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 파동(波動)과 입자(粒子)

작성일
2014-12-30 11:44
조회
4145

[659] 파동(波動)과 입자(粒子)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며칠 꾸리무리하던 날씨가 오늘은 화창하네요. 비록 겨울이라도 이렇게 햇살이 화창하면 잠시나마 대지는 따뜻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말인데 잘 지내고 계시지요? 그나마 방송에서 연말시상식들을 한다고 시끌시끌해서 그런가보다.... 하지 실제로 계룡산은 언제나 그렇듯이 항상 고요~ 합니다.

 

1. 파동과 입자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에....


빛은 파동이라고 했다가, 또 입자라고 했다가 결국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고도 했다가.... 물리학의 이야기들은 항상 그렇게 오락가락하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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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멋진 이야기를 들었... 아니 읽었습니다. (동영상이지만 영어라 말은 안 들리고 자막만 보여서..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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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맞어~~!!"라는 생각이 가슴을 치네요. 여하튼 오늘의 한 수는 이것이라고 생각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얼른 기억 속에 있던 것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두려고 서둘러서 '낭월한담 659번'을 입력하고는 다시 동영상을 보러 갑니다. 참고로 그 동영상은 심심풀이 게시판의 558번인 「(1)양자물리학으로 본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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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인즉, 생각이 미치지 않으면, 즉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이고 의식을 하게 되면, 그러니까 관찰을 하게 되면 입자랍니다. 관찰이란 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믿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철학자는 생각하고, 과학자는 관찰한다고 하면 앞뒤가 맞으려나요? 여하튼 멋진 말이잖아요? 흡사 도인들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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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는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모델로 물에게 마음을 넣은 사진을 지하철역사에서 전시하는 군요. 물에게조차도 마음이 전달된다면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는 액체에도 당연히 그 마음은 전달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 우리가 어떤 의식을 투입하느냐에 따라서 몸은 또 그에 맞게 반응하고 변화해 갈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다.

파동이 물결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감싸고 흐르다가 또 낙엽을 만나면 낙엽을 날리면서 흘러갑니다. 문득 포레스토 검프가 생각나네요. 깃털 하나가 바람에 날아다니잖아요. 그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음이 그렇게 날아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2. 나는.....?


문득 그 의식이 나라는 육신에 머무르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의식 하나가 날아가다가 고깃덩이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의식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해 갑니다. 누구는 철학자로, 누구는 과학자로, 그리고 누구는 노동자로 말이지요. 그리고 이 의식은 항상 다시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몸이 못쓰게 된다면 또 그렇게 포레스토 검프의 깃털처럼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겠네요. 그리고 그 깃털에는 또 하나의 경험에 대한 의식이 덧붙여 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왕왕 말들을 합니다. "난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이해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만들어 주는 것 중에 하나인가 싶기도 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간격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늘 말하지요. 그러면서도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10만8천리의 간격이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서 30년을 해메고 다니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말이지요.

그 의식이 뭐길래 똑 같은 현실임에도 하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의미가 없다는 말조차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느 조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사람들은 부탄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인 환경은 그렇지 못함에도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아무런 생각이 없을 것같은 물을 향해서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얼음의 결정체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혹자는 이모토 박사의 발표에 대한 것조차도 조작했다는 말도 합니다만 낭월은 그 실험에 대해서 무척이나 공감을 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것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물론 이모토 박사가 대단해서 그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결과가 자연적인 이치로 봤을 적에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벗님의 몸에게 말을 해 보세요. "내 몸의 액체야 난 너를 믿어." 아마도 액체는 더욱더 활기차게 몸을 감돌게 될 것이고, 웬만한 콜레스테롤이나 혈관 벽의 찌꺼기들은 모두 쓸어낼 것입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고 해야 하겠군요. 그렇다면, 반대로 "내 몸의 피도 난 못믿어 내일 무슨 병에 걸릴지 알어?" 이렇게 의식을 집어넣는다면.... 아마도 내 몸에게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은 결국 병든 몸으로 보상을 해 줄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겠지요?

