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딸래미의 방학숙제

작성일
2000-07-27 00:00
조회
5829
 


제62화-
딸래미의 방학 숙제 -부모님의 전기라나 뭐라나..."




오늘은 딸래미 금휘의 방학숙제를 하게 되었는데, 주제가 부모님의 전기를 써오라고 하는 것인데 부모님지 직접 써야 한다는 것이란다. 그리고 금휘의 학교에 대한 충성도는 너무 강해서 그냥 대충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기에 큰마음을 먹고 거창한 전기를 써 봤는데,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또 벗님 들 께 헛소리 삼이 올려 드린다. 그냥 웃으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내용에서 밥하는 이야기는 양념으로 끼워 넣었으며 합충변화에서 읽으셨던 벗님은 그냥 넘겨주시기 바란다.


==================================



박금휘 방학 숙제 부모님의 전기



부친 박주현의 이야기




이름: 박주현(朴珠鉉)


출생: 1957년 3월 18일 경북 청도에서 출생




1. 출생의 환경과 어린 시절



태어난 곳은 경북의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라는 곳인데, 밀양 박씨의 집성촌으로 거의 박씨들이 모여서 사는 고전적인 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친척이 되는 셈인데, 3세에 가정 환경으로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경남 창원군으로 이사를 했었다. 그로 인해서 고향의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고 하겠고, 오히려 성장을 한 창원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약간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국민하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서는 부모님의 하시던 장사가 잘 되지 않고, 또 어머님의 계모임이 부도가 나면서 가정 형편이 극히 어려워지면서 다시 충남 서산의 안면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어린 시절의 풍경은 여러 가지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안면도에서는 경상도 말로 인해서 놀림을 당하고, 또 선천적으로 왼쪽 눈이 백내장이 되는 바람에 늘 찡그리다 보니까 '엽총'이라거나 '눈찌그뎅이'라는 놀림으로 인해서 대인기피증이 발생하기도 했고, 그래서 학업에 대한 매력도 느끼지 못했으니 요즘말로 한다면 왕따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늘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로 인해서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찰을 많이 하게 되었고, 또 자연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늘 바다에서 게를 잡거나, 조개를 잡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자연과 더불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기도 하다.


학교의 성적은 늘 상위권에서 있었는데, 체육이나 음악은 극히 싫어해서 그러한 시간이 들어있는 날은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현상까지 발생을 할 정도였으며 협동심이나 어울리는 것에는 늘 뒤에서 어정거리는 편이었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홀로 떠도는 외톨이가 되었다고 해야 하겠는데, 아마도 잦은 이사로 인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성장을 했더라면 훨씬 똑똑한(?) 모양으로 성장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원망도 많이 했는데, 성장을 하고 나서는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어서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다만 이러한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해서 후에 내 자식은 절대로 전학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금휘의 위로 두 아들도 그랬고 금휘도 5학년 현재까지는 전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이 되는데, 아마도 이렇게 어려서 한 자신과의 약속은 지켜질 것으로 생각이 된다.



2. 때 이른 사회 생활



중학교를 간다는 것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가정 형편도 그랬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기술을 배워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당시로써는 상당한 목표였고, 그 중에서도 희망 사항은 텔레비젼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는데, 아마도 만화 영화를 좋아한 것이 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게 6학년이 되었을 적에 홍성에서 '재건중학교'라고 하는 곳이 있다면서 선생님들이 오셔서 거의 무료로 중학교를 다닐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그렇게라도 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막상 재건중학교를 가보니까 아직 학교로 인가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수업의 과정도 간이 교과서였고, 분위기도 허술했으며 자취를 하는 것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감을 생각하게 되어서 부모님의 부담을 고려하고 공부에도 별로 취미가 없다 보니까 1학기를 하고는 그만두고 취직을 하러 집을 떠났다.



