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道를 도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

작성일
2001-03-20 12:4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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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道를 도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

때로는 정말 뜻밖에도 큰 수확을 얻는 수도 있는 모양이다. 단지 책의 제목만 보고서 미리 어떤 내용일지를 짐작했다가 완전히 빗나가버린 경우는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상식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생각을 거듭 되새기게 만드는 내용으로 인해서 아무리 바빠도 이 책은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이 있어서 다 보기도 전에 성급하게 벗님들께 소개를 해 올리는 낭월이다.

1.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그 글귀는 아마도 익숙하게 보신 경험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이 된다. 물론 처음 보신다면 그래도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다. 내용은 노자(老子) 님의 도덕경 제일장의 글이다. 아시는 대로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갑자기 들고 나와서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시는 벗님은 시절상황에 좀 둔하신 것으로 봐야 하겠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된다고 하는 벗님이 계시다면 바로 그 점으로 인해서 낭월이 수선을 피우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참이다. 여하튼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여쭤봐야 하겠다. 아마도 대개의 벗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셨을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대략 이 정도의 의미로 이해를 하셨다면 대체로 무난한 점수를 받으셨을 것으로 보겠고, 낭월도 실은 이렇게 해석을 해서 무리가 없는 것으로 이해를 했었기 때문에 당연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고서 갑자기 안달이 나는 것이다. 왜냐? 잘못된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은 또한 학자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낭월이 미쳐 몰랐던 것이지만 이렇게 알게 되고 나서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한 가르침을 주신 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벗님께도 알려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낭월의 의견을 전달하기로는 낭월한담이 가장 빠른 것이니까 당연히 여기에서 소견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는 도라고 하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 갑자기 봄날에 눈사람 허물어지듯이 그렇게 우수수~ 무너질 줄이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이렇게 허물어버리고 나니까 갑자기 밝은 세상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너무 홀가분한 마음에 너무나 흥겨운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보다.

2. 도를 도라고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이렇게 설명을 도와주신 분은 이경숙 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인이다. 그의 글은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통해서 전달이 되었다. 그래서 낭월도 처음에는 그냥 기대를 하지 않고 코메디를 함께 하시나보다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펼쳤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띵~!' 하는 기분이 들면서 정신이 화들짝 들면서 깜짝 놀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도 보지 않고 단지 제일장의 한 글을 보고서는 책값을 지불하고 허겁지겁 돌아와서는 눈을 비비면서 읽고 있다. 그리고 너무도 재미있는 가르침 속에서 모르던 것을 하나하나 알게 되었고 비로소 도덕경을 한번 곁눈질로라도 봤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道可道-도는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非常道-꼭 도라고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보니 너무도 간단하게 직선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고 이러한 간단한 의미를 너무 어렵고 심오하게 이해를 하려고 시도했던 거추장스러운 낭월의 소견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궁금해진다.

"名可名-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非常名-꼭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또 한번 간결한 의미 전달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노자의 그것과 바로 연결이 되면서 아무리 우둔한 낭월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내용은 도올선생의 강의에 대한 바로잡음을 목적으로 쓰여지는 바람에 다소 빈정거리는 어휘도 등장을 하고 또 그러다 보니까 과격해지는 기분도 느끼겠지만 천하의 대 철학서인 노자를 왜곡시켰다는 의미만으로도 어떤 말을 해도 달게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낭월도 스스로 도올 선생처럼 이해를 했을 것은 당연하니 또한 함께 방망이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혹 낭월의 글에서 이 구절을 해석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 바로잡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3. 너무나 간결하고 명확한 논리성

벗님도 혹 생각이 있으시다면 함께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무엇이 갖고 무엇이 다른 해석인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원문에 충실한 해석은 이경숙 선생의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알겠는데 함께 비교를 해보면 어떻게 되는지도 참고할 만 하다고 여겨진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
"도는 도라고 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도를 도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으시다면 벌써 본론을 파악하신 것으로 봐도 좋겠다. 그러게 말이다. 이 글의 뜻을 생각하면서 도는 도라고 해도 틀렸다는 의미로 봐서 그러니까 도라고 할 수도 없는, 즉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이미 틀려버린 의미로 참으로 심오하게 생각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도는 도라고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고....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너무나 선명한 설명에 명색이 공부한다는 마음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물론 현명하신 벗님의 판단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4. '무위(無爲)'는 무슨 뜻으로 알고 계셨어요?

노자를 일러서 무위자연철학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이라고 하는 문구가 '無爲'이다. 그 무위에 대해서는 올바른 해석을 하였을까를 생각해 봐야 할 시간이다. 물론 결과는 '글쎄올시다...'이다. 낭월은 무위를 뭔가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를 했었다. 自然이라는 말이 뒤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냥 일상적인 용법으로 풀면 '하지 않는다'가 되는 것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爲의 의미는 '할위-한다' '될위-된다' 등등의 의미로 이해를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경숙 선생은 '꾸밀위-조작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말에 또 한 대 얻어맞았다. 그렇다면 무위는 꾸미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생긴대로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비교를 해보도록 하자.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다."

