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제15장 운명의 그릇/ 4. 메아리를 믿는 마음

작성일
2017-04-0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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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제15장 운명(運命)의 그릇

4. 메아리를 믿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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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다시 잠시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놀라운 것은요. 그렇게 총명하고 지혜로운 학자들이 왜 그것을 걸러내지 않고 그냥 전승하는 것에만 열심이셨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어쩌면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필요치는 않지만 기왕 있는 것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 책임을 피했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자평 선생님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봐요.”

“그렇긴 하네만 학자 중에는 두 가지의 형식이 있다네.”

“어떤 형식이요?”

“계발형(啓發形)과 전승형(傳承形)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만드는 사람과 전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주세요.”

“계발형은 새로운 이치를 찾아서 파고드는 형태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창시자(創始者)가 되는 셈이지. 자평 선생이 비록 이러한 글들을 수집하기는 했지만, 일간위주(日干爲主)라는 놀라운 이론을 창시했다는 것이지.”

“참, 그렇죠? 일간위주라는 것은 신의 계시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물질로 본다면 발명가(發明家)라고 할 수도 있지. 아무도 모르던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렇다면 전승형은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전승형은 그야말로 전달자(傳達者)라고 할 수가 있지.”

“아, 그러니까 기존에 있는 것을 옮겨 적어서 다시 전해주는 역할을 한단 뜻이로군요.”

“맞아. 자신은 깊은 뜻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것 같아서 원본(原本)을 훼손하지 않고 보관하고, 또 그것을 글자 그대로 베껴서 후학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 이러한 일도 긴 세월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결코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

“이해가 되어요. 자칫하면 훼손(毁損)이 되거나 실전(失傳)이 될 수도 있을 뻔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전달해 준다면 다시 다음에 밝은 학자가 그것을 접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연해자평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을 되살리고, 허접한 것은 정리하는 것을 우리가 하면 되지 않을까?”

“역시, 임싸부는 생각의 폭이 넓으시네요. 그렇게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요. 새롭게 또 하나의 관점을 배웠어요. 놀라워요.”

“깨침을 주는 스승도 스승이고, 그것을 전달해 주는 스승도 스승이기 때문이지. 이 둘의 가치(價値)를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보네.”

자원이 열변을 토하는 고월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임싸부께 물어보고 싶은 말이 생각났어요.”

“그래? 뭔지 말해 보시게.”

“그렇게 전달을 해 주는 과정에서 소중한 자료도 전해졌겠지만, 또 전해져서는 안 되는 내용들도 같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잖아요?”

“오, 예리하군. 당연하지. 그 과정에서 영향요계가 걸러지지 않고서 그대로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말하자면 숟가락과 같네요.”

“엉? 숟가락은 갑자기 왜?”

“숟가락은 밥을 입으로 옮겨주잖아요? 그렇게 옮겨주면서도 자신은 밥맛을 모르니까 쉰밥이든 독이 든 밥이든 거침없이 그대로 옮겨주게 되는 것이 떠올랐어요.”

“거참 기가 막힌 비유로군. 하하하~!”

“통쾌하시죠? 올바른 이치를 찾아서 골라내는 젓가락과 같은 학자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마구 전하는 숟가락과 같은 학자간의 차이가 이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임싸부께서 공감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호호호~!”

자원의 너스레를 들으면서 우창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전하지 않은 것보다는 전한 공덕이 더 크니까 이렇게 우리의 손에까지 도달하지 않았는가? 이제 젓가락질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나 보군. 하하하~!”

“오늘 새로운 안목(眼目)을 얻었어요. 앞으로 무슨 이론이라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명심(銘心)할게요.”

우창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현실적인 문제와 학문적인 문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명학의 과제(課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고월의 식견(識見)에 탄복(歎服)했네. 과연 학문을 아끼고 고인의 노력을 헤아리는 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하겠는걸.”

“이런 이야기나 듣자고 그림자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이 아닌데, 여하튼 헤아려 주니 고맙네.”

“이제 그림자의 이야기는 명확(明確)하게 이해했어요. 왜 경도 스승님께서 허망(虛妄)한 이야기라고 하셨는지도 알겠고요. 깊은 이치는 모르더라도 논리적(論理的)인 관점(觀點)은 얻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생겨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재평가하고 전달을 할 것인지 아니면 오류가 있다는 표를 붙여서 전달할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만, 아예 후학의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삭제를 해 버리는 용자(勇者)도 필요하다네.”

“근데, ‘어떤 상황’이란 뭐죠?”

“물론 상상을 해 보는 것이지만, 가령 왕에게 불려가서 갓 태어난 태자에 대한 사주를 보라고 했을 적에, 왕의 면전(面前)에서 빌어먹을 사주라고 해석하게 된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느냔 말이지.”

“그런 말을 하려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된 상황에서 면피(免避)를 위한 궤변(詭辯)은 목숨과도 연결이 되어있으니 백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겠는가?”