처음에는 대구의 고모님의 소개로 이런 저런 일들을 배워갔는데, 마음에 드는 일이 없어서 자주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양산공장이나 등을 만드는 공장, 또는 인쇄소 등등 주로 몸으로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늘 문제는 약 3개월 정도가 되면 나타나게 되었다. 그 일의 구조가 대략 이해가 될 정도인데, 그 즈음이 되면 문득 드는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음..... 이제 대략 어떻게 일이 돌아가며 기술을 배우게 되면 어느 정도의 대우가 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장부로 태어나서 일생 그 일만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살기에는 저 일이 너무 보잘 것 없고, 매력이 없구나....... 차라리 다른 것을 찾아봐야 하겠다.....'



주로 이러한 생각이 들면 그만 일을 하기 싫어지고 그래서 또 다른 곳으로 기웃거리게 되지만 당시 나이 14세, 15세에 과연 할 수가 있는 일이 몇이나 되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렇게 방황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다양한 일에 대해서 골고루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느낌으로써는 주로 고통스럽고 피곤한 것이 전부였다고 해야 하겠고, 하루 종일 일하고 야간 작업까지 하고 얻어지는 수고의 대가는 기술을 배운다는 명분아래 참으로 하찮은 월급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월급을 버스비도 못되게 받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공업화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이겠지만 그대로 노동력의 착취에 희생되었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당시로써는 당연히 그런가보다 했지만 늘 마음속에서는 그러한 일을 해서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도 결국은 그 일 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고 하였지만 이내 그만두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개를 해주신 분으로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세상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고, '인내심이 없는 것을 보니 일생 빌어먹을 모양'이라는 꾸지람도 들었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할 수가 없어서 사회에서도 학교생활과 마찬가지로 빙빙 겉돌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형편이 되는대로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영화 속에 빠져들곤 했는데 세상에 희망이 없다 보니까 영화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16세 무렵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목욕탕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시기에는 주로 시간이 많아서 무협소설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기억이 늘 나기도 한다. 그 속에서는 언제나 중원 천하가 내 세상인 것만 같았고 돈키호테 영감의 마음도 언제나 이해를 할 수가 있었으며 무협 소설의 저자인 와룡생 선생을 통해서 늘 세상을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실로 꿈이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무림의 고수들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방법에 대해서 골몰하곤 했지만 결국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부딧치게 되면 또 꿈이 와르르 깨어지곤 했다. 그래도 그 시절에 책을 통해서 얻었던 세상의 이해는 상당했다고 생각을 하겠고, 그 영향은 아직도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 나온 무협소설은 거의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만화책도 무척이나 좋아해서 늘 주변의 어딘가에는 만화책이 있었고, 그래서 빌려보는 만화책에 대한 비용이 늘 아쉬웠던 기억도 많이 난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 속에는 만화 가게의 소설과 만화를 빌려보는 비용이 필요한 이유도 상당히 큰 이유에 속했던 것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만화가 선생님은 정한기, 김기태, 이근철, 경인, 김인, 김경언, 계월희, 김기백 씨 등등 아직까지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할 정도이며 특히 김기태씨의 현실적인 그림솜씨와 섬세한 표현력에 빠져서 만화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었지만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한기 선생의 코믹한 조막어사의 행동은 늘 혼자서 킬킬거리면서 웃곤 했는데, 세상에서의 재미가 없는 것은 책 속에서 얼마든지 보상을 받을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것으로 봐야 하겠다.



3. 환경의 변화



그렇게 현실인지 소설인지 구분을 하지 못할 지경에서, 어느 스님으로부터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스님은 할아버지 스님이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보거래이, 중이 되면 말이다. 어느 곳이나 가도 되고, 절에만 가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떠난다고 하면 차비까지 주는기라 니도 많이 댕기고 싶제? 중이 되면 가능한기라 헐헐헐~!"



