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 조화원약의 서문 소개

작성일
2012-04-06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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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2화] 조화원약의 서문 소개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화창한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용신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가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글과 연관이 있어보이는 참고자료를 찾아보기 위해서 조화원약의 서문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개를 해 드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경우에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화원약평주(造化元鑰評註)는 서낙오 선생이 평주를 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 위천리 선생이 서문을 쓰셨군요. 위천리 선생의 서문에서 눈에 띄는 것이 이 책의 뛰어난 점과 아쉬운 점에 대해서 언급을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천리 선생의 서문


  - 네 가지의 장점에 대해서


1. 팔자의 오행을 의지하여 생극제화와 형충회합으로만 풀어냈고 그 외에 잡다한 견해는 보이지 않으며 모호함이 없이 풀이를 한 점.


2. '월령에서 용신을 취하여 귀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인데 12개월별로 10간을 대입하여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마음이 편안하게 살펴 볼 수가 있는 점.


3. 명조의 실험적으로 실제 사례를 열거하면서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헛된 말들이 보이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여 독자는 마음 놓고 연구를 할 수 있겠다는 점.


4. 서낙오 선생은 근대의 명리학계에 큰 선생이니, 읽은 책도 엄청난 실력자로써 평주를 쓰면서도 예증을 실어서 설명을 하였으니 진실로 화룡점정이라고 할만 하겠다는 점.


 


 - 네 가지의 단점에 대해서


 1. 원서의 글을 쓴 사람이 문필적인 능력이 많이 부족하여 내용의 뜻이 다 전달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는 점.


2. 서낙오 선생의 학문이 비록 깊고도 넓은 것은 틀림없으나 다만 평주를 하면서 간간이 강제로 끌어다가 붙인 견강부회가 보이니 이러한 것은 원래의 제목에서 벗어난 듯 한 느낌이 있다는 점.


3. 문서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필사본이다 보니까 틀린 글자들이 수없이 많은 점
(이 서낙오 선생의 원고와 같은 계통의 문서를 민국38(1949)년 가을 무렵에는 정부에서도 이와 같은 계통의 서적은 금서에 속하였던지라 동호인들끼리 암암리에 철필로 긁고 등사기로 밀어서 몇 권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엉겁결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까 틀린 곳은 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됨).


4. 이 유인본(油印本-유인본이라는 글의 뜻은 등사본으로 짐작이 되는 낭월)은 내가 1957년에 상하이의 이우전(李雨田) 선생에게서 빌려 본 것인데, 이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교정을 하고 추가로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였는데, 처음에는 뒤죽박죽이어서 읽어도 뜻을 알기 어려웠으나 두세 번의 교정을 거치면서 다시 전체를 살펴보니 아마도 해(亥)가 시(豕)로 변하고, 노(魯)가 어(魚)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다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점.


  이렇게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화원약에 대한 소감을 적어놓은 것을 보면서 본래의 뜻이 과연 제대로 전해졌을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스럽다는 의미로 서문을 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화원약서문으로 서낙오 선생이 쓴 글이 있는데 나름대로 이 책의 내력을 밝힌 것이 아닌가 싶어서 간략히 요약해서 풀어보겠습니다. 물론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전체를 다 풀어보는 것은 관심이 있으신 벗님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2. 서낙오 선생의 서문


  ..... 명리학의 서적 중에서는 그 짝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론을 담고 있는 책으로 난강망이 있는데 돌이켜 생각을 해 보면, 처음에 술자(術者)의 손에서 나올 적에는 뜻이 정밀하고 이치가 심오했을 것이지만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사이에 베껴지면서 달라지게 된 곳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500여년이 흐르면서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니 깊은 뜻을 아는 사람이 매우 희소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도리어 연해자평이나 삼명통회만큼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난강망(欄江網)은 명대(明代)에 이름없는 사람이 쓴 것인데 청(淸)의 초기에 강희황제 시절에 어느 천문학자의 직함을 갖고 있는 관리에게 들어갔고, 그 사람이 이름을 바꿔서 조화원약이라고 했다는 것이 서문에 보인다.


  그렇게 해서 청말(淸末) 도광 무렵에 초남(楚南) 여춘대(余春臺)의 손으로 들어간 다음에 다시 궁통보감(窮通寶鑑)으로 되면서 비로소 인쇄가 된 것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책이 된 것이다.


  내가 궁통보감평주를 쓸 적에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뭔가 이상하게도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더 잘 된 책을 구할 수도 없었기에 조금 의심은 되었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의 소개로 옛날의 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진주오씨가 갖고 있던 초본(抄本-손으로 배낀 책)을 입수하여 두 책을 놓고 비교해 보니까 한 글자가 달라짐으로 해서 뜻이 또 판이하게 변하였고 수백 사람의 사주도 함께 있었는데 일관(日官-앞에 언급한 천문학자)이 주를 추가한 것이었다.


  다시 몇 년을 연구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것에 대해서도 깨달아서 알게 되었으며 익히는 사이에 비로소 주변의 사람들의 사주와 상황들에 대해서도 임상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 원고에 평주를 넣어서 조화원약평주라고 이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판을 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정리를 해 봅니다. 내용에서 원고의 내력을 최대한 밝혀보려고 애를 쓴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한 것 같네요. 그래서 새삼 고인의 노력을 다시 느껴봅니다.


3. 또 하나의 참고 자료


  이렇게 조화원약과 연관되어서 나온 책이 난강망으로 시작해서 조화원약으로 변했다가 다시 궁통보감이 된 사연을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역학의 애호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게 되어서 결국은 같은 책의 다른 모양이 되었다는 것도 미뤄서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대만에서 들어온 책이 하나 있었는데, 제목이 '용신경사관(用神經史觀'이라고 되어 있었고 지은이는 양상윤 선생이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까 에전에 용신경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부분적으로나마 삼명통회에 삽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있었네요.


 


       


  그리고 관심을 끄는 대목이 바로 난강망과 조화원약과 궁통보감에 대한 자료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었습니다. 내용 중에 한 부분을 살펴보니까 양상윤 선생이 80세까지는 세 가지의 책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80이 넘어서야 서로 다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글이 보입니다. 이러한 것을 참고해 보면 두 선생 중에서 한 분은 착오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서로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게 후학들이 약간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애쓴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자료들로 인해서 또 학문은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조화원약의 서문을 보면서 약간의 설명을 해 드리는 중에도 또 잘못 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냥 참고만 하시라는 말씀으로 얼버무리고 달아나려고 하는 낭월입니다. 하하~


            2012년 4월 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