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제자들이 떠난 자리

작성일
2007-01-12 23:25
조회
6945
 

[제342화] 제자들이 떠난 자리





[주인들은 떠나가고 택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짐들입니다. 보내는 짐에 주소를 쓰고 있는 사람은 뭘 생각할지 궁금하네요.]


 



[열열한 토론과 설명이 이어졌던 강당입니다. 말끔하게 지워진 칠판을 보고 앉아 있노라니 여러 생각들이 동영상으로 편집되어서 지나가네요.]


 



[한켠에 설치한 공용 컴퓨터입니다. 틈이 날적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자료를 찾았던 참 좋은 연장이었습니다. 이제 두 달을 쉬어야 하겠네요.]


 



[자신의 사주가 알려주는대로 정갈하게 정리를 하고 떠났으니 더 이상 손을 댈 것이 없네요. 이부자리나 한번 빨아서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마찰을 일으키지 마라, 인신공격을 하지 마라 는 등의 글귀에 빨간 동그라미를 친 것으로 봐서 화목하게 살아보고자 노력한 선생의 흔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알수 있으려니.....]


 



[완전히 도배를 했네요. 정말 누우나 앉으나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 짐작이 되네요. 사실 강의 중에 질문도 가장 많았는데, 많은 성취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산 석실의 벽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일매일 강의를 들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자료들을 꼼꼼하게 년월일시 별로 정리를 했는 모양인데 이렇게 많았던가 보네요. 이것은 누가 훔쳐다가 비법으로 팔아 먹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


 


        


[웬 약속가든? 공부하다가 머리깨나 아프면 한 잔 들러 가시는 것 같더니만 달력까지 얻어다 걸어놨군요. 너무 공부만 하면 그것도 지옥이지요. 더러는 휴식이라는 이름하에 잠시 나들이를 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서예를 하시다 입산한 선생님은 이렇게 벽에다 글 한구절을 붙여놓고 자신의 마음을 달래면서 공부에 전념했던가 봅니다.]


 



[또 그런가 하면 공부를 하는 중에 담배를 끊어 보겠다고 하는 결심도 보이네요. 부디 성공을 하셨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방에서 담배냄새는 나지 않았던 것 같네요. 아마도 성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성이 풍부하신 어느 여자 선생님 방은 아늑한 느낌의 주인이 살았던가 싶습니다. 창문에 붙은 것은 뭔가요?]


 



[아, 산에 가서 낙엽 하나를 주워다가 붙여놓았나 봅니다. 낙엽의 모습으로 봐서는 옷나무 종류 같기도 하고.....]


 


         


[그렇게 떠나 간 자리는 고요만 남았네요. 다음 주인이 올 때까지 그 고요함으로 명상을 할 공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계룡산에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해가 넘어가는 노을이 법당 유리문에 반사되어서 잠시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저 멀리 노성산을 두고 붉은 노을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3개월간 함께 했던 열렬한 학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이 장면은 깊이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이제 곧 어두워지겠습니다. 밝은 날의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 되어가네요. 휴식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들을 청소하는 작업이려니 합니다.]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그저께로 감로사 겨울강의가 종료되었습니다. 물론 홀가분한 기분이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지요. 아마도 몸살이 나지 싶습니다. 온 몸이 뻐근~한 것이 말이지요. 3개월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가 싶은 생각을 늘 해보게 되네요. 그리고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입문을 하신 경우라고 한다면 무척이나 긴 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연일 몰아치는 이론들에 대해서 정리를 하랴 또 입수를 하랴,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이 바빴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제까지는 몰랐던 세상이지만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소한 영역을 탐험하면서 눈과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늘 느끼는 것은 스스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만족을 하는 날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문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만족스러울 날이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경지는 꿈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네요. 낭월도 아무리 연구를 하고 또 해도 부족하기만 한 것을 보면 다른 학자의 생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악 입문을 한 입장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1. 처음의 분위기




첫날(10월11일) 저녁에 입산을 하기로 약속을 한 학인들께서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느끼는 감정들을 생각해 보면, 설레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하면서 생소한 곳에 적응이나 잘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스러운 느낌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절반은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입장에서 정리를 하고자 들어오신 경우라고 하겠고 또 절반은 처음으로 책을 보다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일으켜서 들어 온 경우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묘하게도 음양의 조화를 잘 이룬 결합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남자가 10명, 여자가 10명이었으니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어려울 일인데 묘하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하산을 한 여성 한 분이 있어서 아쉽게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균형을 이룬 최초의 도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령층을 보면 84년부터 44년까지 40년 차이가 있었으니 이것도 가장 특이한 수치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최소 연령자가 탄생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한 자리에 모였으니 여러 가지로 감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처음의 목적대로 자평명리학에 대한 이해를 얻고 어쩌면 내심으로는 ‘결정적인 정답(?)’을 얻어서 하산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고는 못하겠지요.