 

3. 방문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낭월이 갖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이 마주한 방문자에게도 당연히 전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문자는 낭월의 생각이 언어로 바뀌어서 입을 나온 다음에 파동이 되어서 그의 귀로 들어간 다음에는 입자로 변해서 귓속을 진동시키겠지요. 그리고 어떤 의식인가에 따라서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고 절망의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감이 되기 위해서는 송수신기의 주파수를 93.1메가헤르츠로 맞춰놔야만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낭월은 마음의 길을 말하고 있는데 방문자는 물질의 길을 듣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먼 길을 달려서 조언을 들으러 온 의미가 희석되거나 헛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의식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해서 항상 좋은 말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식이 방심하게 해서 운명의 암시대로 현혹되는 일은 최대한 막아 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따끔한 경고성 메시지도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근저에 흐르고 있는 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면서, 인술(仁術)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기술(技術)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술의 결과는 보람으로 남을 것이지만 기술의 결과는 수익으로 남게 되겠네요. 그리고 그러한 것이 쌓여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문득 데까르트가 틀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론인가요? 그러나 어쩌나요. 양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존재라는 것도 의미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니 말이지요. 그래서 '무의식(無意識)'이라고 했으니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반야심경은 참으로 절절한 깨달음으로 가는 진리의 배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뭘 새삼스럽게~~~)

존재......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래서 상처도 받고 말이지요. 그런 사람에게 이러한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도 합니다. 의식을 안에다 두지 못하고 밖에다 두는 바람에 그런 갈등과 상처가 발생하는 것일테니 말이지요.

어느 여류작가가 자신에 대해서 악플을 달았다고 고소를 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물론 그러한 글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의식조차도 없는 경지가 된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사실 고소를 한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지요. 오히려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니 그것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그 보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갈구면 같아진다'는 고인의 말씀이 또 떠오릅니다.

 

4. 새해가 되면 자신의 운을 물어보곤 하지요.


이제 올해도 하루 남았습니다. 그야말로 이틀만 지나고 나면 온통 새해라고 시끌시끌하겠네요. 벌써 푸른양이 어떻다고 이야기가 나오곤 하지요? 을미년(乙未年)의 간지를 그렇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는가 보네요.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모두 허상이겠구먼요. 푸른 말이든 푸른 양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지요. 오로지 새해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목적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을 뿐이지요. 벗님의 내년 신수는 좋으신가요? 아직 안 보셨다고요? 예 보지 마세요. 하하~

한 해의 길흉에 대한 암시가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있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늘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작만 하라고 하지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일희일비하는가 싶습니다. 종종 방문자에게 말을 합니다. 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요. 하나는 공부의 운, 그리고 또 하나는 활용의 운이지요. 그 외의 운은 없습니다.

그럼 다시 묻고 싶을 수도 있겠네요. 무슨 소리여, 길운과 흉운이 있잖여~! 그렇게 말은 합니다만 실은 흉운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공부를 할 운이 존재할 뿐이지요. 그런데 왜 공부할 운이 흉운이 되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공부를 해야 할 운에서 활용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조개를 캐는 바닷가의 여인은 밀물이 되면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 할 운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다시 썰물이 나면 자신이 활동을 해야 할 운이라는 알고는 바구니를 챙겨서 갯가로 나가지요.

그렇다면 흉운이란 어떤 의미가 될까요? 밀물이 시작되었는데 그냥 버티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썰물이 났는데도 조개를 캐러 가지 않는다면 활용의 운이 와도 활동하지 않는 것이니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공부의 운에 무리하여 활용하려고, 그러니까 더 큰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 안달복달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같이 조개를 캐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혼자서 더 많은 조개를 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오늘 문득 이 한편의 유튜브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새해의 신수까지도 생각이 거슬러 갔군요. 너무 멀리 갔습니다. 하하~

결국은 존재하지도 않는 의식으로 인해서 희노애락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준이 된다면 그 이상의 행과 불행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벗님은 오늘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지요? 아니면 자신은 진작에 잊어버리고 세상만 바라보고 계실랑가요? 나 자신도 허상이라고 하는 의식수준이라면 내 밖의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텐데 말이지요.

 

5. 양자물리학은 가능성의 물리학


이야기가 다 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정리가 되네요. 나 자신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이며 내가 하고 있는 지금의 한 생각은 지구와 우주의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득 의상대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刧)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한생각이 곧 한없이 긴세월이고
한없이 오랜 시간도 또한 한 생각.


오늘의 한 생각이 나이고, 어제의 생각이 이어져 온 것인가 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오로지 내가 다 만든 것이니 자작자수(自作自受)네요. 이렇게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양자물리학의 이치를 통해서 다시 우주론으로 여행을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오늘 생각하는 것이 내일의 나라는 것도 틀림 없지 싶네요. 부디 멋진 자신을 만들어서 내일 다시 만나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보실 것 같네요. 모쪼록 알찬 순간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14년 12월 3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