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방문자와의 교감이 있을까?

작성일
2004-03-1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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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방문자와의 교감이 있을까?




그렇게 대단했던 눈이 거의 녹아 내렸다. 많이 살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50여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지붕에 올라가서 눈을 퍼 내린 것은 처음의 일이다. 말로는 백년이후로 처음 큰 눈이 내렸다는 말도 있었지만 참으로 지붕이 무너질까봐 걱정을 했었다는 분위기를 이해하실 수가 있으실지 모르겠다. 아직도 마을 밖을 나가게 되면 군인들이 모여서 일그러진 하우스를 일으켜 세우느라고 고생을 하는 모습도 거의 매일 보이는 풍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면은 사주쟁이의 관점으로 봐서는 개인의 운과도 무관한 일이라고 봐야 하겠다. 운이 좋다고 해도 눈은 운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탱하는 힘이 약한 건물이라면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해도 눈은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나무를 봐서도 그렇다. 수생목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의해서 나무가 꺾이고 찢긴 모습을 보면서 수극목(水剋木)의 현장을 보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되겠다. 운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운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현실을 바로 관찰하면서 현상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해 봤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사주로만 모든 답을 찾으려고 고심을 하시는 벗님이 혹시라도 계신다면 겸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시자고 한 말씀 드려 봤다.




1. 방문자와의 어떤 교감?




종종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찾아오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답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면서 늘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사주의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오행의 변화를 읽어서 설명을 해 주는데 묘하게도 그가 생각하는 곳으로 방향이 잡히더라는 것이다. 물론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닌데, 간절하게 답을 원하는 사람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와서 답변을 구할 적에는 아무래도 이러한 의미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점괘를 공부할 적에는 재미로 장난삼아 점을 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사주를 보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음양오행을 연구하여 운명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온갖 원리를 다 동원해서 정답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회한에 잠기기도 한 나날들을 생각해 보면서 그러한 과정이 없이 완성을 향한 걸음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쯤에서 생각을 해보면, 그러한 나날들이 없이 얻어질 학문의 세계는 없다고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도 방문을 한 젊은이가 있었다. 신약한 사주에 년주의 인성을 의지하려고 하는 구조를 보면서 문득 도를 닦고 싶은데 월주의 장애물을 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의 고뇌로 보이는 부분을 설명하노라니까 그의 표정은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읽었다는 단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은 그대로 자신의 고뇌였다고 한다. 자신이 말을 하고 자신이 놀라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그렇다.




2. 관찰자는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물리학의 관련 서적을 보면서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물질의 움직임은 관찰을 하거나 말거나, 혹은 누가 관찰을 하거나 간에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인정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실은 관찰자의 태도에 따라서 관찰의 대상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과연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방문자와의 관계로 연결을 시켜서 관찰을 해보게 되는데, 방문자는 관찰되어질 대상이고, 상담자는 관찰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 연구인이라고 생각을 해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연결점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관련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관찰자는 그야말로 상당히 폭이 넓은 사고력을 갖고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가 느껴진다. 그리고 방문자와 상담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방문자의 고민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겠고, 그렇게 되면 상담을 하더라도 올바른 상담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는데, 공부를 하면서 점점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주관으로 남의 운명을 판단하게 된다면 자칫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참으로 물리학의 실험실에서만이 아니고, 상담실에서도 이와 같은 이유가 작용하게 된다면 과연 상담을 한다는 것은 무심(無心)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관해야 한다는 참선도리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까 싶다. 가끔가끔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은 더욱 이러한 점을 갖고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냥 넘겨짚어서 내린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겠는데, 묘하게도 자신의 고민과 낭월의 해답이 일치를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이면에 어떤 힘이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3. 기교로 상담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상담실에서는 술수(術數)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사주만 봐서 답을 찾는 것은 애초에 포기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는 밥을 먹고 살기가 불가능하다는 말도 하는 선생님들이 있는 것 같다. 눈치와 잔재주를 갖고서 상담에 임하는 결과는 무심으로 상담을 임하는 결과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 해 본다. 도대체 왜 사주만으로 상담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인지 낭월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실로 사주의 영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 말씀들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은 사주의 영역이 아니므로 다른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들은 하는데, 사실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인생의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을 모니터를 보듯이 그렇게 알아낼 방법이 있다면 좋은 일이며, 이로 말미암아서 앞으로의 전개될 상황까지도 알아낼 수가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것도 많은 것은 사주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사주로 운명을 논하면서 진심으로 그와 대화를 나눈다면 왜 답이 없을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연구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다.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어서는 망신이라고 하는 심리로 상담에 임하게 된다면 결국은 혹세무민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상담은 상담이다. 자신의 역할이 상담인지 예언인지를 잘 생각하여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상담실에서 늘 느끼는 것은 상담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불통지(無不通知)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답이 나오는 경우를 너무 쉽게 접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상담사의 공부는 어떻게 진행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곤 한다.




