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정도(正道)와 변화(變化)

작성일
2007-08-30 10:42
조회
8285

제366화 정도(正道)와 변화(變化)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요즘의 날씨는 그야말로 변화무쌍의 연속이네요. 바람, 폭우, 햇볕 등등 어느 것이 다음에 다가올 것인지에 대해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나들이를 할 요량이라면 우산과 양산을 함께 지참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주심리학 2권을 정리하고 나니까 비로소 약간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문하시는 벗님들께 심심풀이 삼아서 읽을거리를 올려드리려고 마음을 일으킵니다.  


1. 자평명리학의 정도(正道) 


무엇이거나 나름대로 길이 있는 것은 사실이겠습니다. 사도(師道), 공도(公道), 수도(修道)와 같이 길이 포함되어서 큰 그룹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길에도 각기 바른 길도 있고, 비틀린 길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중심(中心)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엇길로 들어가서 시간을 탕진한 다음에서야 바른 길로 찾아가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낭월은 물론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을 연구하는 사람이므로 철학도(哲學道)를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철도(哲道)라고 하기에는 좀 어색한 맛이 있어서 그렇네요. 갑자기 KTX를 떠올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평명리학의 정도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살피기도 합니다. 물론 가장 분명한 것은 생극제화(生剋制化)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지요. 자평명리학에서 이것을 바탕으로 깔기만 하면 최소한 엇길로 들어가서 방황을 하는 일은 피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겸해서 간지(干支)의 도리(道理)와 십성(十星)의 원리(原理)를 잘 알게 된다면 더 없이 지혜로운 학문(學問)의 길로 가는 지름길을 잡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주심리학을 정리하면서 십성(十星)의 오묘한 변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단순한 10진수의 변화가 참으로 다양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적성(適性)으로 볼 적에는 별로 활용도가 없는 비겁(比劫)들 조차도 심리적(心理的)으로 정신질환(精神疾患)을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즉 비겁은 겉으로 활동하는 성분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존재라고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시간들은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다만 다 쓴 다음이 문제입니다. 교정(矯正)을 보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거든요. 그래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보기는 합니다만 넌지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내면의 심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감지가 됩니다. 그렇게 하는데에도 막상 책이 나오고 나면 또 여기 저기에서 오타가 발견되는 것도 늘 있는 일이라서 책이 나오면 정오표를 만드는 것도 피할 수가 없는 일이 되는가 싶습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정도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책을 쓴 소감이 일어나서 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2. 정(正)인 간지(干支)와 변(變)인 십성(十星) 


자평명리학의 정도(正道) 중에서도 또 변화를 찾아보면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원칙적으로 간지(干支)와 십성(十星)을 이해해야 하고 올바르게 관찰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이것도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구분이 가능하겠다는 것입니다.


간지(干支)를 기본 중에서도 왕기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지를 잘 이해한 다음에는 십성(十星)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개인지도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의 마음이 간지(干支)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십성(十星)에 대해서조차도 비중을 적게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얼른 실전에 임하고자 하는 급한 마음이야 이해를 합니다만 그야말로 이렇게 공부를 해서는 일평생을 해봐야 정도의 ‘ㅈ’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늘 생각을 합니다. 사주심리학을 놓고 말씀드린다면 1권은 정(正)에 해당하고 2권은 변(變)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부를 하러 와서 무엇을 알고 싶으냐고 하면 대뜸 대운(大運)을 해석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막상 대운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간지(干支)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서 있는 것이지요. 해석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은 다시 처음의 그 자리로 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도 낭월의 역할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3. 카메라 렌즈의 정(正)과 변(變) 


문득 사진기가 생각이 나네요. 사진기를 들고 다니다가 팔에 몸살이 나기도 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또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생각의 창고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잠시 그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렌즈를 바꿀 경우가 있습니다. 렌즈를 교환할 수가 없는 카메라는 붙박이렌즈라고도 합니다만, 이러한 카메라는 사주공부로 친다면 컴퓨터로 사주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입력이 된 그대로를 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그 중에는 진국도 나오겠습니다만 그래도 뭔가 섭섭한 감이 들어야 정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제로 해석을 해 주는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카메라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렌즈를 바꿀 수가 있는 카메라를 원하게 됩니다. 이미 자신의 견해가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렌즈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단렌즈와 줌렌즈입니다. 단렌즈는 고정초점이라고 할 수가 있고, 줌렌즈는 변형초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대만의 책에 보니까 고정초점을 정초(定焦)라고 하고, 변형초점을 변초(變焦)라고 하네요.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 렌즈의 구분이라고 하겠는데 벗님이 사진을 찍는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어요? 고정 초점은 초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피사체(被寫體)에 다가가야 하는 것이고, 변형 즉 줌렌즈는 렌즈를 돌리면 사물이 적당한 거리로 잡혀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줌렌즈를 선택하게 됩니다. 렌즈 하나로 여러 가지의 효과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기도 합니다.


낭월의 카메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카메라와 포함된 렌즈를 샀는데, 이것도 당연히 줌렌즈였습니다. 18-70이라고 하는 줌을 갖는 렌즈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간단한 광각(廣角) 효과와 적당한 망원(望遠) 효과까지 겸하고 있는 구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찍었습니다. 멀리도 찍고 가까이도 찍었지요.




