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제8장 교학상장(敎學相長) / 1. 노산의 봄소식

작성일
2017-01-0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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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제8장 교학상장(敎學相長)


1. 노산의 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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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목(乙木)」편은 비교적 난해한 부분이 없어서 순탄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 주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또 더 많은 사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잠시 간지(干支)의 기본적인 이치를 견고히 하고서 계속하기로 하고 혼자 궁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궁리를 할 적에는 항상 소나무 향이 가득한 숲길을 찾았다. 육갑이며, 지장간(支藏干)이며, 열두 동물이며 24절기까지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나른한 시간을 틈타서 오수(午睡)에 빠졌던 우창은 인기척에 잠이 깨었다. 어디선가 여인의 음성 들려왔는데 그것이 멀지 않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잠이 화들짝 달아나고 또렷한 의식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까 말까 생각하던 중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도사님 계신가요~?”

나직하게 나는 소리는 아무래도 우창의 처소 앞에서 나는 것 같아서 문을 열어 봤다. 그러자 마당가에 서 있던 여인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어머, 실례해요. 주무시는 줄도 모르고....”

그러면서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래도 뭔가 낯이 익어서 이 여인을 어디에서 봤던가를 곰곰 생각해 보니까 아까 부채로 거한을 제압하던 여인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을목....”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요?”

“아, 소녀는 바로 옆의 채에 머물게 되었는데 가까운 곳에 도사님이 계신 것 같아서 차나 얻어 마실까 하고 기웃거렸던 것이에요.”

그리고는 또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니 자칫하면 휭~하니 떠나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면서 우물쭈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차를 얻어 마시겠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어서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고서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때는 봄날이고, 몸은 혈기왕성한 청년이 아닌가, 그런 마당에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의 향기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뒤를 따라서 들어와서는 우창이 내미는 방석에 덥석 앉아서는 방안을 휘 둘러본다. 그 사이에 화로에 불을 피우고 부채질을 해 댔다. 이런 때는 물을 차관(茶罐)에 부으면 바로 부르르~ 끓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이 끓으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천천히 끓게 두고 앉으세요. 소녀는 은령이라고 해요, 조은령(曺銀鈴).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우창은 내심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싶었다. 보통은 여인이라면 다소곳하고 아무 남자하고 어울리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렵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만 생각하다가 이런 경우를 당하고 보니 참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시키는 대로 주저주저하면서 앉았다.

“아, 원래 조낭자셨군요? 소생은 진하경(陳河鏡)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좀 당황스럽습니다. 미안합니다. 하하~!”

그렇게 어색한 사이에 물이 끓었다. 녹차를 넣고 우린 다음에 한 잔 따라주고 우창도 한 잔 앞에 놓고 다시 앉았다. 뜨거운 차를 두어 모금 마신 다음에 주인의 입장에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노산은 어인 일로 오시게 되었는지?”

“자하(紫霞) 도장(道丈)께서 부르셔서 왔어요. 저는 천진(天津)의 하북원(河北院)에 있어요.”

“하북원이면?”

“노산(嶗山)의 태청궁(太淸宮) 소속이에요. 천진 분원인 셈이지요. 그런데 노산에 계신지 오래되셨나요? 전에는 못 뵈었던 것 같은데.”

“아,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어디 계셨어요? 봐하니 산중 생활을 하신지도 오래인 듯 한데요.”

“노산에 오기 전에는 태산에서 심곡선생을 모시고 공부했습니다.”

“음, 여동생이 없으시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은령을 보면서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걸 보니 딱 알겠는걸요. 제가 동생이 되어 드릴 테니 말을 편하게 하세요.”

“아, 예.... 그게.... 저...”

“그냥, 알았다~! 하심 돼요.”

“그래도.... 그걸....”

“따라 해 보세요. ‘알았어~!’라고요.”

“으응... 알았...어...”

우창은 갑자기 몸이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 같아서 중심을 잡느라고 진땀이 났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아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는데 갑자기 툭툭치고 들어오는 말투에는 도무지 감당되지 않았다.

“이젠 되었어요. 호호~! 처음이 어렵지 일단 한번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당~!”

“나도... 반가워~! 하하~!”

“그 봐요. 이내 적응되시잖아요. 그런데 뭘 공부하고 계신 거예요? 도술(道術)인가요? 법술(法術)인가요? 아니면 술수(術數)?”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조잘조잘하는 여인의 모습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차를 마시면서 차차로 안정되었다. 그리고 찬찬히 뜯어보니 용모는 밝아 보이는 것이 구김 없이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로 봐서는 누구하고나 잘 어울릴 수가 있는 포용성도 느껴졌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고 안면검사를 하고 있는 우창에게 또 질문이 쏟아졌다.

“오라버니. 그렇게 뜯어봐야 별수 없어요. 호호~! 근데 아까 저를 보고 뭐라고 하셨어요?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어요. 을 뭐라고 했나요?”

“아, 하하~!”

우창은 웃음이 나왔다. 그 야기를 해 줘야 하나 말이야 하나 싶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또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말하는 여인 조은령이었다.