4. 상담사의 공부는 마음공부일 뿐.




어느 수준의 공부가 된 다음에는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과연 완벽한 도술을 찾기 위해서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듣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오행의 이치에 깊숙이 연구가 된 다음이라면 새로운 공부를 찾아서 방황을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상대방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가슴을 저리게 하는 한 마디의 예언을 찾으려고 그 작은 심장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마음을 열고 무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상담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요즘 어려운 경제 환경에 운명상담업을 하시는 분들도 삶의 여정이 고단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환경이 어려운 것이야 개인이 피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공부하고 연마해서 역경을 전환점의 계기로 삼는 도약의 마음이 없다면 아마도 상담업의 자질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질문을 해보시기 바란다. 과연 방문자의 삶을 위해서 조언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오행의 이치를 깊이 통찰하고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기울여서 자신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그냥 손쉽게 불경기에 고단한 노동을 하지 않고 밥을 얻어먹을 수가 있는 일이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5. 노력은 하더라도 방향이 잘 못되면.....




원효대사의 말씀에는 두 가지 유형의 수행자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모래를 쪄서 밥을 하는 사람이고, 그 하나는 쌀을 쪄서 밥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이다. 물론 누구나 자신은 쌀을 찌고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3년이나 5년, 혹은 10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밥이라고 믿었던 것이 밥이 아니고 모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헛된 일에 대한 결과를 보면서 허탈해 할 것이다. 그래도 이런 사람은 좀 더 나은 편이 아닐까? 왜냐면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찌고 있는 것이 아직도 쌀인지 모래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낭월 자신에게 매일매일 다짐을 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감로사에서 강의시간에도 항상 쌀을 찌고 있는지 모래를 찌고 있는지를 살피도록 이야기를 해 드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자신이 쌀을 찌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어쩌면 매너리즘에 빠지지는 않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곤 한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대만으로 학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자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해보게 된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곧바로 퇴보하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공부든 생각이든 혹은 재물이든, 이 순간에도 두 가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늘고 있거나’


‘혹은 줄고 있거나’




스스로 곶감꼬지에서 하나 둘 빼먹다가는 이내 막대기만 남게 된다는 어릴 적의 어머니 말씀이 가끔 생각나곤 한다. 그래서 늘 새로운 감을 깎아서 막대기에 꽂아 둬야 한다는 말씀이 이렇게도 가슴에 담겨지는가 보다. 비록 무지랭이 촌로의 말이지만, 이치적으로 봐도 전혀 문제가 없는 진리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주도 움직이고 있고, 자연도 따라서 움직이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도 늘 움직인다.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자신의 마음을 향상시키거나 아니면 후퇴시키는 것이 순전히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늘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내 게으름이 달라붙으니 달리 더 좋은 방법도 없겠다.




책을 읽고 자연의 이치와 오행의 이치를 궁리하시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은 한 말씀은 그렇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관찰하고 자신의 마음은 자연과 가까운지를 살피면서 오늘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임하시기를 당부 드리는 마음이다. 하여 낭월도 늘 스스로를 관찰하면서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추스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방문자와 상담자의 관점에 대한 소견을 드렸다. 모쪼록 더욱 힘찬 내일이 되시기 위해서 오늘의 노력이 의미 있는 시간이기를 기원 드린다.




        2004년 3월 13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