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제16장 역경(易經)의 입문(入門)/ 3. 무형(無形)의 형상(形象)

작성일
2017-04-15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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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제16장 역경(易經)의 입문(入門)


3. 무형(無形)의 형상(形象)



우창의 말에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상인화가 말했다.

“그것은 동생이 수용(受容)하니까 가능한 거야.”

“그것조차도 제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서 드러난 것인가요?”

“물론이야. 이것이 음양이니깐.”

“정말 누님은 철저(澈底)한 음양학자 같으십니다.”

“학자는 무슨,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것뿐이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응? 공부와 삶이 둘이라고 생각해?”

“아닌가요?”

“둘이라고 생각하면 둘이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거야.”

“누님의 말씀은 둘이 아니라는 뜻이죠?”

“맞아. 둘이 아니라고 생각해.”

“저는 언제나 이러한 경지(境地)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경지랄 것이 뭐 있어? 그냥 ‘도(道)는 일상(日常)’인 것만 알면 돼.”

“일상이 도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꽃이 피고자 해서 피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거야.”

“그냥 하다가 보면 때가 되어 꽃이 핀다는 말씀입니까?”

“몰라서 묻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아, 그렇습니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왜 누님 앞에서는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걸까요?”

“그야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게지.”

“헙~!”

“왜? 속내를 들켰어? 괜찮아. 그런 마음이 생기게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이니까. 그것에 대한 메아리일 뿐인 거잖아.”

“누님은 도인 같으십니다.”

“그야 동생도 도인이야.”

“에구~! 어림도 없는 말씀이십니다.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 해야 하겠지요.”

“왜? 내가 빈말을 하는 것 같아?”

“예.”

“아니야. 이미 입문을 했으니 도인이고, 이미 음양을 배웠으니 도인이고, 이미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도인인 거야.”

“어떻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요. 얼마나 마음속에서는 걸리는 것이 많다고요.”

“그야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아서겠지.”

“예? 무슨 뜻이지요?”

“도인은 혼자서 도인일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 음양의 이치는 없어.”

“왜 그렇죠?”

“음양은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이야.”

“상대가 있어야만 음양은 발생한단 뜻인가요?”

“맞아.”

“그런데 왜 수도(修道)를 하는 사람은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일까요?”

“왜 홀로라고 생각해?”

“가족을 떠나서 혼자 생활하잖아요.”

“세상에서 상대하는 것은 사람뿐이라는 뜻으로 들리네.”

“그렇지요. 홀로 생활하는데 혼자가 아니라고 하면 뭐죠?”

“이미 그에게는 수없이 많은 벗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하루도 외로워서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우창은 문득 반도봉의 경순(敬淳)이 떠올랐다. 홀로 고적(孤寂)하게 생활하는 것이 안 되었다는 마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지금 상인화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것도 자신에게 울린 메아리였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누님의 말씀을 듣고 문득 느끼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전에는 왜 못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아, 아무도 그에 대해서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었나 봅니다.”

“그건 핑계일 뿐일 거야.”

“예? 그게 왜 핑계지요?”

“문제도 자신이 만들고 해답도 자신이 만드는 거니까.”

“도대체 누님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시는 거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어.”

“그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죠?”

“이렇게 동생이랑 마음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순간적인 존재로 살아가잖아.”

“그게 전부 인가요?”

“그 밖에 또 뭐가 있을까?”

“문득 누님이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생각이야.”

“왜 이런 생각이 들지요?”

“동생의 모습이 내 모습에 투영(投影)된다는 것을 봤으니까.”

“그렇다면 어느 여인을 보면서 욕정을 느낀다면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욕정의 투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어.”

“아니, 그렇다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야.”

“또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상대방의 욕정이 투영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내 앞에 있는 것은 내 모습의 투영이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그런데 또 상대방의 욕정에 의해서 내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해.”

“그건 또 무슨 이치인가요?”

“음양~!”

“왠지 제자리를 맴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님.”

“원래 태극은 맴도는 것인 줄을 몰랐어?”

“그래도 뭔가 결론이 나야 하는데,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한참을 갔는데도 도로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왜죠?”

“결론을 바라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이야.”

“중생심이라뇨? 학자가 공부하면 끝을 봐야 하는 것이 잘못 된 것이란 말씀인가요?”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했어?”

“지금 말씀하셨잖아요. 중생심이라고.”

“누가 중생심이 잘못된 거라고 했어?”

“일반적으로 중생심은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이 누나가 아니라고 하면 왜 아닌지를 물어야지.”

“참, 맞아요. 또 제 생각에 갇혔네요. 누님, 왜 중생심이죠?”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하~! 중생심이 그 뜻이었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도인은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아무 생각도 안 해.”

“예? 그럴 리가요?”

“그럼 동생은 도인이 뭔 생각을 할 것 같아?”

“우주의 이치를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주의 이치를 생각한다면 아직 우주 밖에 있다는 거야.”

“예?”

“물고기가 물을 생각할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가 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도 공기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만약에 물고기가 물을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이미 상황은 최악(最惡)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당연하지, 언젠가 공기가 오염(汚染)이 된다면 아마도 인간도 매일매일 공기를 생각하게 될 거야. 가령 봄날에 황사(黃砂)가 몰아치게 되면 새벽부터 공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네.”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도인은 우주와 하나가 되어서 우주를 잊고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면 그것으로 즐거울 뿐이야.”

“듣고 보니까 누님의 말씀이 그럴싸~ 한걸요.”

“그럴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반도사(半道士)야.”

“반도사라니요?”

“절반(折半)만 도사(道士)~!

“그건 무슨 뜻이지요?”

“생각으로는 도인인데 행동(行動)은 중생인 거야.”

“반도사란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근데 재미있네요.”

