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중아중아~!

작성일
2000-09-25 00:00
조회
5467
중아 중아~!


제70화
-
중아 중아~!



 

중아중아
까까중아


 

얼마주고
깎았느냐


 

일전주고
깎았단다


 

무얼먹고
살았느냐


 

똥을눠서
된장하고


 

오줌눠서
간장하고


 

그래먹고
살았단다.


 


 

하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노래 가락인지 놀림소리인지 모를 곡조가 문득 생각이 나서 떠올려봤다.
이러한 육자배기가 나중에는 스피드하게 변해서 '중중까까중 얼마주고 깎았노'로 축약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봤다. 스님들이 자신들끼리는 중이라고 하면서 편안해
하지만 남들이 중이라고 하면 '이놈이 놀리나....' 하고서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일쑤이다. 여하튼 골목의 아이들이 탁발을 다니는 스님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이렇게
놀려먹던 그림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잠겨있는 벗님도 꽤 계시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문득 해봤다.


 


 

그나저나
낭월이가 오늘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황당한 타령을 들고 나왔을까... 싶은 생각이 드신
벗님도 계시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낭월이가 한담에 헛소리를 한다고 해서 누가 말리겠느냐만
그래도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셨다면
이제 낭월이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다고 해도 되겠다. 실로 이 노래를 한번 분석
해보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함께 생각 해보시자고 적어보는 것이다.


 


 

우선
얼마 주고 깎았느냐는 말은 절 집안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이 지은 말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겠다. 왜냐면 절에서 머리를 깍는데 돈이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극히 일반적인
그야말로 자신의 시각으로 생각을 해본 가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 과히 어렵지 않다고
하는 것을 금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변을 된장으로 하고 소변을 간장으로 한다는 것도 그렇다. 아무래도 절에는 먹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까 그런 발상이 나온 모양인데, 없는 것은 고기 뿐이겠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는 고기가 없으면 모두 없는 것으로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지금이야 별로지만 예전에는 고기반찬의 대우가 아주 특별한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아버님 상에 올려진 칼치 한도막의 행방에 대해서 늘 관심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적어도 40대 이후의 벗님이실 것으로 미뤄서 짐작을 해도 되겠다.
그런데 실제로 산에는 온갖 산나물이 가득하고, 그 신선한
자연산 나물을 흐르는 물에 씻어서 밥 한덩어리 놓고 쌈이라도 싸 보면 알싸한 향이 입
안을 감돌게 되면 과연 무엇이 부럽겠느냐는 생각을 해볼 정도의 벗님이라면 요즘 수입산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시대의 상황과 많은 비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밤을 까서
밥에 넣어도 좋고,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어도 어디에서 그보다 더 좋은 진미를 찾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다면 과연 허풍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리라고 본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절이라고는 별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냥 심심풀이로 지어서 되는대로 퍼뜨린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바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생각을 할 것이
없어서 그만 싱거워진다.


 


 

그래도
그렇지 이왕 내친김에 또 다른 중타령(!)은 없는가 싶어서 곰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또
하나의 노래가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만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면 믿어 주실지 모르겠다.
어디 감상부터 해보도록 하자.


 


 

중아중아
네칼내라
뱀잡아서
회를치고


 

개구리는
탕해놓고


 

찔래꺾어
밥을하여


 

잔치한상
벌려보자
덩더덩꿍 덩더덩꿍
태평가를
불러보자


 


 

아마도
이 노래를 보시고는 중이 고기 맛을 본 지가 하도 오래이다 보니 솟증(벗님은 짐작을
하실지 모르지만 한 일년정도 육식을 하지 않으면 밥상을 대하면 구역질이 나면서
채식거부의 증세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솟증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素症으로 야채거부의
증세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물론 책임은지지 못할 내용이지만...)이 발생하여 지은
노래라고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게 생각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스님이 지나가시는데 이러한 노래를 부르시진 말라고 당부를 해야 할 모양이다.
하하~


 


 

낭월이도
이 노래도 또한 앞의 노래와 같은 의미로 생각을 해서 스님들을 비웃는 의미로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에 녹아 있는 의미가 아스라이 살아나면서
그만 느낌이 확~! 달라지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지난 다음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벗님의 생각은 어떻신지 한번 의견을 물어도 보고 싶지만 역시 쉽사리
깨닫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봐서 낭월이가 생각한 것을 설명 드리도록 할 참이다. 앞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밥상을 봐도 벌써 그 분위기가 다르겠다만.....
하하~


 


 

우선
칼은 뭘 하는 물건인지부터 생각을 해봐야 하겠다. 여기에서 말하는 칼은 지혜의 칼(慧劍)을
말한다. 이 칼로 어리석은 무명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여기 저기에서 많이
등장을 하고 있으니 해석에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실로 소림사에서 무예와 도를 함께
연구하는 것도 지혜의 칼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은 지혜로운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판단을 해서 쓸모가 없는 주장은 단칼에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참 냉정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있겠지만 또한 '중의 본분사(本分事)'이기도
하다. 어리석음의 칼은 자신도 상하고 남도 상하게 하지만 지혜의 칼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법이다. 실로 낭월이가 때로는 용감하게 칼질을 할 적에는 이러한 마음도 약간은
있었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기에 어리석다고 판단이 되는 것은 가차없이 단칼에 잘라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도 없이 무슨 공부인들 해 나가겠느냐는 마음이 늘 바닥에서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뱀은 과연 뭘 의미하느냐는 것을 생각 해봐야 하겠는데, 이 놈의 상징적인 의미는 참
다양해서 어느 것에 포인트를 맞췄는지는 정확하게 답을 찾지 못하겠지만 일단 짐작이
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뱀은 원래가 창세기를
봐도 그렇고 전설을 봐도 그렇게 대체로 음험하고 계략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마도 상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분별심으로 세상을 저울질하려고 늘
저울추를 당겼다 늦췄다 하는
꾼들을 보면서 사람의 껍질을 쓴 뱀과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과연 아니라고 할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요즘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 능글거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남을 구렁텅이에 집어넣거나 사정없이
짓밟고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인데, 여하튼 이런 계략들을 모두
뱀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또 새롭게 다가온다. 뱀을 잡아 회친다는 말을 분별심을
정복하여 평싱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바꿔보시라. 과연 얼마나 의미심장하면서도
요약된 멋진 노래인가. 그리고 너무 급하여 불에 구울 겨를도 없이 그대로 칼로 배를
갈라서 회를 쳐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오래 끓이는 사이에 또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일까?
워낙 계교가 많은 놈이니까.



