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제9장 천간(天干)의 소식(消息) / 14. 거미줄같은 강호의 은원(恩怨)

작성일
2017-02-0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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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제9장 천간(天干)의 소식(消息)

14. 거미줄같은 강호의 은원(恩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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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봉에서 행복한 시간을 나누고 하산하는 길은 발걸음도 가벼웠다. 우창은 우창대로 오늘 들었던 천간의 이치에 대해서 감동하면서 하충 선생에 대해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면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조은령은 또 그녀 나름의 깨달음과 즐거움으로 마음은 벌써 흥겨워졌다.

“싸부~! 오늘 뵌 경순선생은 참으로 아는 것이 많죠?”

“그렇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치와 씨름했는지 알겠는걸.”

“지혜가 밝은 선생님 들은 언제 뵈어도 멋져요~! 호호~!”

“당연하지~!”

“싸부도 멋져요~!”

그러면서 오늘 설명을 들은 이야기 중에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던지 물었다.

“근데 싸부. 오늘 설명해 주신 천간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적용(適用)을 시키라는 거예요?”

“뭘 어떻게 적용시켜?”

“아니, 배웠으면 언젠가는 써먹어야 할 것이잖아요? 써먹지도 못하는 것을 배웠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에요.”

“당연하지. 농부가 잡초를 베어서 썩도록 쌓아놓는 것은 그것을 먹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당연하죠~! 썩은 잡초를 먹는 농부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그 농부는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죠~!”

“그럼?”

“그야 내년 봄에 종자(種子)를 심을 적에 거름으로 쓸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만약에 거름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죠. 거름이 없어도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니까요.”

“없어도 되는 썩은 풀을 왜 준비하지?”

“그야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겠죠.”

“아직도 모르겠어?”

“뭔 말씀이세요? 어떻게 경순선생보다 더 어렵게 말을 하세요?”

“오늘 배운 천간에 대한 유심론(唯心論)은 농부의 퇴비(堆肥)와 같은 거야. 당장 먹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숙성된 다음에 공부할 적에 밑거름이 되어서 크고 맛있는 열매를 거두게 해 준단 말이야.”

“이야~! 그런 뜻이었구나~!”

“이제 알았어?”

“어머니는 밥을 떠먹는 법을 알려 주지만 스승은 밥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지.”

“어쩜~! 멋져요. 싸부~!”

“그러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대단히 영양가가 많은 밑거름을 준비한 것이니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겠느냔 말이야.”

“알겠어요. 령아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군.”

“이렇게 안내를 해 주시는 싸부가 있어서 행복하단 말이에요.”

“아, 그래? 그렇담 다행이지. 하하~!”

점점 어둠이 짙어지는 것은 땅거미가 산하를 덮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안력을 높여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조은령이 두어 번 미끄러져서 잡아주긴 했지만 별일 없이 산길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평지의 길이 나올 때까지 주의하면서 내려오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산속이라고는 해도 도관이라서 공부하는 도사가 산책을 나온 것이려니 싶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옆을 지나치는데 문득 검을 등에 메고 것이 보였다.

“싸부. 저 사람은 검객(劍客)이에요.”

조은령이 나직이 말했다.

“어떻게 알아?”

“아이참. 등에 장검을 멘 것도 안 보셨단 말이에요?”

“그냥 공부하는 사람이겠거니 했지. 근데?”

“살기(殺氣)가 느껴졌단 말이에요.”

“뭐라고? 살기?”

“예, 아무래도 경순선생이 맘에 걸리는데요.”

“형님이 왜 맘에 걸리지?”

“예민한 여인의 직감(直感)이죠 뭐.”

“그럼 어떡하지?”

“아무래도 내 검을 갖고 뒤를 밟아 봐야겠어요.”

“그래? 그럼 난 어떻게 하고?”

“잠깐만 저 사람을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얼른 다녀올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으로 조은령이 사라졌다. 말을 듣지 않았을 적에는 그냥 편안했는데 문득 살벌한 장면이 떠오르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둠이 짙어가지만, 발소리는 멀리까지 울려서인지 대략 어디쯤 가고 있는지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의 검을 들고는 숨 가쁘게 뛰어온 조은령이 물었다.

“싸부, 놓친 것은 아니죠?”

우창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발소리가 나는 곳을 가리켰다.

“음, 잘 지켰군요. 이제 천천히 따라가 봐요.”

“근데 위험하지 않을까?”

“뭐가요?”

“아니 상대가 검객이라면 령아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잖아. 뭐가는 뭐가 뭐가야.”

“지금 절 걱정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않아?”

“고마워요. 령아를 걱정해 주시다뇨. 호호~!”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심 행복이 느껴지는 콧소리가 섞인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우창은 그러한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만두지. 무슨 일이야 있겠어?”

“조금만 따라가 보고요.”

그렇게 가파른 길 입구에서 그 인영(人影)은 머뭇거리더니 반도봉과는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는 조은령이 멈춰 섰다.

