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 갑자(甲子)의 시작이 언제요?

작성일
2010-05-31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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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9화] 정확한 갑자(甲子)의 시작이 언제요?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연일 선거로 인해서 골목이나 큰길이나 모두가 시끌시끌하네요. 그래도 산골은 조금 나은 편입니다만 강의하러 안산으로 왔더니만 정말 선거분위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한 방문자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명리학에 대해서 상당한 공부가 있으신 것으로 짐작이 되었는데, 사주풀이의 설명을 듣다가 말고 갑자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낭월스님, 이렇게 신해(辛亥), 경인(庚寅) 하고 태어난 시간을 갖고서 사주를 뽑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원래 세상의 기원(起源)이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보는 것이 아닙니까?”


“예,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단 말입니다.”


“그래요? 금시초문이네요. 어떤 고인께서 그렇게 대단히 어려운 것을 알아냈다고 하던가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계산을 해 보니까 세상의 처음이 그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지요. 그래서 육갑(六甲)으로 따지는 운명학(運命學)은 결국 허구라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것을 다 밝혀내다니 말이지요. 그런데 하시고 싶은 말씀이....?”


“그러니까 이렇게 사주를 적어서 풀이를 하는 것에 대해서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런 때에는 참으로 적군인지 아군인지 참 헷갈리는 순간입니다. 표정을 봐하니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낭월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본인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질문을 받았거나, 혹은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서 마음이 상해서 낭월에게 반드시 물어보려고 벼르고 있었다가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누가 언제부터 갑자시(甲子時)를 시작점으로 삼아서 아직까지 내려오게 되었는지는 알아 낼 방법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말들로 인해서 나름대로 마음을 모아서 깊이 연구하던 학인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한담으로라도 한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갑자(甲子)의 시원(始原)은 아무도 모른다]



정답은 이래야 할 것으로 봅니다. 즉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접근을 할 필요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뭐, 그렇게 알고 살아가는 것도 또 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것을 옳다거나 틀렸다고 하기는 참 어려울 것입니다.


예전에 낭월도 이러한 문제를 만나게 되면 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요. 그리고 또 답답하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답이 없는 문제도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 해답은 포기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뜬금없이 길손이 질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그렇다면 벗님은 어떠신지요? 이렇게 명료하지 않은, 물론 완전히 틀렸다고만 할 수도 없는, 우리의 명제(命題)인 간지(干支)의 시원(始原)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려는지요? 잠시 생각을 해 보신 다음에 다음 줄로 눈을 돌리셔도 좋겠습니다. 여하튼 생각도 해보고 고민도 해본 다음에 답을 찾아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리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낭월의 소견은 이렇습니다. 언제부턴가 드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갑자년에 갑자가 시작이 되었던 정유년에 갑자가 시작이 되었던 그것은 달력을 만드는 사람들이 고민을 할 일이니 낭월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주괘(五柱卦)를 운용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 지는 것 같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고사(故事)가 있어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 싶습니다만……




수행을 하던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 땅은 도대체 언제 생겨났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넌 올해 몇 살이냐?”


“예? 전 스물여섯입니다.”


“그러냐? 이 땅이 만들어 진지는 올해로 꼭 26년이 되었느니라~!”




이러한 대화입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해야 할 모양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괜한 시간낭비가 되는 셈이지요. 그러한 시간에 공부나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스승이 자신도 모르니까 괴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드셨다면 아마도 사주에 식신(食神)이 작용을 했거나, 혹은 편인(偏印)이 작용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하하~




이제 갑자의 시원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낭월도 그 시원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고 단언(斷言)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사주를 풀이하는 것은 그냥 관념적으로 운명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기루와 같은 것을 실존(實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말도 옳은 말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태어난 순간의 조짐일 뿐이다]



이것은 그 방문자에게 낭월이 들려 준 답변입니다. “매우 재미있는 말씁입니다. 그렇지만 낭월은 갑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관심을 가져본다고 하더라도 알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말이지요.”


“그렇다면 운명은 과연 간지(干支)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그것에 대해서 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 말에 낭월은 또 답변을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간지(干支)로 운명을 읽을 수가 있고 말고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의아하게 낭월을 바라보더군요. 항상 책을 보면 논리적으로 풀이한다면서 근거도 없는 논리를 저렇게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싶은 것 같았습니다.


