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木의 영역에 대해서....

작성일
1999-09-26 00: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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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木의 영역에 대해서.....



앞에서 바람의 오행이 목이라고 생각을 해봤는데, 내친
김에 목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다. 바람이 목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연장되는 이야기임을 참고로 이해하시고 살펴보시면 좋겠다.



1. 바람으로 연상되는 것들



무엇보다도 '흐름'이 생각난다. 물이 흘러가는 것도 어쩌면
목의 기운을 만들어서 그렇게 진행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목의 성분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는 점에서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기문둔갑에서 어쩌면 그렇게 甲에게 모든 비중을 두게 되었는지도 생각을
해보게 된다. 즉 '甲木=生命'으로 연결이 될 수가 있다는 점에서이다. 물이 흐름을
멈추면 결국 죽어있는 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체내(體內)를 감돌고 있는 동맥(動脈)과
정맥(靜脈)의 혈관 구조를 생각할 수가 있겠다. 혈액은 일단 水의 성분으로 보도록
하겠는데, 그 혈액이 흐름을 타는 것은 목의 기운으로 인해서이다. 결국 혈관이 목을
담당하게 되는데, 혈관은 그렇게 혈액이 앞으로만 나아가도록 생겨먹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음양으로 나눠본다면 동맥은 양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니까
목의 양이라고 하겠고, 정맥은 다시 돌이켜 들어오는 회로를 갖고 있으니 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색깔을 봐도 동맥은 붉은 색이고 정맥은 푸른색인데, 역시
음양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 요인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래서 혈관을 또한 목이라고
하겠는데, 실은 심장이 밀어주지 않으면 되지를 않으니 심장에서 발생되는 힘도 역시
목이라고 해야 하겠다. 결국 목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력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분위기이다.



2. 파동은 어떨까?



이렇게 확대해석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입자(粒子)의 영역까지도
생각을 해본다. 미세한 입자가 움직인다고 하는데, 특히 빛의 알갱이가 움직이면
비로소 밝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그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는 또한 목의 기운이
가미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토의 기능이 참으로 대단하게 생각이 되었는데
근래에는 자꾸 목의 기운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을 두드리는 현상이 느끼게 되면서
다시 뭔가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들어간다.


신경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역시 목의 영역이다. 그리고
파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죽어 있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실은 파동이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역시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파동의 형태가 다를 뿐이고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의미를 보면서 생명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또한 불멸(不滅)의 존재라고 하는 생각도
든다.


가령 바위를 예로 든다면 단단한 형상에서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서도 그 내부에서도 사람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파동이
있다고 하는 말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물리학의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도 달라진다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도움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 분들의 노력으로 인해서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反問] 그렇다면 바위도 목이라고 해야 할까?



파동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을 해도 되겠다. 그런데
역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유는 그렇게 파동이 느리게 만들어 가는 이면에는
뭔가 또 다른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마도 이 기능은 브레이크의
작용이라고 봐서 브레이크의 기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파동이 느리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까 브레이크의 기능을 하는 성분이 바로 金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즉 물질에는 금의 성분과 목의 성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해 놓고서 생각해 본다면 일단 목이 발전성이나 직진성이라고 한다면 금은
브레이크의 역할 제어 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그래서 金剋木이
되는 것일텐데 여하튼 이렇게 궁리를 하는 것이 너무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낭월이에게도
약간의 물리학자적인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 이러한 성분이 편재성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3. 진동(振動)도 목의 영역일 것이다.



계속해서 확대해석을 하다 보면 이렇게 진동이 파동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의 현이 움직이는 것에서도
목의 기운이 느껴진다. 역시 가야금이나 기타 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진동이
공기를 움직여서 파동을 해 나갈 적에 결국 삼라만상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이것은 생명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들으면서 살맛을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장송곡 같은 형태는 생동감을 줄이는 파장이라고 한다면
또한 소리의 양면성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 나가노라면 절에서 두드리는 북소리나
종소리도 각기 목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다. 그리고 바람이 목이라고
했으니 그 공간을 움직이는 바람보다 미미한 파장도 역시 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어쩌면 이 파장이 보다 강력한 움직임으로 흐르는 것이 바람일 것이다. 둘 사이에서
무슨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지를 느끼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느낌] 소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시라....



