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과학과 철학사이

작성일
2011-04-0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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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과학(科學)과 철학(哲學)사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날씨가 궂습니다. 계룡산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오늘의 비는 좀 찝찝한 비라지요? 그래서인지 다른 봄날의 비와는 느낌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아침에 차를 한 잔 마시다가 문득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모두는 삶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추구하는 방향이 좀 다른 것 같아서 생각을 해 볼 점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이것은 낭월이 바라보는 세계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요.




1. 과학은 발명(發明)이고, 철학은 발견(發見)이다.




아시다시피, 발명은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나침반이나 온도계와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발견은 원래 있던 것을 찾아내는 것이니까 윤회(輪回)나 순환(循環)과 같은 자연법칙(自然法則)을 이해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발견은 자연이 만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발명은 기존의 있는 것을 응용(應用)해서 새로운 창조(創造)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생각을 도와주는 도구(道具)가 되고, 과학은 생활을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고 이해를 해도 될 것 같네요.




저마다 갖고 있는 생각들은 철학이 되고, 제각기 갖고 있는 용품들은 과학이 되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그 역할이 어느 정도는 구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철학은 정신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기술이 된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2. 철학(哲學)의 희비애락(喜悲哀樂)




낭월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과학자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철학자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뭔가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뭘 만들어내기 보다는 있는 것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철학자라고 해야 할 모양입니다. 20여년을 궁리하고 연구한 모든 내용들은 결국 자연의 순환법칙을 이해하고 인간의 심성이 그 속에서 어떻게 발현(發顯)되는 것인지를 궁리한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보면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대략은 짐작이 될 것도 같습니다.




철학의 기쁨은 새로운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가 되겠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이 뭔가 미흡하여 계속 추구하여 나가다가 문득 새로운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적에 갑갑하던 시야가 트이면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하면 이미 알고 있는 평범성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는 마음이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과학자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었을 적에 갖는 창조의 기쁨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슬픔도 있습니다. 아무리 궁구해도 답을 얻을 수가 없을 경우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이것을 찾아서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의식이 돌아오게 되면, 양파의 씨앗을 찾아서 계속 껍질을 벗기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싶어서 허탈해 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왜 어려운 공부를 시작해서 이렇게도 고뇌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간이 몇 달간이라도 계속된다면 철학공부는 집어치우게 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천만다행(千萬多幸)히도, 몇 시간을 그렇게 생각하다가 보면 다시 또, ‘이렇게 슬퍼하고 애달파하는 존재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는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 싶기도 하지요. 여태 그렇게 살아온 것을 보면서 미뤄서 짐작하건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은 능히 헤아리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3. 과학(科學)의 희비애락




과학의 기쁨은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을 때가 되겠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을 적에도 그랬을 것이고,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었을 적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을 해 봅니다. 지금도 물질과학에서는 항상 남보다 먼저 최첨단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에 쫓기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애플에서 아이패드2를 발표하였다지요. 그로 인해서 삼성에서는 갤럭시탭2를 만드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네요.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게 되었을 적에 얻어지는 기쁨은 이렇게 소비자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대가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쁨만 있으면 좋으련만 또 그 이면에는 그만큼의 슬픔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광산작업을 돕기 위해서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 용도로 사용된 것을 보고 발명한 과학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사실 음양법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그랬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세상만물은 음양법이어서(물론 철학자의 생각이군요) 양면성이 반드시 존재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과학자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그뿐인가요? 지구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 쓰레기는 모두 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이것도 되돌아본다면 분명히 과학의 슬픔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요즘 같아서는 핵을 발명한 사람이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해 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도 유용하다던 핵의 어두운 부분을 이제 와서야 실감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관련분야의 지식분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더군요. 핵발전소의 미래가 얼마나 암울하고 비극적이 될 것인지를 말이지요. 그래서 이미 20년도 더 이전에 여기에 대해서 경종(警鍾)을 울린 일본의 히로시 다카세 씨는 <위험한 이야기>라는 저서를 통해서 앞으로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경고를 했다는데 지금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것들이 과학의 비애(悲哀)라고 하겠습니다.




살인한 사람 옆에 있으면 도둑은 오히려 착해 보인다고 하던가요? 농약이니 방부제니 하던 이야기들이 지금은 오히려 귀여운 푸념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절대적으로 좋기만 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음양학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통치자는 자신들의 부귀영달을 위해서 짐짓 감춰버리고 좋은 이야기만 강조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눈치를 채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놓고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면 그 이면에는 그 사람이 얻어야 할 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이지요. 여하튼 과학의 희비애락은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과철(科哲)의 불이법(不二法)




다시 몇 발자국을 물러나서 생각을 해 봅니다. 실상 이 둘을 놓고 생각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구분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철학이고, 또 철학이 과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점점 몽롱해 지는 것이 마약에 취한 눈망울과 같습니다.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조각가의 이야기입니다.