2. 마지막 분위기




3개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경우와 생소한 경우의 차이가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칠 무렵이 되니까 그러한 차이는 어느 사이에 없어지고 만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보자가 높이를 맞춘 것인지, 아니면 숙련자가 높이를 낮춘 것인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하네요.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낭월의 소견으로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결과도 같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막상 귀가해서 실제로 상담에 임하게 되면 분명히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경우와 단시간을 들인 경우의 차이는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려니 해야 할 것입니다만 적어도 하산을 할 무렵이 되어서는 모두가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하나의 공동체가 생겼던가 싶습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도반의 모임을 결성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낭월은 끼워줄 수가 없다고 하네요. 그야말로 (1명 빠진)19명의 도반이 학문의 완성을 위해서 마련한 모임공간이라고 하네요. 인터넷을 이용해서 최대한 정보를 나누면서 낙오자가 없이 마무리를 지어보자는 의논들을 했던 가 봅니다. 적어도 그러한 의논들을 한 것은 아마도 혼자서 완성을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생각을 했을 상 싶습니다. 물론 현명한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디 그러한 생각들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의 나날로 이어지기를 빌고자 합니다.




3. 선생의 아쉬움




늘 느끼는 소감입니다만 선생의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것을 자세한 설명을 통해서 깊이 있는 이해를 하도록 도와야 하겠다는 목적이 완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갖는 아쉬움입니다. 그래도 각자 3개월여의 시간이 알차게 진행 된 것으로 생각이 되는 듯한 표정을 보면서 보람은 컸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그러면서도 더 편리하고 빠른 방법이 없었던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정말로 소중한 각자의 시간들인데 그 중에서 적어도 일정 시간을 낭월에게 맡기고 달려들었으니 그만한 수확이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중에 눈치가 빠른 대여섯 분은 봄에 다시 공부하러 올 테니까 방을 그대로 비워둬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공부의 연속성이 중간에 유실되는 공백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을 했던가 싶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녹음을 하면서 정리를 했어도 그래도 놓친 것이 더 많다고 생각을 했을 법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학생의 탓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선생이 참으로 똑소리가 나는 총명함으로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면 한 방에 멋진 결과를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렇지를 못해서 늘 시행착오 속에서 그야말로 구도적인 명리학의 연구를 하다가 보니까 가끔은 헛 다리도 짚어가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게 되네요. 이것은 선생의 무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러한 점을 줄이고자 최선을 다 해도 여전히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아쉬움이 남는가 싶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러한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우둔한 선생을 만난 학생들이 고생이지요. 그래서 더욱 게으를 수가 없는 낭월입니다.




4. 스승이 아닌 것은 없다.




그렇지요. 사실 늘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뭔가 놓치고 있는 세상의 이치가 없는지, 관념에 젖어서 그러려니 하고 보아 넘기는 것은 없는지를 스스로 살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先生)이라고 하는가 싶습니다. 선생은 앞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거든요. 먼저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라는 말보다는 선생이라는 말이 더 편안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선생과 선배는 비슷한 말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절에서 읽은 책 중에 《치문(緇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의미를 생각하면 중노릇을 하는 법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그 내용은 무척이나 다양해서 모두가 구구절절이 금싸라기 같은 내용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연도 서로 배우고, 성인도 서로 배운다는 대목을 보면서 뭔가 명치끝이 찌르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그러한 느낌은 그 후로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그야말로 태양을 보면서 그 밝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고, 달을 보면서 그 질서정연함으로 자신의 규칙을 삼으며, 산을 보면서 그 굳건함으로 자신의 의지력을 삼고, 물을 보면서 그 쉬임없이 흘러감으로 자신의 정진(精進)력을 삼아서 배움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이겠습니다만 대략 그러한 느낌으로 기억장소에 저장이 되었던가 싶습니다.


 


            


 


            


 


[오랫만에 책을 찾아 펼쳐보니 그대로 글자가 남아있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봄에 대만에서 선생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학문의 길에는 완성을 이룬 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앞서서 가는 자와 뒤쫓아서 가는 자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언제나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은 전율이 느낄 정도의 짜릿한 그 무엇이 있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가르치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매 순간순간을 누구로부터인가 배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대화의 일부를 생각나는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낭월] 지장간(支藏干)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 뭡니까?


[낭월] 해수(亥水) 속에 무토(戊土)가 있습니까?


[선생] 해수 속에서 무토가 나타나던가요?


[낭월] 아무리 생각해도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의문입니다.


[선생]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낭월] 왜 그렇습니까?


[선생] 없으니까요. 심리구조를 살펴봐도 도무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낭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선생]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낭월] 그랬군요.......


[선생] 인신사해(寅申巳亥)에는 무토(戊土)가 없습니다.


[낭월] 사중(巳中)에는 무토(戊土)가 있지 않나요?