적막강산(寂寞江山) 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상황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느낌은 무엇인가? 생동감의 생명력인가?
아니면 온통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무덤 속인가? 긴 생각도 필요 없다. 아주
잠깐동안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바로 죽음의 분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가 완전히 브레이크에 걸려있는 상태, 그러니까 정지된
상태에 속하는 것은 金의 세상이고 죽음의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쥐
죽은 듯...' 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간단한
의미이다. 즉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 곳에서는 죽음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귀신이 우는소리라도 들려야 할 모양이다.


여하튼 소리가 없는 것이 죽음의 느낌이라고 한다면 소리가
있는 것은 생명의 느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그렇다면 죽음의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죽는 그 순간의 현상에서는 어떤 적막감이 감돌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또 다른 날에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아마도 그 장소에서도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떤 브레이크가 어떻게 작용을 하면
죽었다고 하게 되는 '일체의 움직임이 멈춤'의 상태로 되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고 싶어진다. 여하튼 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있으니 또 보류를 하도록 할뿐이다.
여기에서 느끼고 싶은 것은 결국 소리가 생명이고 木이라고 하는 느낌을 가져 보자는
것이다.



4. 생각도 목이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은 항상 앞으로만 가는 성질이 있다. 공상이나 망상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뭔가 일정하게 파장을
유지하면서 머리 속을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을
해보면 역시 목의 영역이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甲木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고,


乙木은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분류를 해봐야 할까....?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발전성이 없고 활동적이지 못한 것으로 봐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乙木의 특성은 과거로 달리다 보니까 죽음과 연결이 되고 그래서 乙庚合이
되어서 金의 기운으로 되는 것은 또 아닐까? 그렇다면 甲木은 앞으로만 가다 보니까
결실을 생각하게 되어서 甲己合으로 土의 기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누가
아니라고 장담을 하겠는가....


즉 을목은 과거로 흐르는 성분이고 그래서 과거의 찌꺼기가
쌓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를 놓고 생각 해본다면 을목의 영역에서는 그 나무의
과거를 읽을 수가 있을 것이고, 갑목에서는 나무의 미래를 읽을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나무 줄기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과연
몇 년이나 살아왔느냐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잎을 봐서는 알기 어렵다. 잎은 미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잎을
봐야 하겠지만 몇 년이나 서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줄기를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을목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잎에서는
갑목의 기운을 읽게 되는 것이고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자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면 새로 돋아난 순을 봐야
하겠다. 왜냐면 이미 굳어버린 나무 줄기는 말을 잘 듣지 않는 까닭이다. 나무 줄기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이미 그렇게 과거의 기억에 집착을 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의 유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과거의 유형에 집착을 하게 되면 미래를 보는 안목이 둔해진다. 그래서 발전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타고르께서도 성인에게서 희망을 찾지 않고 어린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은데,
어린아이들의 가능성과 노인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하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을목의 성분이 과거로 나아간다고 하면 별로 틀린 말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의 성분을 강화시켜서 미래로만 나아가면 될까?
물론 치우쳤다고 하는 말을 들을 것이고, 구름을 딛고 다닌다는 말도 들을 것이다.
현실성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러한 일로 해서 세상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너무 목의 기운이 과속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를 하게 되는데, 하나는 성자라고 하고 또 하나는
정신병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많이도 닮아있는 모습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목기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乙木의 과거로만 진행한다면
또 어떻게 될까? 그는 아마도 발전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결론을 본다면 당연히 적절하게 갑목과 을목의 균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여기에서 陽木과 陰木의 역할을 이해할 것도 같다.



5. 염력에도 목의 기운이 포함된다.