아마도 이 말에 얼마나 뛸 듯이 기뻐했는지는 앞의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살펴보셨다면 그대로 짐작이 되실 일이겠다. 월급을 많이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은 먹고 자고 교통비가 해결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서 두 번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그 스님에게 출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언제나 부모님의 의견은 필요가 없었기에 스스로 결정을 하고 그대로 살았는데, 지금 생각을 해보면 당시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스님의 꼬임(?)에 넘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참으로 인연이란 그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스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다. 전국의 무전여행이 가능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출가의 생활은 직장생활에 비해서 수십 배나 힘이 들었고, 또 그에 대한 격려도 없었다. 오로지 새벽 2시 반부터 일어나서 예불로 시작된 하루는 저녁 9시까지 늘 뭔가를 해야 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늘 불경을 외워야 하는 일이 포함되었고, 외우는 것을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것은, 외우지 못하면 스님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인해서였고, 그래서 오로지 인내심으로 견디게 되었는데, 세상에서 처음으로 3개월 이상 견딘 곳이 되었던 것도 오로지 세상을 김삿갓처럼 떠돌아다니겠다는 희망으로 인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출가를 한 곳은 경남의 양산 통도사였는데, 경력이 쌓이면서 밥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일을 절에서는 '공양주'라고 부른다. 그래서 밥을 하는 일을 약 1년 정도 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도 역시 깨달을 것은 있었는데, 후에 책을 쓰면서 당시의 과정을 적어 놓은 것이 있어서 인용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알아두시는 것도 좋으리라고 본다.



========================================



★ 밥을 하는 데에도 道는 있다. (作食之道)


      -『알기쉬운 합충변화』에서 발췌함-



처음에 양산의 통도사로 입산을 했는데, 극락호국선원이라고 하는 특별수련원에 소속이 되었다. 당시의 조실(祖室)스님이셨던 경봉(鏡峰) 노사님 아래로 자신의 본래 면목을 찾아보려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곳이다. 그곳에서 일단 노사님을 친견했다.


"그래 집이 어데고?"


"예, 경북 청도입니다."


"그런데 왜 중이 될라카노?"


"도를 닦으려고 그럽니다."


"그래? 도를 어떻게 닦는기고?"


"........."


"그래 인연이 있구나, 공양주를 좀 하거라."


당시가 열 일곱 살이었다. 사실은 도를 닦으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김삿갓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목적으로 입산을 한 것인데, 도인 스님이신 분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돌아가라고 하실런지도 몰라서 얼렁뚱땅 둘러붙인 것이다. 그런데 도를 어떻게 닦느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혀서 더 이상 답변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때 당시에 아마도 이미 인간 박주현이의 공부역량을 파악해 버리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도를 통할  그릇은 틀렸고, 종구락 정도가 되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한숨이나 쉬어줄 정도'로 파악을 하셨을런지도 모르겠다. 주로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데 이골이 나있던 노사님이셨으니까 능히 짐작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인연이 있다고 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출가에 뜻을 두고 왔었지만 인연이 없다면서 가라고 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던 쫒겨가지만 않으면 중이 될 것으로 생각한 상황에서 공양주라고 하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날로 전공은 밥을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어려서 어머님이 자주 출타를 하는 이유로 해서 간단하게나마 밥이 되는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그것과는 전혀 상황이 다른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누구나처럼 쌀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에 불을 때다가 끓으면 불 빼고 뜸들이면 밥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밥을 조금 할적에는 통하는 이야기인데, 이미 한끼의 쌀이 50kg에서 100kg를 넘을 때에는 어림도 없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밥을 하기 위해서 온갖 연구를 다 했다. 벗님이 낭월이의 강의록을 읽어보면서 그래도 약간은 치밀하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당시로써도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실제로 온 신경은 오로지 밥다운 밥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7~8개월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뭔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던지간에, 아무리 빨라도 1년은 투자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부터 밥도사(?)가 어떻게 한 끼의 밥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실제상황이라고 상상을 하고 함께 느껴보시면서 잠시 산사(山寺)의 한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란다.



우선 맨처음 하는 일은 쌀을 씻어서 조랭이로 돌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일을 하는데에도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조심해서 조리질을 하지 않으면 밥에 돌이 들어가게 된다. 요즘은 석발기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쌀을 일지않고 그냥 밥을 해도 되지만, 당시에는 조리질을 하고나면 한 주먹씩의 돌이 나오는 때도 있었다. 그런때에는 다시 일어야 한다.


