서 읍을 했다.

“후학이 오 선생님께 문안 여쭙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야 내가 할 말이오. 어쩐지 초면인데도 오랜 지기와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더랬소이다. 허허허~!”

“이렇게 후학을 살펴주시니 영광입니다. 존호(尊號)는 어떻게 쓰시는지요?”

“아, 두남(斗南)이라고 불러 주시오. 진형의 호는 어찌 되시오?”

“이제부터는 말씀을 낮춰하시고요. 후학은 우창(友暢)이라고 부릅니다. 벗우에 펼창입니다.”

“오호, 딱 어울리는 호를 받으셨구려. 우창이라.... 아주 좋소~!”

“말씀을 편하게....”

“아, 그래 연배도 있으니 그래도 되겠군. 우창은 어디로 가시는가?”

“특별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다만 흘러가다가 서안(西安)에 도달하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럼 바쁠 약속은 없으신게로군. 잘 되었네. 두남의 초막이 누추하지만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오늘 저녁엔 내가 초대를 함세. 응해 주실텐가?”

“여부가 있습니까. 그렇잖아도 이렇게 뵙고 헤어지면 무척 섭섭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에 초청을 해 주시니 기꺼이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슬슬 일어나 보실텐가? 오늘 저녁은 내가 살 테니 사양하지 말게나.”

“아이구, 아닙니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초면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지지 않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 말게나. 나그네는 항상 형편이 넉넉지 않은 법이란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니 전혀 신경쓰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만 따르시면 된다네. 허허허~!”

그렇게 말하고는 점원을 불러서 우창이 먹은 것도 모두 계산을 하고는 앞서서 휘적휘적 걷는다. 잠시 얼떨떨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으나 버텨봐야 별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순히 따랐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호객하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울려 퍼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앞서가는 오인걸을 놓칠 것만 같아서 대충 눈으로만 훑으면서 뒤를 쫓았다. 구경이야 차차로 해도 되는 것이니까 지금은 급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인걸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로를 한참 걷다가 골목으로 접어드니까 바로 나타났다. 대문 위에는 편액이 있어서 얼른 읽어봤다.

「수록만당(壽祿滿堂)」

“다 왔네. 어서 들어가세.”

“실례하겠습니다.”

집안에서 15~6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빠르게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을 닫고는 얼른 뛰어온다.

“손님이 쉬시도록 마련해 드려라. 그리고 서재에 불좀 밝혀다오.”

“예, 스승님~!”

그렇게 말을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방에 불이 밝혀지고 오인걸이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봤다. 우창도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정갈한 서재에서는 묵향(墨香)이 풍겨나왔다. 긴 여행에서 찌들은 나그네가 자기의 집에 돌아온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먹의 향기여서 더욱 반가웠다.

아이는 심부름이나 하는 사동이 아니라 제자였던 모양이다. 사동이었으면 ‘주인님’이라고 했을텐데 ‘스승님’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지례짐작한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인걸이 우창에게 앉으라고 권하고는 자신도 앉았다. 잠시 후, 아이가 뜨거운 찻물을 들고 들어와서 차를 우린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말을 걸었다.

“손님께서 동행하셨네요. 잘 오셨어요. 저는 유염(柳琰)이라고 합니다. 염아라고 불러주시면 되고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진하경이라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진 선생님을 이렇게 뵙습니다.”

유염은 그렇게 말하고는 학인의 습관이 몸에 밴 듯이 공수(拱手)하였다. 총명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우창도 기분이 좋았다.

“자, 차도 들면서 이야기 나누시게나. 염아도 이리 와서 앉거라.”

향기 그윽한 차를 마시니 아까 객잔에서 마신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차를 두어 잔 마시고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오인걸에게 물었다.

“그런데 두남 선생께서 거처하시는 곳의 이름이 수록만당입니다. 무슨 뜻인지 여쭤도 될런지요?”

“아, 그거? 내 스승님께서 호를 두남(斗南)이라고 지어 주셨기에 남두육성(南斗六星)의 별명인 수록(壽祿)으로 택호를 삼았을 뿐이네. 허허허~!”

“남두육성은 처음 듣습니다. 과문(寡聞)한 우창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신다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북두칠성(北斗七星)은 들어봤겠지?”

“예, 그것은 들어 봤습니다. 자미성(紫微星)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일곱 개의 별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요?”

“맞아! 잘 알고 있네. 북쪽하늘에는 칠성(七星)이 있고, 남쪽하늘에는 육성(六星)이 있다네. 북두칠성은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삶을 의미하기도 하네만 별에게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그냥 그렇게들 말하기도 한다네.”

“원래 사삼이 죽으면 북두칠성으로 간다고 하잖습니까? 왜 그런가 했더니 그런 뜻이 있었군요. 오늘 우창의 시야가 크게 열리는 것같습니다.”

“뭐 별 것도 아닌 것을. 차나 드시게. 허허~!”

“그런데, 북두(北斗)나 남두(南斗)나 모두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잖습니까?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천문(天文)에 대해서 조예(造詣)가 깊으시지 싶습니다. 다른 것도 수박겉핥기입니다만, 특히나 천문에는 까막눈입니다. 귀한 가르침으로 약간의 상식을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오호, 공부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시구나. 처음부터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네만 반가우이. 그런데 그간에는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하셨는고?”