“남들은 ‘만든다’고 말하지만, 나는 ‘찾는다’고 말합니다. 돌이나 나무를 앞에 놓고 명상에 잠기게 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가 자신을 꺼내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비로소 정이나 끌을 들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을 남들이 볼 적에는 조각을 하여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무나 돌 속에 들어있는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주변의 잡물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들었습니다만 가끔 여운을 남기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조각가는 발명가일까요? 아니면 발견자일까요? 옆에서 보기에는 분명히 뭔가를 만들어 내는 발명가처럼 보이는데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또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조각가도 처음에는 과학자였을 것입니다. 뭔가를 만들고는 자신의 능력이 신통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놀랍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도 우쭐하는 기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참으로 즐거웠을 것이고, 그래서 의기충천했겠지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조각을 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돌과 나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면 이미 제정신이라고 하기 어려울 모양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쪼고 깎는 사이에, 마침내 속에 들어있는 실체를 밖으로 꺼내 놓았을 적에 비로소 자신의 일이 끝났다고 할 것이고, 그 순간에 무엇을 발명했다는 생각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찾아내었으니 발견이라고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대단한 경지에서 노닐고 있는 예술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어찌 조각가만 그렇겠느냐는 생각의 확장으로 이어집니다. 도공도 그렇고, 로봇을 만드는 공학자도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순간에 그러한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을까요?




이 경계(境界)에서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발명과 발견이 둘로 나눌 수가 없는 어느 영역(領域)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지요. 낭월도 처음에는 과학적인 시각으로 간지(干支)에 접근을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답이 아니면 인정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객관적인 공식을 만들어서 신강신약(身强身弱)에 대해서 기준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십성이 갖고 있는 성분에 대해서도 함량을 저울질하려고 달려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그렇게 구분을 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 종종 들곤 합니다. 즉, 전에는 갑(甲)은 갑이고 을(乙)은 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갑이 을 같고 을이 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을이 신(辛)으로 보이기도 하고, 정(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눈병이 생기려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이 증세가 심해지게 되니까 이제는 사주(四柱)가 점(占)같고, 점이 사주같이도 보입니다. 이것이 조금 더 심해지면 용신(用神)이 기신(忌神)같고 기신이 용신같이 보이는 때도 오려나 싶기도 하네요.




5. 오늘의 풍경화




이 경계에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음이니 양이니 하고 나누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뜻한 전기장판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다면 핵먼지에 휩싸이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것은 이미 애초에 예고가 된 각본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낭월은 맘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음이 있으면 당연히 양이 있는 법이고 편리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위험한 것이 있었을 것이므로 행운만 좋아하고 불행을 싫어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라즈니쉬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행운의 신에게 기도를 하던 수행자가 있었다. 열심히 기도를 하여 감응이 있었던지 여신이 나타났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비로소 소원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까 그 옆에 또 한 사람의 여신이 서있는 것이었다. 그는 물었다. “그대는 뉘신가요?” 그 여신이 답했다. “나는 불행의 신이라네.”라고. 그 말을 듣고 수행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행운의 신을 불렀지 불행의 신을 불렀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여신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가 없다네, 우리 둘은 자매지간이거든, 그래서 항상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지. 자네가 행운의 신까지도 거부하거나 아니면 나까지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네.”라고.’




참으로 의미심장한 비유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한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과학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다만 그것이 조금 빨리 다가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득한 과거에 지구에 대폭발이 있었지만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별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겨우 옷을 바꿔 입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은 3일을 입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하루만 입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갈아입지요. 때로는 1시간을 입었다가 벗기도 하네요. 예복 같은 것은 말이지요. 고인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알알이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걱정스럽다가도 고인의 지혜를 바라보면서 편안해짐을 느끼게 되네요. 그리고 늘 말씀하시잖아요. 나 이외의 아무 것도 믿지 말라고 말이지요. 누구는 거짓말을 하고, 누구는 속이고, 누구는 우롱한다고 아무리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삼계화택(三界火宅)이니라’입니다. 세상은 온통 불타는 집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그 안에서 허둥거리지 말고 얼른 빠져나오라는 이야기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글거리는 유황불은 보지 못하고서 밖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웅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다시 밖을 바라보니 어느 사이에 근심의 빗물이 아니라 포근한 봄비로 변했습니다. 자연을 찬미하면서 오늘의 자유로움을 노래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늘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고인께서도 말씀하시잖아요. ‘일일청한일일선(一日淸閑一日仙)’이라고 말이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혜로운 철학의 세계에서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아득한 옛적부터 오늘까지 해 온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시 스피노자의 말을 생각하고, 서산대사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 이니라’의 메시지가 이 고인(高人)들의 생각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말씀을 남길 당시의 상황도 아마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겠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하셨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으로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누린 만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철학의 힘이겠지요?




원래 철학과 과학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경계선이 없어진 가운데에 자신의 생각이 또렷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보고 있는 아침입니다. 그러니 벗님께서도 부유(富裕)만 꿈꿀 것이 아니라 빈곤(貧困)치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시고, 지혜로운 하루를 누릴 수가 있음에 행복해 하신다면 또한 철학자의 길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약에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다면 축하드릴 일이니 오늘 하루도 즐거우실 것입니다.




          2011년 4월 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