[선생] 없습니다.


[낭월]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합니까?


[선생] 심리분석으로 증명을 합니다.


[낭월] 금시초문입니다.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선생] 사중(巳中) 무토가 어디에서 온지는 아시나요?


[낭월] 경금을 보호하려고....... 온 것이 아니던가요?


[선생] 아닙니다.


[낭월] 그러면 진월의 무토에서 여기(餘氣)로 넘어왔던가요.


[선생] 월지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허구(虛構)입니다.


[낭월] 허구라구요? 책마다 그렇게 써 놨는데요.


[선생] 사중의 무토는 12운성에서 왔습니다.


[낭월] 그럼 오중(午中) 기토(己土)도 그렇겠네요?


[선생] 잘 알고 계시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낭월] 오, 쯔다올러~!(앗~~! 그렇구나~~!!! 알겠네요.)


[선생] 12운성은 실제(實際)하는 것인가요?


[낭월] 허구라고 생각을 합니다.


[선생]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합의를 본 셈이네요.


[낭월] 그럼 사중의 경금(庚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선생] 금(金)과 화(火)의 신비로움이라고 하겠습니다.


[낭월] 고맙습니다. 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눴었습니다. 물론 그 후로 다시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하면서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벗님들께는 참 죄송합니다만 우둔한 낭월은 늘 이런 식으로 하나씩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하건충 서생님이 진즉에 사중에는 무토의 존재가 없음을 확인하고 제거시켰습니다만 낭월은 이제서야 그 존재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책에는 왜 그렇게 무토를 제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낭월의 책을 보시는 벗님들께 본의 아니게 헛된(?) 고생을 시켜드렸다는 점입니다.


왜 진즉에 12운성의 병무동궁설(丙戊同宮說)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선생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벗님도 공부하시는 과정에서 그런 느낌을 가져보셨는지요? 잘 모르셔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12운성에서는 병화(丙火)와 무토(戊土)가 같은 생사(生死)를 하고, 정화(丁火)와 기토(己土)가 같은 생사(生死)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의미 없음은 진즉에 생각을 했으면서도 정작 지장간을 나름대로 후벼 판다고 했음에도 이러한 소식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미련하기가 돌과 같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늘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가르침을 드리는 입장에서도 늘 자신의 오늘 알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과연 확고한 것인지에 대해서 늘 점검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찌 이러한 것 뿐이겠나요. 그래서 공부하는 학인은 늘 누군가에게 물을 수가 있고, 또 답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은 최상의 행복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얼른 급한 일들을 마쳐놓고는 다시 선생님을 만나러 갈 마음에 부풀어 있기도 하네요. 남이야 뭐라고 하건 말건 스스로 자신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니 어쩌겠나 싶습니다.




5. 제자들이 떠난 자리




오늘은 그 동안 새 주인들을 섬기고 살았던 방을 둘러봤습니다. 그야말로 주인의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있더군요. 벽에 각종 도표로 도배를 한 편재(偏財)방으로부터 알 수가 없는 기호들로 빽빽한 편인(偏印)의 방까지, 그리고 주인의 습관이 애연가였는지 애주가였는지도 대충 보여주는 흔적들도 더러 보였습니다. 물론 향기가 배어있는 방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떠나가고 흔적만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갑자기 감로사는 적막감이 감도는 산중의 여느 암자와 다를 바가 없는 분위기로 변해버렸네요. 그래서 또 그 고요를 즐기고 있는 낭월입니다.


각자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던 모습들이 떠오르네요.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열망과, 정확한 답이 오히려 틀에 가두게 될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는 낭월의 모습...... 그러한 잔영들이 한데 얼크러져서는 허공으로 발레를 하는 냥으로 부산하게 명멸(明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제 다음의 만날 시간인 4월 달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 하는 공부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쁘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인연이 생겨나면 더욱 알찬 내용이 되도록 하는 것만이 부끄럽지 않은 선생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6. 어디나 공부 자리입니다.




벗님께서도 벗님의 공간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시도록 기원드립니다. 공부는 산 속에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임없는 자기성찰과 만물관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것만 잘 이뤄진다면 어디에 계시더라도 자연을 보는 눈은 점차로 커지고 높아지게 될 것을 보증합니다. 그러다가 밝은이의 한 말씀을 듣는다면 또 다른 희열감으로 온 몸의 세포들이 전율하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소식도 또한 노력한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려니 합니다.


세상의 이치에는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이 깨달은 귀한 소식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그 한 말씀을 들으려고 3년 동안 나무지게를 지기도 하고, 끼니를 공급하기도 했으며, 마당을 쓸기도 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그러한 마음으로 또 공부의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깨달음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만한 근기가 되었을 적에 비로소 가능해 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해년의 나날이 이러한 깨달음과 궁리의 나날로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공부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부디 큰 성취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07년 1월 12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