이렇게 쌀을 씻어서 돌이 들어가지 않도록 깨끗하게 일어서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일차적인 작업이 끝난다. 그리고 다음에는 나무를 준비하는데, 당시에는 아름드리 거목의 죽은 장작을 사용했었다. 그래서 나무하는 불목 처사1)와 신경전이 벌이진다. 물론 언제나 누룽지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가끔은 직접 장작을 구하기 위해서 도끼질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여기서부터 전쟁은 시작된다고 봐도 되겠다. 어쨌던 내가 맘에 드는 나무를 마련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서 밥을 시작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무를 마련했으면 준비완료이다.



다음은 솥에다가 물을 붙고 장작을 차곡차곡 쌓게 된다. 마치 성냥개피를 가지고 우물정자로 쌓는 것처럼 공기가 적당량 잘 들어가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화력을 발생하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장작의 속성을 이해하다 보니까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가마에서 불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솔가루를 맨 아래에 놓고서 불을 당기면 서서히 피어오르면서 불이 번진다. 아궁이에 들어가는 나무의 양은 보통 장정의 짐으로 한짐이 더 들어간다. 그렇게 쌓을 적에는 불꽃이 어떻게 해서 골고루 퍼질 것인가도 고려가 되어야 한다.


불이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면 뒤쪽의 밥이 타게되고, 또 앞쪽으로 당기면 이번에는 뒤쪽 부분의 밥은 설익고 앞쪽은 타게된다. 이것을 조절하는데에는 그 시간의 바람 방향도 참고가 된다. 바람이 아궁이 쪽으로 역류하면 약간 안쪽으로 나무를 넣어야 하고, 아궁이에서 굴뚝 쪽으로 불때에는 반대로 약간 앞쪽에다가 장작의 탑을 쌓는 것이다. 타는 도중에 약간 조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불이 붙으면서 솥바닥에 골고루 퍼지면 그 기분은 참으로 삼삼한 것이다.



그렇게 피어오르는 장작불을 보면서 잠시 황홀경을 즐긴다. 이때의 그 황금색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은 그대로 연화세계의 금련(金蓮)으로 착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불에 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솥 안에서 물이 끓어오른다. 불이 거의 절정으로 피어 오를 즈음이 된다. 이때는 물이 골고루 끓는지를 확인하면서 불의 방향을 조절하는데, 처음에는 불을 많이 건드리게 되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동으로 뚜껑을 열면 골고루 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된다. 이 불의 절정과 물의 끓음이 일치하지 않으면 올바른 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불에 대해서는 도가 트인(?) 셈이다. 완전히 끓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씻어서 건져놓은 쌀을 들어 붓는다. 이 작업을 하는 방법은 전문가에 따라서 쌀을 흩뿌리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낭월이는 그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먼저 들어간 쌀과 나중에 들어간 쌀이 받는 열량이 다르다는 것이 못내 찜찜해서였다.


그렇게 쌀을 털어 넣고서는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슬슬 젓기 시작한다. 이제는 물과 싸울 시간이 된 것이다. 빙빙 돌려가면서 젓는 이유는 아래는 빨리 뜨거워지고 위쪽은 늦게 뜨거워지는 헨디캡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물과 불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질때는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소식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십여분 정도 저으면 죽을 끌일때처럼 보글보글 하는 낌새가 나타난다. 이때에도 그 공기방울이 골고루 퍼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얼른 뚜껑을 덮고서 이제부터는 감으로 기술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략 한 5분 정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김이 한번 푸썩 나게된다. 그러면서 '쌔액-' 하는 소리가 나려고 한다. 평소에 동작이 느린 낭월이도 이때에는 매우 민첩해진다. 여기에서 초를 다퉈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궁이의 불타는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밥은 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쇠스랑으로 장작을 마구 긁어 내야한다. 물론 타고 남은 숫덩이도 남기지 않는다. 모조리 긁어 내버리고 나면 이제는 작업 끝이다. 그러면 솥 안에서는 자체의 열로 인해서 밥이 뜸이 든다. 일단 이렇게 되면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여기에서 불이 조금 지나쳤다 싶으면 아궁이의 불을 끌어낸 자리에다가 왕소금을 한주먹 갖다가 뿌린다. 그러면 소금이 터지느라고 '따다닥' 거리는데 그 소리도 또한 일품이다. 소금을 뿌리면 열기가 빨리 식는다는 것을 선배로부터 배운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도 水(소금)剋火(열기)의 소식이 숨쉬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당시에야 오행에 대한 공부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뜸들이는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온 절도량이 구수한 향기로 진동을 하게 된다. 그 냄새는 그때 이후로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이다.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구수하면서도 향기로운 쌀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하면 참선(參禪)2)에 열중하던 스님들이 슬슬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시간의 기쁨을 위해서 공양주(供養主)3)는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적어도 낭월이는 그랬다.



