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14. 오행검법(五行劍法) 제일초(第一招)

작성일
2017-01-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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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

[042]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14. 오행검법(五行劍法) 제일초(第一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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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며칠이 지났다.

우창이 모처럼 복잡하게 얽혔던 문제들을 푸느라고 두통이 생겼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은 덕인지 말끔히 사라져서 상쾌한 아침 공기가 좋았다. 잠시 공부에 대한 것도 내려놓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차에 낙안이 찾아왔다. 그렇잖아도 먼저 공부하면서 궁금한 것도 생겼으나 그도 공부하고 있는데 자주 가서 귀찮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참고 있었다.

“형님께서 방문을 해 주시다니 기뻐서 펄쩍 뛰겠습니다. 그간도 편안하셨는지요?”

“물론이지, 오늘쯤 아우의 궁금증이 하늘을 찌를까 걱정이 되어서 슬슬 나와 봤다네. 역시 생각했던 대로군. 하하~!”

“왜 아니랍니까. 지옥에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뵙는 것 같습니다. 어서 이 아우를 불지옥에서 꺼내 주시지요. 하하~!”

“아무것도 걱정 말게. 내가 아우 머릿속을 시원하게 해 드림세.”

“저번에 오행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공부가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칼처럼 휘둘러서 남에게 치유(治癒)를 해 줄 수도 있고, 치명상(致命傷)을 입힐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고 보니까 더욱 신중(愼重)해지는 마음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점점 머리가 무거워질 거네. 그러면 익은 벼가 되는 거지. 그때 하산을 하면 된다네. 하하~!”

“하산이라뇨. 이 둔한 머리로는 삼생(三生)을 배워도 어림도 없지 싶습니다. 아예 하산하지 않을랍니다.”

“그야 맘대로 하시게. 하하~!”

“오늘은 어디부터 긁어 주시렵니까? 온 전신(全身)이 가려워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예? 거기가 어딘데요?”

“가려워서 미치겠다면서? 그것을 말하는 거지.”

“가려운 것이 오행에 나옵니까?”

“당연하지 않겠는가. 오행으로 가려운 것은 어디에 속하겠는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

“가려우면 어떻게 행동하나?”

“그야 긁으려고 하지요.”

“그게 목(木)이라네.”

“예? 목은 나무가 아니던가요?”

“물론 나무도 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용사(形容詞)에 불과하다네. 형용사에 매이면 실체가 숨어버리니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음, 가려워서 긁으려고 하는 것이 목이라…….”

“그렇게 궁리해서는 백날을 해도 진전이 없을 것이네. 하하~!”

“그러니까요. 이걸 궁리해서 뭐가 나오겠나 싶습니다.”

“목은 봄이 되고, 소년이 되고, 아침이 된다고 생각하면 훨씬 더 궁리할 거리가 풍부해지겠군.”

“제가 알던 나무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것이었군요. 오늘은 목의 이치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목의 초식(招式)은 매우 활발하다네.”

“엥? 그것은 무예(武藝)를 익힐 적에 쓰는 말이 아닙니까?”

“뭔 상관이겠는가. 뭘 끌어다 쓰더라도 아우의 가려운 곳만 시원해지면 되지 않은가?”

“하긴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남파무술(南派武術)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가 있네. 쉼 없이 움직이거든. 취권(醉拳), 태극권(太極拳), 영춘권(詠春拳), 당랑권(螳螂拳)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겠네.”

“형님~! 이 아우는 무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좀 쉽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자연으로 설명을 해 줌세. 봄날이 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긴 잠에서 깨어나네.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샘솟게 되지. 이것이 목에 대한 소식이라네.”

“그건 훨씬 낫습니다. 하하~!”

“목의 기운에는 발경(發勁)의 성질이 가득하다네. 그래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나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이것이 목의 초식이라네. 하하~!”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목이로군요. 그렇다면 목과 나무는 연관이 없는 것입니까?”