“아니? 왜?”

“그만 돌아가요.”

“잘 생각했어.”

내심으로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반가움에 섞인 말을 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조은령이 말했다.

“싸부~! 령아 걱정을 참으로 많이 하셨군요.”

“당연하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쩔 거냔 말이야. 내가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니라서 도와줄 수도 없는데.”

“호호~! 고마워요. 싸부~!”

“싸부는 공부만 가르쳐 주시면 돼요, 령아가 지켜드려요. 호호~!”

“령아는 저 사람이 경순선생님을 어떻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단 말이에요. 오늘 가르침의 인연이 끝나면 안 되잖아요.”

“아니, 형님이 자기 하나도 지키지 못할까봐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그래도요. 방안에는 딱히 몸을 지킬만한 무기도 없었단 말이에요.”

“참 내, 아니 냉혈마인이 찾아온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는 형님이 그 정도의 방비도 하지 않았을까봐 걱정했단 말이야?”

“그래도요.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매우 위험했거든요.”

“왜? 더 쫓아 가보지 않고서?”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반도봉으로 갔다면 계속 뒤를 밟았겠지만 다른 길로 갔으니까요.”

“아니, 살기가 있다면 누군가를 해코지할 수가 있잖아?”

“그렇겠죠.”

“뭐가 그렇겠죠야? 사람을 구하라고 배운 무술이잖아?”

“강호에는 거미줄 같은 은원관계가 있어요. 그러한 것에 괜히 개입하는 것은 강호의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죠. 그래서 직접 관계가 없다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란 말이에요.”

“그래? 하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그만 들어가요.”

앞장을 서서 성큼성큼 걷는 조은령의 뒤를 따르는 우창. 왠지 모르게 듬직한 마음이 든 것은 그녀가 장검을 들고 있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윽고, 상청궁에 도달한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경내가 떠들썩해졌다. 노산의 정상 아래에 있는 상석옥(桑石屋)에 머무르던 주인이 간밤에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창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켕겨서 자꾸만 신경이 생겼다.

그래서 입이 빠른 한 도사의 수다를 들으면서 대략 정황을 파악해 보니까 원래 상석옥에는 무림을 떠나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강호를 은퇴하여 조용히 숨어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우창은 듣지 않느니만 못했다. 괜히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는 생각조차 들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책상에 앉아서 살육의 현장을 상상하고 있는데 조은령의 기척이 났다.

“싸부~!”

“아, 령아~! 들어오셔.”

 

“잘 주무셨어요?”

“그래, 많이 고단하셨지?”

“아뇨, 아주 푸욱 잘 잤어요. 그런데 싸부의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무슨 고민이 생기셨어요?”

“령아는 소문도 못 들었어?”

“무슨 소문요?”

“간밤에 상석옥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잖아.”

“아, 그래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을까?”

“모르죠.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괜히 마음이 쓰이는군.”

“강호의 일에는 마음 쓰지 마세요. 도사는 도만 닦으면 되는 거란 말이에요. 호호~!”

“어쩌면 그렇게 담담할 수가 있지?”

“원래 강호의 은원관계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이라니까요. 그런 일에 신경 쓰다가는 타고난 명줄대로 살지도 못해요.”

“하긴…….”

“근데, 싸부의 마음이 산란하셔서 오늘은 공부도 다 틀렸네요?”

“그게 뭔 상관이야. 공부는 공부지.”

“그 봐요. 남의 일에 신경 쓰니까 이 어린 제자가 피해를 보게 되잖아요.”

“피해는 무슨 피해를 봤다고 그래?”

“마음이 잔뜩 가라앉으셔서 흥이 안 나시는데 어떻게 공부할 수가 있느냔 말이죠. 오늘은 그냥 갈래요. 어제 공부한 것을 정리하고 또 오겠어요.”

우창이 말릴 사이도 없이 휘리릭~! 사라져 버리는 조은령이었다. 그냥 멍~하게 있다가 휭하니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면서 뭔가 허전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

괜히 뒤숭숭해서 어제 이야기를 들은 것을 정리해야 하는데 손에 붓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따스하고 햇살은 화창했다. 소문은 이내 가라앉고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자 우창도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시 처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여~!”

귀에 익은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출타를 했던 고월이었다.

“어, 고월 아닌가~! 언제 돌아왔는가?”

“어제 오후에 들어왔다네. 궁금해서 처소에 들렸더니 출타를 했더군.”

“그랬군. 어제는 반도봉의 곽성이라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네.”

“곽성? 나도 그분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는데 반도봉에 살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래? 유명한 분이셨던가 보지?”

“유명하다 뿐인가. 해박한 술수(術數)의 상식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분인 걸.”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어?”

“나도 말로만 듣고 뵙지는 못했지만, 그 선생의 기문포국(奇門布局)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다더군.”

“아하~! 그래서.”

“왜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차라도 한 잔 나누세. 내 처소로 가지.”

“그럴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