밥을 퍼야 할 시간이다. 몇 개의 양푼이를 준비한 후에 솥 뚜껑을 연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바탕의 김이 공양간에 퍼진다. 이때의 기분은 완전히 황홀한 상태라고 해야 하겠다. 그 희열감은 완벽한 작품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섞여서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주걱을 밥 솥에 한번 지그시 찔러본다. 그러면 그 밥의 상태가 즉시로 감이 온다. 마치 노련한 한의사가 환자의 손목을 한번 지그시 만져보는 것 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의사는 이미 손목을 만져보기도 전에 대충의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손목을 만져보는 것은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 뿐이다. 그 주걱을 찔러보는 순간 그러한 생각을 했었다.


그 후에 밥을 퍼다가 스님들이 공양드실 큰방 앞에 대령하는 것은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으므로 생략을 하겠거니와, 이렇게 되면 그날은 성공을 한 것이다. 만약에 실패작을 했을 경우에는 물론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두되도 아니고, 한가마나 되는 쌀을 가지고서 실패를 하면 참으로 의욕이 나지않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많이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밥을 굶길 수는 없으므로 응급처지를 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한번 처리하는 기술을 배워보시기 바란다. 써먹을 기회는 없겠지만 한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먼저 망상을 피우면서 밥을 하면 밥이 잘될 턱이 없다. 쌀이 햅쌀인지, 묵은 쌀인지, 통일쌀인지, 일반미인지를 냉정하게 확인해야 하고, 또 통통하게 불은 쌀인지, 방금 씻은 쌀인지도 구분을 해야 한다. 이들의 경우에는 각기 물을 먹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겨울의 쌀과 여름의 쌀도 다르다 그리고 방아를 찧은지가 방금인지 오래 되어는지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것도 쌀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찹쌀을 섞을 경우와 콩을 섞을 경우에 따라서도 물의 양은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망상을 하게되면 정확해질 확율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어쨌던 마음이 항상 여여(如如)4)할 수는 없고, 가끔은 밥이 된밥으로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된밥이라는 판단도 신속하게 해야 한다. 늦으면 역시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일단 생쌀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생쌀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잽싸게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골고루 뿌린다. 그리고서 뚜껑을 닫고서 불을 2~3분 정도 지체시킨다. 물론 바닥은 타게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김이 한소꿈 푸썩하고 나면 성공이다. 약간의 탄냄새는 물론 2차적인 작업을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불을 빼고서 비상시에 사용하는 광목천을 물에 적신다. 다시 뚜껑을 열고 밥 위에 천을 편 다음에 방금 아궁이에서 퍼낸 숯불 덩어리를 솥 안으로 집어 넣는다. 그리고 뚜껑을 덮어버린다. 그러면 수증기로 인해서 숱불은 이내 질식을 하게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밥 속에 배어있던 불냄새를 흡수 해버린다. 이것은 정수기에 활성탄을 넣어서 냄새를 제거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원리이다.