“당연하죠~! 이해하고말고요. 아마도 그러한 상황에서 나오게 된 것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듣고 보니까 그래요.”

“그래서 결과물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은 자칫 고인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네.”

“맞아요. 더구나 유명한 명학자일수록 그 부담은 더 컸을 테니 무슨 말이라도 해서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용궁의 토끼와 같다고 봐도 되겠어요.”

“맞아. 거북에게 속아서 용궁으로 끌려갔지만, 자신의 간을 나무 그늘에 말려뒀다고 둘러댄 토끼와 같은 거지. 용왕에게 천연덕스럽게도 ‘미리 말했으면 갖고 왔을 것인데, 거북이가 말을 해주지 않아서 그냥 두고 왔으니 용왕님의 병을 고치는 것이 그만큼 더 늦어지게 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는 연기(演技)가 돋보이지 않은가. 하하~!”

“호호~! 맞아요. 그러니 아무리 유명한 학자의 글이라도 그 속에서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것은 후학이 할 일이라고 봐요.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지어낸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또 한 가지를 살펴볼까?”

“그래요. 비록 논리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이 있더라도, 이야기는 재미있어요. 그러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호호~!”

“자원은 학문에 대한 지식욕(知識慾)이 상당하단 말이로군. 하하~!”

“그럼요~! 저도 반드시 임싸부나 진싸부의 지식을 모두 빼먹고 말 거란 말이에요. 호호~!”

셋이서 유쾌하게 한바탕 웃고서는 다시 고월의 이야기로 마음을 모았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서였다. 그 표정들을 보면서 고월이 말했다.

“다음에는 ‘메아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까?”

“좋아요. 사주에서 어떤 상황을 일러서 메아리라고 하는지도 궁금해요.”

“물론 이것은 그림자, 저것은 메아리라고 뚜렷하게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아두게. 말하자면 모두 ‘실체(實體)가 없는 허상(虛像)’이라는 의미로 붙여놓은 의미라는 것만 알면 된다네. 그러기에 모두 묶어서 ‘영향요계’라고 한 것이기도 하겠지.”

“알았어요. 어서 사주를 보여줘요. 궁금해요.”

“그럼 이 사주를 보면서 이해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고월이 사주 하나를 적었다.

 

戊 丙 壬 庚


戌 戌 午 寅


 

“이러한 사주가 연해자평에 전하는데, 격의 이름은 도충격(倒沖格)이라고 되어있다네.”

“도충격이라면, ‘충을 받아서 넘어진 격’이란 말인가요? 이름도 참 괴이하네요. 호호~!”

“이름이야 아무렴 어떻겠는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메아리와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라네.”

“설명을 들어봐야 알겠어요. 무슨 뜻이에요?”

“오화(午火)가 충(沖)으로 자수(子水)를 불러들여서 그것으로 정관(正官)을 삼는다는 뜻이라는군.”

“예? 그게 말이 되나요?”

“여하튼 그렇다고 하는 거라네.”

“그런데 사주를 풀이하는 방법은 언제 가르쳐 주실 거예요?”

“그야 경도 스승님에게 물어야지. 왜 나에게 묻나? 하하하~!”

“책의 내용에서 그게 나와야 한단 말이죠? 쳇~!”

“서둘러서 개업할 것도 아니라면 뭐가 급한가?”

“그야 궁금하니까요. 책과 무관하게 알려주시면 안 돼요?”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풀이하는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네. 천천히 성장한 다음에 풀이해야지. 하하~!”

“아,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이렇게 배우는 것도 다 공부인 것을 말이죠. 자꾸 칭얼대서 숨이 넘어가시겠죠? 호호~!”

“그 열정으로 끝까지 가보자고. 하하~!”

“알았어요. 다시 사주를 설명해 줘요.”

“이 사주의 오행에 대한 균형을 생각해 볼까?”

“균형(均衡)이라고요? 어떻게 보는 거죠?”

“오월(午月)의 병술(丙戌)이 인목(寅木)도 있고 술토(戌土)가 있으니 일간의 기운이 넘칠까 아니면 부족할까?”

“아무래도 여름이라면 화기(火氣)가 넘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을 다스려 주는 오행은 뭐가 가능할까?”

“토(土)가 설기(洩氣)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도 가능하지. 연구하여 자신의 길을 가는 학자도 좋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아, 식신(食神)을 두고 말씀하신 거죠?”

“그렇다네. 그리고 벼슬을 하려면 임수(壬水)도 고려해 봐야지.”

“임수는 너무 무력한걸요. 그나마 연간(年干)의 경금(庚金)이 생한다고는 하지만 역시 오월(午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허약(虛弱)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벼슬을 해서 제학(提學)이 되었단 말이네.”

“제학이면 대제학(大提學)의 다음 서열이 되는 학자잖아요?”

“당연하지.”