“왜 연관이 없겠는가?”

“아니,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들려서 말이지요.”

“나무는 어떤 성질이 있는가?”

“그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는 성질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당연하지~!”

“그래서 목을 나무에 비유했던 것인가요?”

“또 있네. 나무는 웬만큼 자라면 성장을 멈추는가?”

“아니잖아요?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 나무잖습니까?”

“그렇다네. 물론 한 해만 살고 죽는 초본(草本)은 다르지만, 목본(木本)은 항상 끝없이 자라는 것에 그 본성이 있다고 하겠네.”

“아하~! 그래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의미를 나무에 비유했단 것인가요?”

“총명(聰明)하군.”

“총명이라니요? 그건 어린아이들에게나 사용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지금 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군. 하하~!”

“원래 목(木)은 나무가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하잖아요?”

“그것은 오해라네.”

“아마도 다른 뜻이 있나 보군요?”

“당연~!”

“그게 무엇입니까?”

“그 글자에서 도(道)가 보이는가?”

“도...라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역경에서 도란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야 일음일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역경을 배웠으면서 그 글자에서 도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애석하군. 공부를 머리로 한 것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했던가?”

“예? 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일음(一陰)을 배워도 일(一)은 모르고, 일양(一陽)을 배웠어도 곤(丨)은 모르니 헛공부를 했단 말이네. 쯧쯧~!”

“일... 곤... 하나와 뚫는 것... 이게 무슨 뜻입니까? 초식이 너무 어렵습니다. 손발이 꼬이고 머리는 쥐가 나게 생겼습니다.”

“일(一)은 아는가?”

“그야 하나 아닙니까?”

“그것도 맞지만 실망이네. 내가 그것을 물었겠는가?”

“아, 그렇겠습니다. 음……. 하나는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그래 그것을 아는 사람이 음은 모른단 말인가? 하나가 음이란 말이네. 모든 만물은 음으로 시작해서 양으로 거둔다네.”

“일(一)이 음이란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됩니다. 그러니까 문자(文字)로 보지 말고 뜻을 생각하라는 의미인 거지요?”

“때론 문자로도 보고 때론 도형(圖形)으로도 볼 줄을 알아야 공부를 좀 했다고 하겠지. 일(一)도 그런 의미에서 그림으로 보란 말이네.”

“그렇다면 뚫을 곤(丨)도 글자로 보지 말고 그림으로 봐야 하는군요. 그렇지만 뚫는다는 것도 양강(陽强)의 기운이 느껴지긴 합니다.”

“물론이네. 문자로 본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 다만 그림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지.”

“알겠습니다. 힘차게 하늘을 향해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글자로만 익혔지 그림으로 봐도 된다는 것은 오늘 또 처음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일음일양을 합쳐보게 그곳에 도가 보일 것이네.”

“합친다는 것은 일(一)과 곤(丨)을 합친다는 뜻입니까? 그럼 십(十)이 되지 않습니까? 설마 십이 도가 된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게 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의 소식이라네.”

“몰랐습니다. 그렇게 되는 뜻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혹자는 ‘음이 하나 지나면 또 양이 하나 오는 것이 도’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떡시루에 김빠지는 소리일 뿐이지. 긴장감이 하나도 없으니 시루의 떡이 익겠느냔 말이지.”

“그런데 여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는 것으로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걸요?”

“통쾌(痛快)한 맛이 없지 않은가? 십(十)은 완전함을 나타내는데 세상에서 완전한 것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것이겠는가? 도이겠는가?”

“아무래도 도가 아니고서는 완전하다고 하기 어렵지 싶습니다.”

“그리고 음(一)이 여자라고 해 보세. 양(丨)은 남자가 되겠지?”

“그렇겠습니다. 예전에 여인은 음이고 남자는 양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의 논리대로 한다면 여자가 지나가고 남자가 지나가는 것을 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것으로 무슨 변화가 생기겠는가?”