“사주라는 것은 태어난 순간의 한 조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시동을 걸기 위해서 부르릉거리는 것이나, 멀리서 주인이 오는 기척을 느끼고 집의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과 같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정해진 숙명을 보여주는 조짐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마도 그 동안 자평명리학에 대해서 공부도 상당히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하늘같이 믿었던 간지의 기원이 허구라고 하는 바람에 혼란이 생긴 것이겠지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5년여를 이 공부에 몰두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투자를 한 시간이 아까워지면서 낭월스님의 책을 읽은 것에 대해서도 후회가 막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괜한 일에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마구 마구 들었던 것이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낭월인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어찌 그러한 회의를 한두 번만 가져봤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뇌를 하면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또한 철학(哲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조용히 오주괘(五柱卦)를 적었습니다.



分時日月年
    庚壬己辛庚
    戌申卯巳寅



그리고 그도 낭월이 적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낭월이 물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자, 이것은 선생의 사주도 아니고, 낭월의 사주도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지금 이 시간의 간지라고 정해진 것을 적었을 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선생의 운명을 풀이하겠습니다. 만약에 말이 된다면 된다고 해 주시고, 또 전혀 황당하다면 그렇다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으셨지요?”


“예, 잘 알겠습니다.”


“지금 선생은 아무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야말로 주변의 조건에 따라서 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왜 그렇게 해석을 합니까?”


“오늘이 기묘(己卯)일이기 때문입니다. 기토(己土)가 묘목(卯木)에 올라앉아 있으니 무엇이라도 스스로 할 수가 있는 것은 없다고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이 정도는 공부를 하신 것이 있으므로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으로 봅니다.”


“그야 제가 오늘 오지 않았다면 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낭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찾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조짐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고, 또 이러한 조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 오시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풀이를 좀 더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선생은 마음만 급합니다. 그것도 무척 급하신 상황이네요. 그렇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까지 여기에서는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월지(月支)의 사화(巳火)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공부나 더 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주(時柱)나 분주(分柱)의 의미는 어떻게 되나요?”


“여자로 인해서 상당히 부담을 느낀다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갖 방법을 강구하면서 궁리를 하고 방향을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뚜렷한 결과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즉 답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실행을 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양에 목에 방울을 달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되는 것이고요.”


“맞습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아니, 지금 낭월이 이렇게 설명을 해 드리는 것은 우연히 찾아 낸 이 간지가 과연 선생의 운명에 부합이 되느냐는 것을 확인시켜드리고자 하는 것인데 방법을 물으시는 것은 다음의 일이 되겠지요. 어떤지요?”


“예, 상당히 말이 됩니다. 지금 속으로 놀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군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답이 나올까에 대해서 참으로 궁금한 마음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사실 언제부턴가 낭월은 사주의 시간이 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당에 갑자년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생각을 해 봐야 할까요? 아니면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요?”


“말씀을 들어봐서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적어놓고 설명하신 것이 저의 사주와 비슷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이해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물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됩니다만 이렇게 깨달아 가면서 발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발전이 아니라 진보라고 해야 한다더군요. 하하~”


“그런데 그 공부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계속해서 간지의 이치를 궁리하시게 되면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것입니다.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벗님께서는 갑자의 시원이 궁금하지 않으셨는지요? 혹은 정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으시고는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적은 없으신지요? 여하튼 이렇게 한 말씀을 드림으로 해서 약간이나마 해결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겸해서 간지를 궁리하는 과정에서 공부가 잘 되신다면 간지를 사물(事物)로 바꿔서 대입하는 것도 연습을 해 보시라고 권합니다. 즉 정해(丁亥)를 보면 바다위의 등댓불을 떠올리고, 갑신(甲申)을 보면, 바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떠올리며, 을유(乙酉)가 보이면, 이번에는 대웅전의 주춧돌과 기둥을 생각하시면 좋겠네요. 이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사물과 간지를 연결시키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또 많은 소식을 접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박도사님처럼 갑진(甲辰)에서 변소를 치워주고 살아가는 사람이 보일지도 누가 알겠습니까? 하하~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꾸준~하게 노력을 하노라면 언젠가 하나씩 톡, 톡, 터져주는 것이 있고 그럴 때마다 희열감에 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즐거운 낭월입니다. 그리고 벗님께서도 항상 이러한 즐거움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5월 31일 안산강의실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