“괜히 둘러댈 필요 없어요. 뭐예요? 어느 여인의 이름인가요? 혹 제가 오라버니의 여인과 닮은 것인가요?”

“원, 그럴 리가~ 하하. 실은 오전에 조낭자의 무예(武藝)를 감상했다오. 마침 공부하던 것과 연결이 되어서 불쑥 나온 말이니 괘념치 마오. 하하~!”

“웃는 모습이 참 멋지시네요. 근데 말투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그만 가야 할까 봐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조낭자가 뭐예요? 령아라고 하는 거예요. 은령에게는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최상의 숙녀 대접이랍니다.”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지 않은가 싶어서...”

“이미 오라버니도 마음속으로는 그러고 싶으신 거잖아요? 맞죠?”

갑자기 우창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까르르~ 웃으면서 놀리는 은령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있으려니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근데, 무슨 공부를 하시는 거죠?”

“아, 명학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어... 하하~!”

쑥스러워하는 우창의 표정을 봤겠지만 모른 채 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럼 령아의 사주도 봐 줄 수 있으시겠다~! 좀 봐주세요~! 복채는 잘 쳐 드릴게요. 호호~!”

“천만의 말씀~! 이제 시작하는 초보(初步)라서 겨우 육갑을 외우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 무슨 사주를 봐~!”

황급하게 손을 내 젓느라고 찻잔을 엎어버렸다. 얼른 마른 수건을 찾아서 닦으면서 말을 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만 까르르~ 웃는 조은령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럼 뭘 봐 줄 수 있어요? 그래도 산에서 공부를 하셨을 테니 뭔가 하나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뭐가 필요하세요?”

자신에게 점을 봐 달라는 말은 듣다가 처음이다. 오래전에 단시점으로 백발과 겨루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그 후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나마도 생각이 가물가물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막상 할 수가 있는 술수(術數)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창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시(斷時)라도 괜찮으면 봐 드릴까?”

“단시라고요? 처음 들어요. 근데 점을 보려면 무엇이 필요해요? 나이? 생일?”

“나이가?”

“경자(庚子)생이에요. 쥐띠요. 오라버니는요?”

“아, 난 계사(癸巳)생 뱀띠네.”

“뱀은 쥐를 잡아먹어 버리는데.... 이거 큰일인걸요. 호호~!”

“엇~! 그런 법이 있단 말이야? 그건 무슨 원리지?”

“옛? 원리는 무슨 원리에요. 일상 말하는 것이고 자연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인데, 제가 그 원리까지야 알 수가 있나요. 토끼띠는 호랑이띠가 먹고, 개띠는 원숭이띠랑 싸우는 거잖아요. 여태 공부하셨다면서 그것도 모르셨나 보네요? 도대체 뭘 배우셨는지 궁금한걸요. 호호~!”

한참 조은령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니 우창의 마음이 구름을 탄 것처럼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럴 수가, 따사로운 봄날에 여인의 방문을 받고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점괘는 어떻게 나왔어요? 참으로 궁금해요.”

“근데 알고 싶은 것이 뭐지? 질문이 있어야 답이 나오는데.”

“질문이라고요? 그야 멋진 오라버니를 만날 수가 있는지가 궁금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요. 호호~!”

‘음, 멋진 오라버니라. 그렇다면 남자를 만날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가 되겠구나. 점괘는 자(子)를 취하니 9가 되고, 오늘 일진은 무오(戊午)이니 천간(天干)의 무(戊)에서 5, 시진은 신시(申時)경이군. 그럼 7이군. 이 셋을 합하면 21이로군. 이것은 연괘(燕卦)가 되네.’

“제비괘군.”

“옛? 제비괘가 나왔어요?”

“그렇다네.”

“우와~! 그렇담 봄날에 강남에 갔던 제비가 날아오는 괘가 되잖아요? 그래서 오늘 오라버니를 만나게 되었나 봐요. 참으로 신기한 점괘네요. 아주 맘에 들어요~!”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요. 점신께서 이미 오늘 오라버니를 만날 것을 알고 계셨나 봐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려요. 호호~!”

그 사이에 우창은 제비괘의 속뜻을 떠올렸다.

 

옥녀즉상봉(玉女卽相逢), 삼춘곡우래(三春穀雨來).

소원봉대길(所願逢大吉), 출유승차마(出遊乘車馬).

가보유명객(佳寶有名客), 고목생신엽(枯木生新葉).

 

옥녀와 상봉을 하니 봄날의 곡우의 단비로다.

원하는 바의 대길함을 만나 수레를 타고 놀러 다니고

아름다운 보배와 이름 있는 나그네라 마른 나무에 새잎이 돋는다.

 

우창은 다시 흠칫 놀랐다. 이것은 조은령의 점괘가 아니라 우창 자신의 점괘가 아닌가 싶은 정도로 자신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설레는 점괘였다. 원래 점괘는 묻는 사람의 점인데 자신의 염원이 투영된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여하튼 조은령이 멋대로 해석을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구태여 문자의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