“변변히 한 공부도 없습니다. 노산에서 겨우 간지학(干支學)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래서 좁은 안목을 좀 키워 보려고 강호를 유람하고 있습니다만, 참으로 세상은 넓고 기인달사(奇人達士)는 넘쳐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잔뜩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하~!”

“간지학을 했으면 제대로 오행(五行)의 기초를 닦으셨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잘했네. 참 잘했어.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기초가 부실하면 이룰 수가 없으니 말이네.”

“오늘 귀중한 인연을 만났으니 어떤 가르침으로 우둔한 안목을 활짝 열게 될지 마음이 벌써 설렙니다. 부디 후학을 위해서 한 수 가르침을 간청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오늘은 긴 여로에 여독도 쌓였을 테니 푹 쉬고 내일 이야기하세나. 누추한 곳이지만 내 집처럼 편히 쉬셨으면 하네. 허허~!”

“예, 고맙습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편히 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우창은 유염의 안내를 받아서 깨끗한 침소로 따라갔다. 나이로 봐서는 아직도 앳된 사람이 교육을 잘 받았음인지, 스스로 타고 난 천성이 침착해서인지 몰라도 가볍게 말을 걸기가 조심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묵묵히 촛불을 켜주는 모습을 보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더 넓은 강호를 유람하시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어린 염아는 아직도 공부를 더 해야 하니까 그러한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

“집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고행길이라는 건 들어보셨겠지? 다만 몸이 고단한 대가로 지혜의 경험이 쌓여서 완전한 내면을 갖춰가는 것으로 희망으로 삼고 다니는 것인데, 이렇게 하늘이 도와서 귀중한 어르신을 뵙게 되는 날은 그야말로 모든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지. 하하~!”

“부럽습니다. 저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어서 때로는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서 애를 태우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아우님은 지금 무슨 학문을 연마하고 계신 건가?”

“변변치 못한 제게 아우라고 불러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염아도 형님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아우가 무엇을 배우든 스승님의 복이 많아서 크게 학문의 성취가 있을 것으로 믿어도 되겠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의 인연이지만 삶의 완성은 스승으로 인해서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 복은 무엇과도 비길 수가 없는데 젊은 나이에 학문의 길에서 자신을 다듬고 있으니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자신과 인연을 했던 스승님들과 도반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의도인은 잘 계시려나.... 화사하게 웃던 상인화 누님은 또 어떻게 지내실지....

“아직도 논어를 읽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언제나 깊은 학문의 이치에 한쪽 발이라도 적셔 보나 싶은 마음만 간절할 따름입니다. 형님께서는 강호를 유람하시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시는지요?”

“공부야 이것저것 잡다하게 집적거려 봤네만 하나도 제대로 이루진 못하고 오가면서 주워들은 풍월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따름이라네. 다행히 스승의 복은 타고났던지 도처(到處)에서 귀한 가르침을 얻게 되어서 그나마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라네.”

“그러셨습니까? 견문이 많으신 것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틈이 나면 귀한 가르침을 조금 엿보고자 합니다. 부디 아끼지 말아 주시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두 손을 모아서 허리를 굽히는 것이 정성이 보여서 우창도 마주 포권(包拳)을 하고는 미소로 답했다. 하다못해 오가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라도 이 친구에게 해 줄 말이 한두 가지는 되겠거니 싶어서였다. 물론 오행학에 관심이 있다면 더 좋은 말벗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논어를 공부하고 있다니까 아직은 두고 봐야 하지 싶었다.

“이런, 고단하실 텐데 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쉬시고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니, 괜찮네. 나도 모처럼 이야기를 나눌 벗을 만나서 즐거우니 개의치 말게나. 그나저나 또 공부도 하셔야 할 테니 내일 만나세.”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유염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비로소 혼자가 된 우창은 하루의 일을 되짚어 보면서 풍화객잔에서 우연히 만난 두남 선생의 내력이 궁금했으나 차차로 알아가기로 하고 우선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을이라서 술에 취한 주정꾼이 지나가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들리고, 그에 답하는 개가 짖는 소리도 잠속으로 안내하는 노래처럼 들렸다.

이튿날.

눈을 뜨니 창문에 햇살이 비쳐드는 것이 보였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대략 이부자리를 정돈하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어젯밤에 본 풍경은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는데 밝은 날의 아침 풍경은 또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마침 대문이 열려 있어서 밖으로 나가봤다. 저만치서 오인걸이 새벽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두남 선생님 편히 쉬셨습니까? 덕분에 편안하게 잘 쉬었습니다.”

“젊은 친구가 일찍 일어나셨군. 한 바퀴 돌고 오시게 저 위로 가면 정자가 있는데 풍경이 괜찮을 것이네. 허허허~!”

“예, 주변 풍경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우창은 오인걸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게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니까 저만치에 멋진 누각이 나타났다. 아침에 운동 삼아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누각에 올라서 임치를 굽어보니 옛날 강태공이 제나라를 하사받아서 번창했던 시절의 고색창연했던 풍경들을 상상했지만 그러한 흔적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지 못했는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특별할 것이 없는 풍경과 아직도 남아있는 성벽이 옛날의 위용이 어떠했을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했다.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혹시라도 조반을 지어놓고 기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남의 집에서 하루 묵는 것도 신세를 지는 일인데 하물며 기다리게 해서야 얼마나 미안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