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제4장 술수종횡/ 2. 희마를 경계하라

작성일
2017-01-04 15:15
조회
1898

[030] 제4장 술수종횡(術數縱橫) 


2. 희마(喜魔)를 경계하라 


========================

하루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백발이 불쑥 찾아왔다. 그 사이에 형학의 기초에 대해서 자리를 잡았다면서 자랑을 하러 찾아온 셈이기도 하다.

“우창 선생 덕분에 나날이 삶의 맛이 짜릿짜릿합니다. 학문의 세계가 이렇게 맛있는 것인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날마다 감사의 마음이 넘쳐납니다.”

“그야 백발 선생이 노력을 하신 결과지요.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한 중생에게 바른길을 열어 주는 공덕이 얼마나 무량(無量)한 것인지를 몸소 느끼고 있지요. 이 백발도 학문의 인연이 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반드시 성심을 다해서 안내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스승님의 은혜에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갚는 것이려니 합니다.”

“그나저나 공부하신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뭘 배우셨는지요?”

“배운 것이야 너무 많아서 어찌 한마디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서 그 속에 깃든 의미를 알아낼 수가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것참 재미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보시지요. 언변(言辯)이 좋으셔서 무슨 말이라도 바로 활용을 하지 싶습니다. 하하하~”

“특히 관상술(觀相術)의 묘미에 푹 빠졌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말이지요.”

그 말을 듣자 우창은 옛날 장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줄을 알 때가 되어야 비로소 입문(入門)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해가 됩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것이 신기하지만 공부가 더 깊어지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겠던데요. 아직 그러한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까닭이겠습니다. 하하~”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은 이목구비(耳目口鼻)에 대해서 공부하고 계시겠군요?”

“맞습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의 모습에 따라서 그 속에 들어있는 의지가 어떠한지를 읽어내는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단계가 가장 재미있을 단계입니다. 그중에서도 눈의 공부가 가장 어렵지요?”

“우창 선생은 이미 다 공부를 하신 나머지셨군요. 그러니 그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를 들으실 수가 있겠습니다. 전혀 신기할 것이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오늘 문득 제 자신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게 모두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또 머지않아서 좌절의 단계도 찾아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그런 단계를 겪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것도 미리 알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공부도 바다의 파도나 하늘의 구름과 같지요. 맑은 날이 있으면 또 흐린 날도 있고, 잔잔한 바다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순간에 거센 파랑(波浪)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처음에 공부하는 초보자는 맑은 날만 생각하고 공부하다가 문득 흐린 날을 만나면 비명을 지르고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나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다 겪고 나면 비로소 맑은 날에는 빨래하고, 흐린 날은 낮잠을 자면 된다는 이치를 깨닫지요.”

“아하~!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다. 이러다가 또 좌절감으로 하산이라도 할 궁리를 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앞서시는 거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만, 학마(學魔)에는 희마(喜魔)도 있고 비마(悲魔)도 있습니다. 물론 애마(哀魔)도 있고 낙마(樂魔)도 있지요. 그래서 희비애락(喜悲哀樂)이 모두 공부에 장애(障碍)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사부님께 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 경지까지도 얼른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다 겪고 나야 우창 선생처럼 되나 봅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담담한 표정을 지으시니 분명 도를 깨달은 신선처럼 느껴진단 말이지요.”

“우창은 아직 멀었습니다만, 학문의 세계나 수도(修道)의 세계나 그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환희용약(歡喜踊躍)으로 기뻐서 펄펄 뛰다가도 또 그 단계가 지나면 한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는 일락천장(一落千丈)의 고통도 맛보게 되거든요.”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이미 스스로 다 겪어보셨네요. 학문의 길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정말 사부님이라고 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그 말이 튀어나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그 한결같은 심지(心志)로 대성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시리라는 것을 믿어도 되겠습니다.”

“아마도 경험하신 이야기가 있으시겠는데 그 이야기 좀 들려주시면 미리 예방 침을 한 대 맞은 양으로 하겠습니다.”

“그게 뭐 그리 자랑할 일이라고 떠벌리겠습니까. 그냥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감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특히 힘든 것은 슬픔의 마장인 애마(哀魔)가 찾아왔을 때입니다. ‘이 공부를 해서 뭘 하나?’ ‘이렇게 해봐야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세상의 무엇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면 공부는 해서 뭐할 것인가?’싶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적에는 모든 의욕이 좌절되고 앞이 캄캄해지거든요. 저는 이러한 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가 된다면 아마도 우울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공부하는데도 그러한 과정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극복을 하셨습니까?”

“처음에는 무력한 인간이라서 남들처럼 검법을 익혀서 권선징악을 할 용기도 없고, 경서(經書)를 배워서 왕이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도록 보필을 할 배짱도 없어서 이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점술 나부랭이나 익히고 있는 꼴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 자신이 너무 한심했지요.”

“옛?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높은 지식과 깊은 지혜를 갖추신 분이 그런 갈등도 겪으셨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백발에게 그러한 고통의 시험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극복을 할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짊어지기 버거울 만큼의 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삶에 녹여내느냐는 것이 항상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는 것은 열정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백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가 지나고 나면 땅이 더욱 굳어집니다. 정말 값진 공부를 전해 주셔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보다 든든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미리 겪을 이야기를 들었네요. 앞으로 그러한 장애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시면 다행이지요. 하하~”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즐거울락(樂)의 마장입니다. 아니, 즐거운 것도 마장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 한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우창은 빙그레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백발의 모습이 너무도 천진하고 순수하였던 까닭이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낙마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만.”

“예? 제가 언제 낙마(樂魔)에 떨어졌었나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요?”

“예전에 백발도사 시절을 생각해 보시지요. 저를 만나기 전까지의 순간들이 얼마나 즐거우셨습니까?”

“아, 그 시절이야 참으로 신명이 났었지요. 심지어 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즐거움의 마장인 것입니다. 그 재미에 빠지면 이제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학문 그릇은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거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애마보다 낙마가 더 무섭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말을 듣던 백발은 화들짝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과연 그렇게 평생을 살아갔다면 어쩔 뻔했느냐는 생각에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 같은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명료하게 그 의미를 알겠습니다. 희로애락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려니 생각만 했지 공부에서도 장애가 되어서 방해를 할 것이라고는 오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그것을 깨닫는데 또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찾아뵙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하하~ 원래 전배(前輩)가 후배(後輩)를 안내하고 이끄는 것이 학문의 세계에서는 다반사인걸요. 너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오히려 미안해지잖습니까. 하하~”

“약간의 공부로 아주 작은 것을 얻어서 이렇게 좋아하는 저의 모습을 보시면서 속으로 얼마나 우스우셨을 지를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경험담을 실어서 깨우침을 주시니 세상에 이런 스승님은 없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게 다 공부하는 재미라고 봅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 길고도 험한 학문의 길을 어찌 갈 수가 있겠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우창 스승님의 가르침이면 모든 번뇌의 구름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과연 백발선생의 지식에 대한 흡수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십니다. 그대로 열심히 정진하시면 천하의 이치를 모두 한 줄에 꿰뚫을 것이 틀림없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부디 그러한 날에 이 우창에게도 한 수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에구, 무슨 말씀을요. 맨발로 전력으로 뛰어가도 우창 스승님을 따라잡기는 요원(遙遠)할 뿐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분발하여 정진하겠습니다. 내내 보중(保重)하시기만 바랍니다.”

그렇게 백발이 돌아간 다음에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그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등불이 되어서 안내를 할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저절로 우러나서 스승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었기도 했다. 물론 더욱더 정진해서 낙안의 지혜에 조금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이 봄날의 안개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