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 이(理)와 기(氣)의 이해

작성일
2010-11-24 19:17
조회
6161

 


[제497화]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포탄이, 아닌 대낮에 뜬금없이 날아다니는 이 시대를 용하게도 잘 살아가고 있는 것도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명에 운명을 달리 한 군인들의 명복을 빌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평화로운 가운데 혼란스러운 나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모쪼록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그래야 명리학도 즐기고 자연도 즐기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나무이미타불~!


오늘은 좀 철학자 다운 폼새를 잡아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기론에 대해서 뭔가 생각을 해 봤다 이거지요. 참 간지럽습니다만, 그래도 지나는 길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보는 것이니까 함께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 같아서 간단히 정리를 해 봅니다. 어줍잖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1. 이(理)


이(理)자를 뜯어놓고 관찰해보면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맨 처음에는 임금왕(王)과 밭전(田)과 흙토(土)가 함께 있는 글자로 분해를 해 봅니다. 임금왕도 또 분해를 하면 위아래에 한일(一)과 가운데에 완벽을 의미하는 열(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글자에는 낭월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글자들로 온통 만들어져 있어서 잠시 넋을 놓고 글자를 뜯어보고 있었습니다. 밭전자는 또 어떤가요? 큰 입구(口) 안에 또 완전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열십(十)이 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흙토(土)도 알고 보면 땅을 의미하는 일(一)위에 완전한 음양의 조화인 십(十)이 있지요?


"하~ 그렇게 보니 과연 그런 걸~! 정말 일없는 낭월의 글자풀이는 가끔 꽤 읽을만 하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셨다면 이미 낚이신 겁니다. 이제 함께 글자의 분석과 의미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잠시 현실을 떠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물론 재미가 없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뭐..... 할 수 없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좋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글자 하나에 이렇게 예사로워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름대로 그럴싸한 뜻이 나올 것도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학자(理學者)잖아요? 물론 명리학자이니까 말이지요. 그러니 이 글자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앞의 임금왕에 있는 十은 이 글자가 원리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위의 一은 하늘이고, 아래의 一은 땅이니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한 것을 논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왕변의 한자에는 이러한 뜻이 있다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가령 주(珠)도 그렇지요. 참고로 낭월은 이름자에 모두 완전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글자를 모두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朴珠鉉, 어떠세요? 보이시지요? ㅎㅎ


여하튼 완전함에 대해서 논하는 글자인데 그것을 오른쪽의 모양으로 짐작을 해보면, 田은 입이 넷이 모여서 이뤄진 글자입니다. 입이 넷이 되어있는 글자는 그릇기(器)가 있기는 하네요. 그릇기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입이 되므로 제각기 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입은 크다고 하고, 어떤 입은 적다고 하고, 또 어떤 입은 맛있다고 하고, 또 다른 입은 맛없다고 할 모양이군요. 아마도 가운데 있는 큰 그릇을 놓고 서로 맛을 보면서 이구이언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田자는 입은 넷이지만 서로 같은 소리를 낸다는 뜻에서 모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구동성이 되는 셈이군요. 서로 입은 다르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당연히 진리가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또 제각기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말이 되나요?


'공감(共感)'라고 하잖아요. 서로 함께 느끼는 것이니 그것을 말로 하더라도 같은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학자도 같은 말을 하고, 한국의 학자도 같은 말을 하고, 호주의 학자도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거의 참다운 진리에 접근했다고 해도 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왜 입이 넷일까요? 셋이 아니고 말이지요. 그것도 생각해 봅니다. 생각은 많이 할수록 좋거든요. 물론 말이 되는 생각일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입이 셋이 모이면 다수결로 판정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세 입이 모여있는 글자도 있기는 하지요. 품(品)자 말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글자는 품질의 등급을 가리는 듯한 의미가 그 속에 있어서 속물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급을 생각한다는 것은 뭔가 사념적인 냄새가 나거든요. 그렇지만 네 입이 서로 같은 소리를 내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田의 의미는 더욱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욱 이 네 개의 입이 돋보이는 것은 그들이 모두 土라고 하는 음양의 균형을 바탕에 깔고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은 자연의 이치가 중화를 이루고 있는 토의 상태에서 네 입이 한 가지로 통일이 된 이야기를 하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지요. 원래 낭월의 허풍이 매미급 태풍보다 조금 못하다는 설이 있기는 합니다만 하하~