선방 스님들이 밥타는 냄새를 맡고서 일단 실망을 하게 되는데, 막상 밥을 먹어보니까 불냄새가 나지 않으면 의아해한다.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양주 출신 스님들은 안다. 공양주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를... 참으로 경험은 무서운 안목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공양을 다 하고 나서 공양간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행자님, 오늘 숯을 퍼담느라고 바쁘셨더구먼. 하하하~!"


이렇게 말씀을 하면 그냥 마주 보면서 빙긋이 웃는다. 이것이야 말로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고, 그야말로 목격도존(目擊道存)5)이 되는 것이다. 그냥 보면 아는 그런 것 말이다. 공양주를 해본 사람끼리 통하는 그 감정은 공양주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된밥이나 설익은 밥은 이렇게라도 응급처치가 가능한데 이미 진밥은 뚜껑을 열고 물을 퍼내봐도 퍼낼 물은 없기 때문에, 대책이 없다. 이러한 지경이 되면 공자님의 '과유불급(過由不及)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도 꽉 끼게 들어맞는지 참으로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4. 행복을 뒤따르는 시련



드디어 스님이 되었고,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세상 구경에 나섰는데, 당시의 나이는 19세였고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약 반년을 전국을 돌아다니고 나니까 더 갈 곳이 없었고, 그래서 비로소 도를 닦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서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목적이 생겼던 것이며 비로소 살아갈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를 열 심히 하였고, 그렇게 노력을 하여 도를 통한 다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지금 생각을 해보면 가장 기특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하하~



그렇게 마음을 모아서 공부를 하다가 눈병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루는 자고 났는데, 눈앞에 온통 붉은 핏덩어리가 어른거리는데 아무런 통증도 없이 그런 현상이 생겨서 병원에 가서 하루 종일 검사를 하고 얻은 결론은 '초자체혼탁'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수술도 불가능해서 앞으로 장님이 되는 것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더라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기도나 하다가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왼쪽 눈은 태어나면서부터 백내장으로 실명이고, 하나의 눈으로 살아 왔는데, 이제 초자체 혼탁으로 실명이 되었으니 더 살아서 뭘 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장님이 되어서 기도나 하다가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기도처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거니와, 그 기도에 대한 부분은 종교에 연관된 문제라고 봐서 설명을 생략하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서 늘 지켜보는 분이 있다고 하는 점만 말씀을 드리도록 한다.


다시 공부를 하여 더욱 신이 났으며 그래서 대학까지도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 서울의 검정고시 학원에도 가봤는데, 역시 사회의 학문은 별로 매력이 없어서인지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증세가 다시 발생하여 그만두고 불경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20대의 시절을 보내면서 스님으로써의 자질을 점차로 갖춰갔다고 해도 되겠다.



5. 결혼과 고통



28세에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 여인이 지금의 아내이며 금휘 모친이기도 하신 홍종금 씨이다. 이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속세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도를 닦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고, 그래서 둘은 결혼을 하고 그야 말로 빈주먹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꿈을 키웠다. 물론 스님도 결혼을 해서 살아갈 수가 있겠지만 당시의 자존심에서 그렇게 파계승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당당하게 환속을 해서 일반 불자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끝에 둘이서 살림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사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며 땅 한 평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2년만에 포기를 하고 장사의 길로 나섰는데, 역시 없는 돈으로 할 수가 있는 장사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려고 취직도 해봤는데, 예전의 그 적성(3개월짜리)이 나타나면서 허무해지는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는 또 그만두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실망이 무척 컸겠지만 용케도 아내는 인내심으로 남편을 지켜봐 줬고, 늘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를 해준 따스한 마음씨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으며 아마도 앞으로도 이러한 마음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 큰아들 청원이가 태어났고, 그래서 언제까지만 방황을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다시 고민을 한 끝에 역시 배운 도둑질이라고 하듯이 다시 절에서 생활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보게 된 것은 32세 무렵이었다. 물론 이제는 자존심을 논할 단계가 아니었으며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한 끝에 절에서 부처님을 모시면서 마음이 답답한 사람에게 편안한 길을 알려주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정하기로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절대로 필요한 것은 운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을 한 운명을 연구하는 공부는 그로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점차로 연구가 쌓이면서 이제는 아예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으니 참 인생의 미래는 알 수가 없는 일인가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운명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동안의 일련의 삶에 대한 답안지가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나서는 좀더 명확하게 연구를 해야 하겠다고 판단을 하여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는 도중에 1992년도에 상월면 월오리에 있는 서니암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 해에 서니암의 주지가 되었으니 그래도 나름대로 약간의 결실이 있었던 셈이라고 해야 하겠다.