“아무런 일도 안 생기겠습니다. 그렇다면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아니지, 음이 지나고 양이 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란 이야기지.”

“그렇군요. 음양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불이 튀고 사랑이 생기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명료한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비유로 음양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 음양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네. 하하~!”

“그렇겠습니다. 남녀는 만나면 자손이 태어나니까요.”

“그것을 도라고 한다네.”

“예?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욕망으로 만나는 것이 도라는 것은 좀 억지로 꿰어 맞춘 감이 듭니다.”

“남녀가 만나서 자녀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신성(神聖)한 일인데 욕망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생각이라고 할 수가 없지.”

“그렇긴 합니다만, 왠지 거론하기가 좀 민망한 감도 없진 않습니다.”

“도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네.”

“그야 맞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요.”

“천지창조(天地創造)이래로 대대손손(代代孫孫)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를 행한 까닭이지 다른 것이 뭐겠는가?”

“이제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음, 아직도 반신반의(半信半疑)신가 보군.”

“그게 아니라... 남녀의 성욕(性慾)과 신성(神聖)이 연결된다는 것이 아무래도 좀…….”

“남녀가 성교(性交)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건 ‘얼레리꼴레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엉? 으하하하~! 아우가 낙안을 웃기는군. 하하~!”

“뭐, 다른 말이 있습니까?”

“‘십 한다.’고 하잖는가? 그런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가?”

“그런데 이 민망(憫惘)함은 왜입니까?”

“그것은 그대의 성교육(性敎育)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지.”

“교육은 무슨 교육입니까. 그냥 그렇게 듣는 것이지요.”

“얼마나 그것이 좋으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말투로 ‘씹한다.’라고 강한 발음을 하는가. 그것은 무척 좋은 것이기 때문이고, 모든 전쟁도 그 순간에는 멈추는 것이니 이보다 더 황홀(恍惚)한 도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에구, 이상한 말씀만 자꾸 하십니다. 그런데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과연 그렇게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왜 욕을 하는 것으로 사용을 하는 것일까요?”

“말장난이라는 거지. 혀는 칼과 같은데 그렇게 장난을 하면 애먼 사람이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지? 하하~!”

“맞습니다. 하하~!”

“자, 아우의 부끄러움을 좀 덜어주려고 한 이야기일 뿐이고, 다시 목(木)으로 돌아가세. 이제는 도가 보이는가?”

“당연합니다. 목(木)의 십(十)은 도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시지요?”

“맞았네. 모르면 쥐여줘도 모르는 것이고, 알게 되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보이는 것이 도라네. 그래서 고인의 가르침에 도를 만나는 것은 낯을 씻다가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쉽다잖은가.”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하~!”

“아직도 도는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보군.”

“여하튼 열심히 공부해 볼랍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지. 목(木)의 글자에서 도(十)를 빼고 나면 남는 인(人)으로도 보이고, 별(丿)과 이(乁)로도 보이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도는 사람에게 있다? 그런 뜻일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뜻일 리가 있겠는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줄은 압니다만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서 그냥 둘러다 붙여 봤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려 주시지요.”

“목(木)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 말이 기억나나?”

“당연하지요. 아무리 머리가 아둔해도 그건 기억이 납니다.”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야 양육하고 가르쳐야 하니 부모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丿)와 어머니(乀)라고 봐야 하겠다는 이야기라네. 사람은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

“오호~! 감동입니다. 이제야 목(木)이라는 글자를 제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여태 뭘 배웠나 싶습니다. 아직도 더 배울 것이 남지나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제 시작이네.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해서 목(木)을 배우게 될 것이고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생각이 될 것이네. 하하~!”

낙안의 웃음소리에 우창도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부라는 것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것이며, 낙안의 지혜는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바심을 내지 말게나. 하다가 보면 자연 도달하게 된다네.”

낙안이 우창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의 말을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