역시 분명한 것은 꾸미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고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무위자연의 뜻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크게 벌어진 오차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왕에 더욱 명백한 의미가 전달된다면 당연히 그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러니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냥 빈둥거리고 놀아야 한다는 말이냐는 토라도 달고 싶은 위의 해석에 비해서 아래는 생긴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의미로 토를 달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 통쾌한 것이다. 그래서 또 한 수를 배운 즐거움에 이렇게 떠벌리고 있으며 벗님도 가능하면 한번 이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유를 드리는 것이다.

5. 어! 이경숙 선생 생일이 있네~!!!

"흐흐~"

정말 낭월이가 누군가. 사주쟁이 아닌가 말이다. 사주쟁이 눈에 생일이 보인다는 것은 일단 만세력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코스라고 해야 하겠다. 생일은 1960년 5월 8일에 음력인지 양력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두 사주를 모두 적어 놓고 어울리는 성격을 살펴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성격분석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도 참고로 말씀을 드릴 참이다.

(1) 양력일 경우

時 日 月 年
모 丙 辛 庚
름 申 巳 子
51 41 31 21 11 01
乙 丙 丁 戊 己 庚
亥 子 丑 寅 卯 辰

(2) 음력일 경우

時 日 月 年
모 庚 辛 庚
름 申 巳 子
59 49 39 29 19 09
乙 丙 丁 戊 己 庚
亥 子 丑 寅 卯 辰

1) 그의 성품은 책을 봤을 적에 매우 비분강개한 성분이다.
2) 사사로운 이익도 좋지만 공익을 생각한다.
3) 자신의 주장이 매우 강하다.

이상과 같은 성분은 책을 보신다면 바로 이해가 되실 것으로 봐서 긴 설명을 하지 않을 참이다. 아마도 양력생일이라면 두려움이 많은 성분이 아닐까 싶다. 정재와 편재가 있어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주체성이 약해서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기에는 너무 비겁이 약한 구조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실제 상황과 동떨어진 형상이라고 이해를 해서 무리가 없겠다.

그렇다면 음력일 경우에는 어떤가 보자. 庚申일주이다. 대단한 주체성이고 옳지 못함은 그대로 밀고 나가서 고쳐야 하는 주체성이기도 하다. 매우 유력해 보인다. 다만 너무 직선적인 것은 상관이 너무 멀고 식신이 암장되어서라고 하겠다. 또 깊이 연구한 것을 보면 식신이 있어야 가능하겠는데, 양력생일로 봐서는 식신이 무력해서 아무래도 초지일관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에는 무력하다고 봐서 오히려 음력생일일 가능성이 더욱 많다고 하는 의미를 부여해본다.

(3) 時柱는 무엇일까?

시를 모르는 상태라도 되겠지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결말을 지어버리는 것으로 봐서 이러한 경우에는 편재가 있어야 제격인데, 앞의 연월일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時干에 편재가 있어야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庚申일에는 시간에 편재가 나오려면 甲申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면 편재가 무력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것으로 이해를 해보도록 한다. 그리고 어쩌면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고 했으니까 月支의 편관 외에도 時干에 편관이 있을 가능성도 고려를 해 봐야 하겠다. 그렇게 되면 丙子시거나 병술시가 가능하겠는데, 무엇이 되거나 용신은 火라고 봐서 무리가 없겠다. 물론 시간에 식상이 있다면 수를 용신으로 삼아도 좋겠다. 그리고 함리적인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봐서는 정관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이렇게 자꾸만 생각을 하다가 보면 시주 열세개가 모두 등장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므로 대략 이 정도에서 줄이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천하의 경신일주가 되어놓으니까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치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호통을 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실제로 많은 오류가 바로 잡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왜냐면 그의 설명이 너무도 간단명료하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더욱 밝은 설명을 한 책이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는 이 이경숙 선생의 글이 가장 명확하다는 느낌이 든다.

6. 일독을 권합니다.

벗님의 동양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울 수가 있다고 판단이 되어서 이렇게 한담을 빌려서 권유를 드린다. 아직 1권도 다 읽지 않았지만 나머지도 구해서 볼 참이다. 이미 그의 명쾌한 논리에 반해버린 낭월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러면 일전에 도올 선생에 대해서 쓴 글은 취소할 생각이 없느냐고 혹 묻고 싶으신 벗님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다. 그 당시의 생각은 또 그때 생각이므로 그 또한 하나의 역사라고 이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없애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늘 반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둘 참이다. 그리고 그를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가 나쁘다고 왜 탓을 한단 말인가. 도올 선생도 자신의 삶이 소중한 것이다. 비록 설명에 올바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역시 그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도 많다고 해야 아마도 학문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 스승이라는 말이 가장 정답이라고 하는 고인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