6. 컴퓨터와의 만남



청정비구승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살아가기는 틀렸지만,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서 더불어 살아가는 스님이 되기로 하고, 파계승이라도 좋다면 찾아오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과 공부를 겸하게 되었는데, 이미 금휘까지 있는 상황에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고, 그 중에서도 마음이 쓰이는 것은 아이들이 혹 스님의 자식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겠느냐는 염려가 가장 컸는데, 다행히도 아이들은 잘 어울려서 성장을 해 줘서 늘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도 님들께 엽서를 보내기 위해서 컴퓨터를 한 대 구입하게 되었는데, 386이였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거금이었는데, 이 컴퓨터를 구해서 워드를 배우고 프린트를 하면서 점차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통신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천리안으로 시작을 해서 나중에는 하이텔로 옮겼는데, 하이텔에는 한의사 통신동호회가 있어서 그 곳이 맘에 들어서 가끔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역학(易學)에 대해서 공부를 하자는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고,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동참을 하여 급기야는 역학동호회(go ohaeng)를 발족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사주학을 연구하는 자료를 정기적으로 게제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대표시삽이 되어서 2대까지 운영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자료들은 후에 『왕초보 사주학』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되었고, 상당힌 인기를 끌기도 했던 모양인지 현재는 10쇄까지 나와있는 상황이며 이로 인해서 연속적으로 책이 나오다 보니까 금년 7월까지 총 10권의 저서가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인터넷에서 강의장을 마련하여 도움을 나누고 있는데, 사이트는 www.gamlo.com이며 낭월명리학당으로 이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되고 나서는 주변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으며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아지면서 비로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물론 현재의 가정은 행복하고, 아이들은 건강하니 더 없이 기쁜 일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행복이 지속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누구나 해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남들은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하는데, 과연 예전에 한 가지 기술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방황을 했던 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결코 나빴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래서 내 아이들은 삶에서 방황을 하더라도 절대로 말리지 않을 셈이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협조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할뿐이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에나 변함이 없다.



이제 상월면 상도리에 조그마한 터전을 1996도에 비로소 마련하고 또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곰곰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기를 수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려서 떠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며, 또한 왕따의 경험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내 아이들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완전한 인생이 되기를 늘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지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각자 생긴 대로의 능력을 갖고 자신의 분야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 자신은 좀더 이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하여 완성시키는 것이 한 목적이고, 그래서 이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혼란을 겪지 않고 훌륭한 조언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강의를 하는 일은 주로 그러한 방향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으며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또한 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7. 마무리와 더불어



금휘가 방학 숙제로 부모님의 전기를 직접 받아 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아직 전기를 쓸 나이는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전기를 요구하는 것의 목적은 아마도 가정환경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특수한 가정에 속할 수도 있는 경우라고 봐서 참고가 되실 듯 하여 생각 나는 대로 적어 봤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



"금휘야, 이만하면 되었니?"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



1) 절에서 땔 나무만 전담하는 남자를 그렇게 부른다. 스님은 아니고 월급을 받거나, 무보수로 수양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자기가 끌고 다니는 몸뚱아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서 앉아서 버티고 있는 것을 참선한다고 한다.


3) 음식을 담당하는 사람의 이름인데, 특히 밥을 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명칭이다.


4) 그 마음이 한결같아서 누가 욕을 하던, 칭찬을 하던 움직이지 않는 도인의 경지를 말한다.


5) 목격도존이란, 서로 눈빛이 부딧치는 곳에서 상대방의 도가 얼마나 되는 지를 판단해버리는 경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