“그렇다면 책에서 설명한 사주대로 ‘도충격’을 이뤄서 잘 풀렸다고 해석을 해야 하잖아요?”

“자평 선생은 도충격으로 벼슬을 하게 된 것으로 설명을 하려고 했던가 보군. 식신을 써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단 말이네.”

“벼슬은 반드시 정관(正官)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이었던 가죠?”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볼 수가 있지.”

“놀랍게도 국록(國祿)을 받는 고위(高位)의 관료(官僚)가 되었는데 정관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셨던가 봐요.”

“오호~! 자평 선생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건가?”

“오늘은 그게 보이네요. 호호호~!”

“어떻게라도 정관을 찾아와야 하겠다는 궁리로 인해서 기발한 도충격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봐야 하겠군.”

“정말 재미있어요. 고인들의 고민도 느껴지고요. 호호~!”

“이렇게 때론 말이 되는 이야기도 배우고, 또 때로는 말이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고심(苦心)했던 흔적도 느끼면서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라네.”

“정말이 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오늘 제대로 깨달았어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쓸어버리겠다고 빗자루를 든 경도 스승님의 두둑한 배짱도 느껴지는군. 하하~!”

“그것이 적천수의 위력(威力)이었던가 봐요. 놀라워요.”

“하나 더 볼까?”

“예~! 좋아요. 또 다른 사례도 봐야 이해가 넓어지겠죠?”

 

乙 丁 癸 辛


巳 巳 巳 酉


 

“우와~! 사주가 완전히 불덩어리로 보여요.”

“불기운을 유통시키려면 뭐가 필요할까?”

“그야 화생토(火生土)잖아요? 그런데 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럼 달리 방법이 없으니 불을 끌 수밖에.”

“불을 끄려면 물이 필요하잖아요?”

“당연하지.”

“불을 끌 물은 월간(月干)의 계수(癸水)예요.”

“옳지~! 그것이 사주를 풀이하는 방법이라네.”

“예? 그런 거예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그렇게 하는 공부가 잘하는 공부인 거야.”

“정말이네요. 감탄했어요. 제가 사주를 풀고 있다니요. 호호~!”

“신기하지?”

“그럼요~! 신기하다마다요. 자신이 대견해요. 호호~!”

“열심히 공부하니까 그렇게 보상이 주어지는 거라네.”

“고마워요. 그런 줄도 모르고 투덜댔어요. 호호~!”

“다시 책의 의도(意圖)로 돌아가 볼까?”

“참, 맞아요. 지금 메아리에 대해서 공부하는 중이잖아요.”

“이 사주에서는 무엇이 무엇을 충해 와서 정관(正官)을 찾는 것일까?”

“정(丁)의 정관은 임(壬)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사주에는 임(壬)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나?”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巳)가 있기 때문이죠.”

“사(巳)로 어떻게 하지?”

“사해충(巳亥沖)을 하면 되잖아요. 그럼 해(亥)가 메아리에 화답(和答)할 것이고, 그것을 불러다가 벼슬을 하면 되거든요. 호호~!”

“이런, 모조리 다 파악을 했군. 더 가르칠 것이 없네.”

“그럼 하산해요?”

“그러시게. 하산하셔~!”

“에구 무슨 말씀을요. 이제 시작인걸요. 호호~!”

“완전히 찰거머리같이 착 달라붙었군. 하하~!”

“그럼요. 절대로 배가 부르기 전까지는 안 떨어 질 거예요.”

“참 좋은 생각을 갖고 있으니 크게 성공할 것이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벼슬을 한 거예요?”

“기록에는 판원(判院)을 했다는군.”

“판원이면 도서관의 관료잖아요?”

“그런가? 그렇다면 관리자의 직책이었던가 보군.”

“월간(月干)의 계(癸)가 편관(偏官)이라서 주어진 일이 있었던가 봐요. 그럼 되었는데 꼭 정관을 찾느라고 옆에다가 물을 두고 다시 물을 찾아서 방황을 하셨을 자평 선생님이 딱해요.”

“이름에 매이다 보면 그렇게 되기도 하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이름은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괜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지.”

“설명을 해 주세요.”

“정관(正官)이 없으면 편관(偏官)으로 대신하면 되고, 밥이 없으면 떡을 먹으면 되는데, 꼭 정관이 있어야 벼슬아치가 된다고 생각을 하였으니 고생을 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네.”

“어머~! 정말이네요. 지금이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다면 가서 알려드리고 싶어요.”

“누군가 일할 머리 없이 그것을 만들거든 타고 가서 알려드리도록 하세. 하하~!”

“예? 뭘요?”

“뭐긴 뭔가. ‘과거로 돌아가는 기계’말이네.”

“그런 것이 어디 있겠어요. 괜히 해본 생각을 갖고 너무 정색하시네요. 호호~!”

“또 누가 알겠는가. 나중에 어느 천재가 그런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말이야. 하하~!”

우창도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