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낭월동에간 낭월

작성일
2000-11-30 00:00
조회
6253
낭월동에 간 낭월


제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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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동에 간 낭월
(2000.11.30)



예전에 하이텔 역학동에서 활동할 적에 게시판으로 어느 회원이 질문을 했다.


"낭월스님은 낭월동에 사시나요?"


그런데 낭월이는 낭월동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지라


"낭월은 상월에 삽니다."


로 답변을 했는데, 그 후로 낭월동이 어디 있을까를 궁금히 여기다가 인터넷에서 낭월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하는데
낭월동이라는 이름이 등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위치를 대략 파악하고 있었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낭월동을 한번 들려볼 것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특별한 인연이 아니면 냉큼 들려지지 않는 것인데, 어제는 일이 있어서 대전에 나갔다가 연지님이 드라이브를
하자는 말에 그렇다면 낭월동을 한번 가보자고 의견일치를 봤다. 사실 일치라고는 하지만 낭월이가 제안을 하면 연지님은 마냥 좋아서 그대로 따르므로
의견일치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형식은 의견일치를 취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야 아무래도 좋다고 하겠고, 낭월동을 찾아서 동방으로 차를
달렸는데, 옛적에 어려서 걸어 지나던 대전천변도 보이고 그 때에는 여름이면 피혁공장의 아저씨들이 대낮에 멱을 감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가오리순두부집이 있던 자리에는 현대식으로 변한 가든 분위기의 집이 있었고 초라하던 옛적의 건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대성동이 나타났다. 대성동은 예전(15세무렵...)에는 대덕군 산내면 대성리였는데,
그때 안면도에서 농사일에 지긋지긋해진 부모님께서 혹 아이들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곳에서 약 1년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고, 당시에 집 앞에는
하우스 포도밭과 당면공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략 위치만 짐작이 되는 나름대로
약간의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전광역시로 되면서 대전시 동구 대성동이 되었던 모양이다.
대성동으로 들어서니 식장산 고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고산사라고 하면 특별히 생각이 나는 것이 있는데, 몇 년 전에 김경보 선생이 기공을
수련하자고 권유하는 바람에 나들이를 하여 사마귀포즈를 취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서는 고통을 참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도 잠시 다시 조금 더
진행하자 길가의 간판이 들어온다. '낭월가든' 음.... 이거 왠지 낭월이라는 이름이 시세를 잃어 가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예전의 산내면으로 접어들자 이번에는 아예 '낭월교회' '낭월장로교회' '낭월분식' '낭월선교원' 그 외에도 뭔가 있었을텐데 우선 이런
정도가 생각이 난다. 알고 보니까 예전의 산내면 소재지가 있던 동네의 명칭이 낭월동이었고 아마도 당시에는 낭월리였을 게다. 여하튼 모처럼
낭월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그 가운데에 서있는 낭월은 다시 또 하나의 '낭월철학원?'이라고나 할까? 아예 집을 하나 구해서 낭월명리학당도
세워버릴까를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낭월철학원이 없는지 보려고 기웃거려봤다. 낭월동에 낭월철학원이 있으면 들어가서 노닥거리다가 차나 한잔 나누고
가려고 말이다.


물론 찾아 봐도 얼른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 한쪽 구석에 있거나, 혹은 없거나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거리에
포장마차에서 풀빵을 1천원어치 사서 먹으면서 옥천으로 해서 대청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왔는데, 인터넷으로 무슨 정보라도 없을까 하여 대전 동구청
사이트를 찾아봤더니 지역 전설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낭월동에는 다음과 같은 이바구가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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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제의 유래 (동구 낭월동)


옛날 어느 마을에 수십 가구가 사는데 어쩐 일인지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지간히 커서 제발로 걸어
다닐만 하면 병들어서 죽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 얼굴엔 웃음이 사라지고 근심만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어느 알 도사 한 분이 그 동네에 오더니,


「아! 이 동네는 모두 우애가 좋고 인심이 좋아서 잘 들 사는데 아이들 키우기가 좀 곤란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여 그 동네 사람들이 도사를 붙들고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동네에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요.」라고 간청을 하니
도사가,



「이 동네 앞산에 고개 넘어 다니는 길이 있는 데 그 곳에 서낭이 있습니다. 그 서낭 앞에다 나무로 사람 형체를
만들어서 갖다 꽂아놓고 동네 사람들이 보름날로 날짜를 정해 가지고 거기에다 밥과 떡을 해서 잘 위하면 이 동네가 차차 부자가 되고 아이들을
낳아도 잘 키울 수 가 있습니다.」



라고 알려주었다. 동네에서 나이 많은 노인은 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젊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서둘러 그의 말대로
하게 시켰다. 동네 사람들은 돈을 걷어서 밥과 떡과 나물을 장만하고 큰 나무를 골라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서 서낭 앞에 갖다가 세웠다. 그리고 그
곳에 동네사람 모두가 모여서 나무에다 절을 하며 이 동네가 부자가 되고 자식들을 낳아도 잘 크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그런 다음부터 이 마을엔 아이들을 낳는 대로 일취월장하면서 튼튼하게 자랐다. 동네에서 장승나무를 사람처럼 해서
갖다 놓고 장승제를 지내니까 부자가 되고 자손들이 잘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차차 전파 되어서 다른 동네로까지 쫙 뻗어갔다. 그러자 다른 동네
사람들도,



「아! 그러면 우리동네도 그렇게 해야지. 우리 동네는 서낭이 없으니 서낭도 만들고 장승제를 지내자.」



고 하여 곳곳마다 장승제를 지내게 되었고 장승이 없는 동네에서는 동네입구에다 돌로 탑을 싸놓고 탑제까지도 지냈다.
그리하여 온 동네마다 보름이 되면 장승제를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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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니 역시 낭월동에는 도사가 출현을 했다는 것을 알겠다. 그 도사가 혹 이도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웃음 지어 본다.



이제 올해의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다. 낭월학당의 역사도 그만큼 두꺼워져간다고 해야 하겠고, 또한
운영자는 그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1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 가는 사이트를 둘러보면서 '인터넷의 낭월동장(朗月洞長)'의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낭월동을 찾아 주시는 벗님들이 보다 행복하신 庚辰년이셨기를 기원드린다. 그리고 다음의 새로운 한 해도 더욱더
즐거우신 한 해가 되시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경진년의 저물녁에 계룡산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