그리고
뱀의 의미에서 또 빼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음심(淫心)이다. 뱀의 수컷은 성기가 둘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24시간을 붙어 있는 것은 뱀 뿐이라고 하니 아마도 어쩌면 이
노래를 지은 의미 속에는 사랑분별과 함께 음란함의 본질도 매우 거슬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보게 된다. 실로 공부라도 좀 하려면 그 이성의 생각이 스물스물
배어나면서 젊은 혈기를 끓게 만든다면 참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본다.



 

이렇게
되면 이제 개구리는 뭐냐고 묻고 싶어지실 것은 당연하겠는데, 그럭저럭 아침 강의시간이
다가온다. 강의를 마치고 다시 적어야 할 모양이다. 그럼 짐시....


 


 

(2시간
후)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면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웬만하면 이어서 써야 하는 것이 낭월이 필법인데
강의시간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각설하고. 개구리타령을 해야 할 모양이다. 개구리는
길고 긴 겨울잠을 잔다. 그리고 발음에서 잠을 자는 누울와(臥)랑 같은 음이다. 그래서
개구리는 탕을 하는 것이 제격인데 다시 말하면 잠만 자는 성분을 불교에서는 수마(睡魔)라고
해서 잠을 많이 자면 성불을 할 수가 없다는 말까지 있는 상황인데 그 잠을 보글보글
끓여서 탕으로 하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끓이는 사이에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기운이 늦춰지면 또 잠이 올지도 모르니까 확실하게 끓여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도 곰곰
생각을 해보니 과연 그렇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게으름이다. 실로
도를 이루는 과정에서 무서운 적은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정진하는 마음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니까 또한 개구리와 함께 솥에
넣고 바글바글 끓여버려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요즘에서 또 생각을 해보면 노래방도 떠오른다. 가무를 잡히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사미승이라면 이미 이러한 것에 대해서 경계를 받아야 하느데, 노래를 하노라면 그
와중에서 도심이 흔들린다고 봤을 것이다. 그러니 개구리처럼 허구한날 노래만 부르다가
세월 다 보낸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았는지 한번 추가로 생각을 해본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찔레이다. 이것이 참 난제인데, 찔레는 고기가 아니고 초류인데 어째서
등장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벗님이 혹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다면 봄날에 찔레의
새 순을 꺾어서 껍질을 벗기고 아삭사삭한 줄기를 먹어본 경험이 있으시리라고 생각이
된다. 바로 그 찔레이다. 여기에서 등장을 한 이유는 그 찔레 순처럼 그대로 두면 대책이
없이 자라나는 자만심을 꺾어 버리자는 이야기이다. 자민심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을
얽어들게 되어 있다고 한다. 교만한 마음도 된다. 물론 그 작고도 단단한 가시로 무장을
한 채로 말이다. 실로 이 가시는 참 두려운 존재이다. 자신도 해롭게 하겠지만 남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무식한 사람을 제압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나름대로 한소식 했다고 잘난척하는 어중뜨기는 과연 남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이
잘났다고 하기 때문에 처치가 곤란한 법이다. 잘났다는 선량들을 보면 알 일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채로 떼를 지어서 소란을 피우면 세상이 다 시끄러우니
과연 찔레 가시를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니, 그렇다면 연약할 적에 바로 꺾어버려서 넝쿨로
엉켜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또한 수행자의 노력이라고 하겠으며 밥을 하는 것은
당연히 밥은 채식성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될까? 아니면 늘 밥을 먹듯이 교만심을 다스리자는
것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겠지만, 이러한 연결을 보면서 참 절묘하게 끌어다 붙였다고
해야 하겠다.


 


 


정도면 되었다. 세 가지의 장애만 극복이 되면 성불을 하는 것에는 별로 큰 장애가 없다고
생각을 해도 될 모양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는 또 이 세 가지만 해결을 보면 그대로
진행이 된다고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 바탕 잔치를 벌리게 되는데, 과연
잠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온갖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아만심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한다면 잔치를 열 번이라도 하고 말고다. 실로 낭월이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도 늘 부담이
되는 것이 그 잠이다. 잠을 하루만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는 온통 피로감으로 주체를
할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잠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효력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잠을 생리작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를
닦는 과정에서 큰 장애물로 관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잠을 자지 않고서도 살아가는
수행자도 많이 있는데, 또한 너무 자지 않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지나침은
또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노래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물론 확인을 할 길은 없으니
그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적어도 앞에서 살펴본 노래와는 그 의미하는
바가 천지차이라고 해야 하겠고, 과연 도인의 노래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노래를 들어본지도 벌써 25년도 더 되었나보다. 그래서 혹 가사가 올바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혹 이 노래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벗님이 계신다면 낭월이에게
메일을 주시면 고맙겠다.


 


 

       비내리는
초가을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