“반도사는 온도사보다는 못하고, 비도사보다는 나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도사는 아닙니다. 하하?”

“도사가 별건가? 도를 닦으면 도사인 거야.”

“중요한 것은 생각만 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말씀이죠?”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야.”

“어서 공부해야 그나마도 가능하죠.”

“이미 잘하고 있는데 뭘.”

“언제나 저도 누님처럼 유연한 사고(思考)를 하게 될까 싶습니다.”

“하다가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거야.”

“역시 또 ‘절로 하다가 보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게 자연(自然)이니까. 자연이 무슨 뜻이야?”

“자연의 뜻이 ‘저절로 그렇게’인가요?”

“맞아.”

“누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정말 신비롭기조차 합니다.”

“원래 공부의 맛과 멋은 이런 거야.”

“예. 공감이 됩니다. ‘맛과 멋도 음양일까?’싶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어디 설명해 봐.”

“맛은 혀에서 느끼는 것이니까 직접적이고, 멋은 오랜 습관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니까 간접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0점.”

“겨우 50점입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답이 생각났어?”

“맛은 내 것이고, 멋은 남의 것입니까?”

“80점.”

“아직도 올바른 답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네요.”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되지 싶어.”

“맛은 양이고 멋은 음입니다.”

“오~! 95점.”

“그래도 5점이 부족한가요?”

“그것은 영원히 채울 수가 없는 신(神)의 점수야. 이미 동생은 최고점을 받은 것이지.”

“아, 그렇다면 위로가 됩니다. 맛있게 먹고, 멋있게 살아야겠습니다.”

“오호, 98점~!”

“아니, 왜죠? 신의 점수라면서 그렇게 마구 퍼줘도 돼요?”

“왜 안 돼? 내 맘이지.”

“그러니깐요. 그 이유가 뭐냔 말씀이죠.”

“무심결에 나오는 멋과 맛이야말로 진미(珍味)인 까닭이야.”

“정말 빈틈이 없으십니다. 누님.”

“생각 없이 생각하고, 생각 없이 행동하나 자연의 이치에서 어긋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해.”

“뜻은 알겠는데, 너무 심오(深奧)합니다.”

“모르면 물어봐. 그것도 물을 곳이 있을 때가 행복한 거야.”

“뜻은 알죠. 다만 그렇게 어려운 말로 설명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생심~!”

“아차, 또 걸렸군요.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주고받는 것에서 왜 남을 생각하냔 말씀이신 거죠?”

“맞아.”

“문득, ‘누님의 정체가 뭘까?’싶은 생각이 듭니다.”

“상인화(尙印和)~!”

“하하~! 알죠~! 그것 말고요. 어떤 깨달음의 깊이를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해 본 말씀이랍니다. 하하~!”

“음양을 보는 방법은 잘 깨달았어?”

“깨달았다고는 못하겠지만, 대략 어렴풋이나마 짐작은 됩니다.”

“원래 공부란 그런 거야.”

“어렴풋이 아는 것이 공부라고요?”

“아니, 혼돈(混沌)처럼 몽환(夢幻)처럼 그렇게 긴가민가해 가면서 이해하고 또 궁금해 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명료(明瞭)한 해답을 구하지 말란 뜻인가요?”

“맞아.”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 줘야 할 거잖아요.”

“중생심~! 남 걱정은 하지 말라니깐~!”

“아차~! 또 걸렸네요. 이 병은 어쩝니까?”

“공부로 생긴 병은 공부로 고쳐야지 뭐.”

“알았습니다. 에구~! 잘못 물었다는 생각이 마구 듭니다. 하하~!”

“점심은 안 드십니까?”

“왜? 공부하다 보니까 출출하지?”

“어쩌면 그리 어머님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잠깐 기다려 봐 간단히 요기(療飢)할 것을 챙겨 올게~!”

그러면서 상인화는 주방에서 사과, 배를 가져왔다.”

“누님.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밥은 안 드셔도 되나요?”

“또한 중생심~!”

“왜죠?”

“시장하면 시장을 채우면 되는 것일 뿐이니까.”

“맞아요. 왜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습관이겠지요?”

“당연해. 아무거나 먹을 수 있으면 먹고 없으면 물을 마시면 되잖아.”

“맞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킵니다. 하하~!”

한편 떠들면서 한편 과일을 깎아서 접시에 담았다. 상인화도 그것을 집어 먹으면서 밖을 내다본다.

“두 번째 손님이 오셨네.”

“예? 손님이요? 원래 손님이 자주 찾아오시나요?”

“가끔. 그런데 동생을 따라서 온 것 같은데.”

그 말에 우창이 밖을 내다보니까 저만치에서 자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자원도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는지 천천히 주변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예? 뭐를 어떻게 해요?”

“맞이할까 그냥 보낼까?”

“아, 누님.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누님이랑 이야기하는 게 더 좋아요.”

“알았어.”

그렇게 말을 한 상인화는 밖으로 나가서 마당을 어정거렸다. 그러자 집안은 잠시 기웃거리던 자원은 민망했는지 이내 몸을 돌려서 되돌아갔다. 그것을 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온 상인화가 말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구나.”

“예? 어떻게 아셨어요?”

“양이 동하니 음이 움직인 이치를 보고 알았어.”

“지금 제가 한 것이 잘한 것일까요?”

“뭘?”

“벗이 나들이 왔는데 만나기 싫다고 한 것이 말이죠.”

“왜? 맘에 걸려?”

“조금요.”

“누나와 오붓하게 함께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뭐. 괜찮아.”

“정말 누님은 제 마음속을 다 누비고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왜? 속내를 들켰어?”

“에구~! 말씀이나 하지 않으시면.”

“대화란 이런 거야. 언젠가 저 낭자도 만나야 하겠는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