[줌렌즈입니다. 빨간 동그라미에 보면 왼쪽은 18-70까지이고, 오른쪽은 70-200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줌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뭔가 어중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가 단렌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정초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기능으로 보면 줌렌즈가 월등한데, 가격은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을 보면서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필요하면 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이 렌즈들은 단초점렌즈입니다. 앞의 것은 85mm, 뒤의 것은 100mm렌즈입니다. 그러니까 위의 줌렌즈에 나와있는 18-200의 범위 안에 모두 포함된 숫자이지만 별도로 구분이 된 제품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정도의 설명에서 벌써 고개를 끄덕이신다면 공부가 많이 되신 벗님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사실 사주공부를 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를 다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배우자, 자녀, 재물, 지위, 수명, 매년, 매월 심지어는 매일까지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거지요. 이것과 줌렌즈를 선호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제대로만 잘 된다면 점차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천간지지(天干地支)나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손이 간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로소 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사주공부가 불이 붙는 겁니다. 예전에는 전혀 재미가 없었던 간지의 이치에 대해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스스로 희열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대목을 모르고 공부한 사람은 아직도 자평명리학에 대한 이해의 길은 멀었다고 단정을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순간들이 짜릿짜릿하게 느껴지면서 비로소 뭔가 분명하게 손에 쥐이는 느낌을 알지요.


줌렌즈를 사 놓고서 이제는 단렌즈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물론 단렌즈는 한 가지의 역할만 합니다. 그래서 열 개의 렌즈가 필요하게 됩니다. 천간(天干)을 생각하게 만들지요. 각각의 천간에 대한 이해를 카메라에서의 한 초점에 해당하는 렌즈를 이해하듯이 하지 않으면 간지는 항상 엉켜서 분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백날을 공부 해봐도 답을 보기는 어렵지요.


그렇게 단렌즈를 모두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줌렌즈는 그냥 버리고 손을 대지 않을까요? 아니면 줌렌즈를 이용하는 방법을 비로소 깨달은 것에 대해서 알게 될까요? 아마도 낭월의 소견으로는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예전에 알고 있던 간편성의 줌렌즈가 아니라 단렌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줌렌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로소 변화에 대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얻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혹 이해가 되지 않는 용어가 있어서 머리를 아프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부분은 그런 것이 있는가보다 하셔도 무방합니다. 


4. 변(變)에서 정(正)으로 다시 변(變)으로  


천간지지(天干地支)의 의미가 날이 갈수록 크게 다가온다면 이미 보통의 수준은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십성도 뒷전이 된다면 더욱 대단한 발전을 하고 있는 과정이 틀림없습니다. 낭월의 공부 경험으로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천간지지(天干地支)의 이치를 많이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십성(十星)의 변화(變化)를 생각하는 단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는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고 모두가 온통 신기한 것뿐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평명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아울러서 사람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고 나서야 뭔가 상담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방문자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적응이 되는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어느 한 가지만 잘 해서 되지 않는다고도 하겠습니다. 낭월의 비율로는 정-51%, 변-49%면 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균형이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어떠신지요? 지금의 공부 단계는 어느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것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논리는 아무 곳에서도 쓸 곳이 없습니다. 군대나 교도소에서는 혹 모르겠습니다. 학문의 길에는 몇 년을 경과했느냐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어떻게 접근했느냐는 것만이 중요할 뿐인 것 같습니다.


불과 몇 개월의 공부라고 하더라도 깨달음의 경지는 각각 다르기 마련입니다. 낭월이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불과 반년 정도 되었으니 그 사이에 깨달은 정도라고 해야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반드시 반년의 시간으로만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낭월보다 더 빠른 벗님도 계실 것이고 다소 늦은 벗님도 계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평명리학의 공부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5.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이 정(正)이라면? 


이제 낭월은 이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용신(用神)을 찾아서 상담에 임하고 또 변화에 대해서 적응을 해가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자평명리학을 정(正)으로 놓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싶은 단계에 와 있는 것도 같아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문득 어느 제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번에 스님의 팔자괘(八字卦)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에 사주공부를 시작 했을 적에 어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내용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을까를 생각해 봤어요. 처음에 입문을 하면서 배웠는데, 도무지 황당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경과해서 자평명리학의 바른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본래의 곳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래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에 배운대로 그냥 대입만 하고 있었더라면 앵무새를 면하지 못했을 것인데 간지(干支)의 원리를 배우고 나서 다시 바라보니까 비로소 그 원리가 소상하게 드러나네요.”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과연 그렇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싶습니다. 자평명리학의 변화(變化)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킨 것은 하건충 선생님의 ≪팔자심리추명학(八字心理推命學)≫에 나온 내용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사주공부를 하고 나면 다른 방법으로 응용을 할 수가 있다는 언급이었고 그에 대한 방법은 나오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대만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그러한 것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있었고,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쓸모가 없다고 덮어 두었던 형충파해(刑冲破害)의 대입하는 것도 살펴봤습니다. 비로소 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낭월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간지의 원리를 연구 할 만큼 하고 났더니 이와 같은 선물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도 나름대로 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정답에 접근을 할 수가 있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래서 지난달에 강의를 들었던 내용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소화를 시키고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또 발생하는 의문도 적지 않네요. 아마도 다시 시간을 만들어서 선생을 찾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연구하는 과정은 늘 즐겁습니다.


 


사주심리학 1,2를 완성함으로 해서 이제 당분간은 책을 쓸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자신의 내면을 완성시켜 나가는 시간으로 삼아서 올 가을 알차게 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벗님의 공부에도 늘 즐겁고 짜릿짜릿한 나날의 연속이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7년 8월 3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