그러니까 결론은 理에는 이치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같은 결과를 말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를 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 한 글자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동서고금의 많은 학자님들이 필생의 힘을 기울여서 정진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께 항상 공경심과 경외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다만 움직임에 대한 의미는 생각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긴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듯한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입을 빌려서 설명을 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태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고요하고 적정한 가운데에서 자연의 순수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것을 理라고 생각해 놓고서 기(氣)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기(氣)


氣의 글자도 크게 보면 두 개의 글자가 모여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기(气)이고, 또 하나는 미(米)입니다. 기(气)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풀이가 나오네요. 네이버사전입니다.


기운기, 보낼희, 빌 걸







㉠기운(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관()으로 느껴지는 현상)(=) ㉡기백() ㉢기세(: 기운차게 뻗치는 형세)

气와 氣는 같은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중국어에서는 간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감각기관에서 느껴지는 현상'이라고 하는 부분이 되겠네요. 앞의 理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고 그냥 존재하는 것을 알 수만 있는데 氣는 뭔가 민감한 사람은 감지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그 차이를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다.


속에 들어있는 쌀미(米)를 살펴보면 또 뭔가 보이지요? 예, 바로 그것입니다. 어김없이 십(十)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군요. 그런데 뭔가 붙어있는 것은 또 뭐래요? 아마도 본래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음양에 군더더기가 붙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점차 물질화로 변해가면서 어떤 형태를 가진 것들이 진리의 중심에서 시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즉, 음양의 조화에서 에너지가 생기면서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확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없이 본연의 이치가 존재하는 理에서 움직임이 일어나서 구체적인 물질을 나타내고 있는 전조를 띠고 있는 氣의 단계가 뭔가 의미심장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이와 기를 이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둘을 모아보면 또 뭔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3. 이기(理氣)의 음양관법


적천수에 나오지요. '이승기행(理承氣行)'말입니다. '이치를 타고 기가 돌아다닌다'고 해석을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와 기는 음양론으로 본다면 동정론(動靜論)으로 대입이 가능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정하고 기는 동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관찰을 하다가 보니까 또 다른 용어가 그 자리에서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것은 바로 '불이(不二)'라는 말입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으실까요?


'불이'라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것은 하나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오행학자는 간단하게 음양의 조화라고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겠네요. 통도사의 사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만나게 되는 편액이기도 합니다. 둘이 아닌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의 둘은 중생과 부처이고, 그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라고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중생과 부처의 경계가 분명히 서로 다른 까닭일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음양의 소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 정도의 실력은 되실테니까 말이지요.


문득 이 문제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는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이 생각나네요. 그 둘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두 선생님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계셨던가 봅니다. 퇴계 선생님은 이와 기는 그 작용이 다르니까 본질이 다르다고 보셨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 율곡선생님은 비록 작용은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본질은 같다는 의미로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네요. 이것이 바로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한 이야기이니 관심이 있으시면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낭월도 자세히는 모르니 이렇게 얼버무리고 황급히 도망을 갑니다. 하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리를 하면 좋을까요? 낭월의 소견으로는 이렇게 정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요하면 흔적이 없으니 이때는 理라고 하고
한 마음이 일어나서 움직이면 모습을 나투니 이때를 氣라고 한다.


즉 움직이면 氣가 되고 고요하면 理가 되는 것으로 보자는 말씀입니다. 문득 무토장이 생각납니다. 정흡동벽(靜翕動闢)이라고 했잖아요. 고요하면 닫히고 움직이면 열려서 만물을 사명한다는 그 대단한 무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理氣의 주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십간이 모두 이렇게 제각각의 이기로 구성이 되어있으니 혹자는 움직이는 간지를 보고 판단하고, 혹자는 고요한 간지를 보고 판단하지만 결과는 모두 한가지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연의 진실한 풍경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한 생각의 흔적을 지우고 있습니다. 오늘도 편안하신 밤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11월 24일 밤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