흔히 하는 말로 '텔레파시'라고 하는데, 과연 이러한 염력의
전달은 어떤 성분이겠느냐는 질문을 해본다. 그리고 보내는 기능이 뛰어난 사람과
접수하는 기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갑목의 기운이 강한 사람은 발신의
기능이 강할 것으로 생각을 해보겠고 수신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을목의 기운이 강하다고
한다면 이치에 타당하리라고 생각이 된다. 즉 수신기도 역시 파장은 목의 영역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적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목이 파장이라면 파장을 감지하는 것도
역시 목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신과
수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갑목과 을목을 겸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쩌면 도인인지도
모르겠다. 도인이 별다른 것이겠는가...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메시지를 바로 전달
받고 또 전달하는 사람을 일러서 도인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대다수의 사람은 기능이 부분적으로 치우쳐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한 방향으로는 잘 되어 있으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는 상당히 무딘 것을
보게되는데, 역시 겸용으로 작용을 하기에는 여간한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하튼 염력의 작용은 그렇게 파장과 닮아 있고 그래서
목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를 하고 싶은 생각을 해보는 것으로 한계를 삼을 작정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까 과연 목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은 곳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삼라만상은 다시 오행의 더부살이라고 하는 생각도 하게 되면서 과연
어떻게 이것은 목이고 이것은 금이라고 구분을 하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는
선명한 그 무엇이 가능할 것도 같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전혀 다른 현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참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나 하는 짓이고
지혜로운 사람의 안목으로는 그야말로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되는 꼴은 아닌지
모르겠다.



6. [결론] 움직임은 木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생각해 보지만 그 움직임이 바람이든 진동이든
염력이든 메가헤르츠든 킬로헤르츠든 FM이든 AM이든 간에 모두 목이라고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벗님과 낭월이의 교감에 대해서도 목의 기운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보자. 참 목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작용을 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연구하고 궁리하는
이 흐름의 파장을 문득 느끼면서 목의 성분이 함께 느껴지면서 과연 음양오행을 연구하는
학자의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정도에 생각이 도달하게 되면 목의 실체가 어느 정도
느낌으로라도 다가올 듯 한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또 안타까운 것은 있다. 을목의
기운에 사무쳐서 새로운 관찰력을 상실하고 천년 전의 이론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동료들이 안타깝고, 이렇게 유연한 자연의 흐름을 벗삼아서 오행의 구조를 연구하지
못하고 고정된 틀에 매여서 유연한 사고력을 상실한 듯한 모습이 비칠 적에는 더욱
그러한 기분이 든다. 항상 주변(과거와 미래의 구조들을...)을 살피는 학자의 기운이
살아 있지 않다면.....



그렇다, 학자의 눈이 그렇게 생기(生氣)를 띠면서, 반짝이면서,
활기 있는 사고력을 발휘하면서, 항상 주변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이미 학자가 아니다.
죽어있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별로 길지도 않은 인생을 놓고 생각해 볼 적에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러한 안목으로는 학문을 연구 해봐도 세상을 밝히기는
고사하고 더욱더 혼란의 터널을 헤매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 지나친
염려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스스로 목의 기운이 넘치는 생동감 있는 학자가 되건
또는 썩은 찌꺼기에 매달리는 죽음의 적막감이 감도는 학자가 되든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어찌 음양오행을 연구하는 분야에만 속한다고 하겠는가...
세상의 모든 일을 대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두루 해당이 되는 말씀일 것이다.



벗님께서는 어떤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시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보시고 과연 희망과 돌이킴의 적절한 균형의 중심점에 놓여 있으시다는 결론을
내리신다면 너무도 행복하실 것이다. 낭월이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살아가는 벗님들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좋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고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하나로 살지 못하는 것만 안타까운 마음이시라면 참으로 도를 찾는
구도자(求道者)라고 할만 하다고 생각이 된다. 바로 낭월이의 마음이 이와 같음이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낭월이의 희망이다. 그리고 또 이어서 드는 생각은 주제파악도
못하고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고
싶은 것은 아마도 결실의 기운이 감도는 가을이기 때문일까......?



        추석도 지난 햇볕이 따사로운 날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