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甘露法鼓 - 북 이야기

작성일
2001-03-2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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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감로법고(甘露法鼓) - 북 이야기


 

 

1. 인연의 시작


옛날, 열 네 살 먹은 박주현이라고 하는 인간이 홍성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적에 이야기이다. 1학년 시절에 봄소풍을 인근의 수덕사로 가게 되었는데 수덕사에서 본 것은 커다란 법고였다. 그렇게 큰북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지만 그 북을 한번 쳐보고 싶어서 달려들었다.

그런데 출입금지 표시가 눈에 들어오고 감히 그 선을 넘어서 가지 못한 것은 사주의 정관으로 인해서이다. 가능하면 하지 말라는 것은 지키자는 것으로 인해서 그냥 쳐다만 보고 돌아 왔다. 그러면서도 뇌리에는 그 북을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과 겹쳐서 미련을 남기게 되었다. 이것이 그 인연의 시작이다.

물론 그로부터 두어 달 후에는 중학교의 공부가 재미가 없다고 판단을 하고는 세상 공부에 눈을 돌린 나머지 자퇴하고 공장을 향해서 출발을 했거니와 북과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봐서 생략을 한다. 그래서 학력은 여기까지 뿐이다. '중학교 1학기 중퇴'라고 말이다. 하하~

2. 팔공산 동화사


작은 암자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큰 절로 옮긴다고 한 것이 동화사이다. 혹 벗님 중에는 동학사와 동화사에 대해서 혼동을 하시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동화사는 팔공사 동화사(桐華寺)이고 동학사는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라는 점을 이해하고 계시면 혼란은 없으리라고 말씀을 드린다. 여하튼 동화사에도 법고는 있었고, 순간적으로 그 예전에 수덕사에서의 북이 눈 앞에 겹치면서 달려들어서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자가 어디 감히 법고를 만져~~!!!"

이렇게 호통을 당하고 나서는 목적하는 스님이 되는 일이 더욱 기다려지게 되었다. 참으로 북 한번 쳐보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흘렀다. 동화사에서 스님이 되었느냐고요? 스님들 라면 끓여먹었다고 시비 걸었다가 쫓겨났습니다. 하하~ 행자는 무슨 일이나 보고도 못본 것이라고 하는 법칙을 몰랐던 탓이지요 뭐.

3. 통도사 강원에서


통도사는 경남 양산에 있고, 그 산내에 암자로 극락암이 있는 곳으로 산의 이름은 영축산 또는 영취산이라고 불렀는데, 대체로 양산통도사라고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시리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그 곳에서 비로소 대망의 스님(법고를 칠 자격)이 되었는데, 스님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북을 칠 수가 있느냐면 또 그렇지가 않아서 북을 담당하는 직책을 얻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고 하신다면 그게 절의 법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수 밖에 없다. 통도사에서 북을 치려면 통도사 강원(講院)에 입방(入房)을 해야 하는데, 실은 여기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한 한자 공부가 적천수를 이해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 과연 고마운 인연이라고 해야 하겠다.

4. 대망의 북채는 잡았건만.....


여하튼 통도사 강원에 입방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북을 칠 자격을 얻었는데, 또 기본기를 익히는 작업이 없이는 감히 북의 면에 북 채를 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통을 두드리면서 가락을 익혀야 했던 시간들이 또 몇 개월 지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익히는 시간도 하루 종일 하는 것이 아니고 새벽과 저녁에 예불을 하기 전에 약 15분 정도의 시간 중에만 해야 하는데 이것도 경쟁이 심해서 저녁에는 상반의 고참 스님들 차지가 되어 하반의 쫄따구에게는 감히 북 통을 칠 순서도 오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면 아마도 벗님은 '쯧쯧~~ 참말로 고생이 많구만.....' 이라고 하실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이것도 또한 현실이다.

왜 상반의 스님들이 저녁에만 북에 매달리느냐면 관객이 많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절의 식구들만 예불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저녁에는 늦은 시간에 사찰 참배를 하는 방문자들로 인해서 북치고 종치는 부근에서는 다소 북적이는 시간이 많은 법이다. 왜냐면 방문자의 입장에서는 늘 매달려 있기만 한 북이 울리는 시간에 그냥 지나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소리가 나는 주변으로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다소 상관끼가 있는 선배 스님들이 장삼 자락을 휘날리면서 실력을 뽐내게 되고 그래서 그 시간에 연습을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시리라고 본다.

5. 둥 둥 둥~!


이렇게 파란만장한 사연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북을 울릴 수가 있게 되었을 상황의 감격은 적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고 짐작만 하실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울리는 북소리에 취해서 반드시 언젠가는 아무 때나 쳐도 되고, 누구나 쳐도 되는 북을 하나 마련 할 것이라는 다짐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물론 그로부터 흐른 시간을 생각해보니 어언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 버렸구나........ 참 적지 않은 시간이라고 해야 하겠다.......

6. 북을 만들 계획을 세우다


2000년 봄이었을 것이다. 감로사에 북을 하나 달자는 계획을 비로소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북을 만드는 곳에 연락을 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전화번호를 눌렀다.

"북을 만드는 곳인가요?"
"그렇습니다."
"북을 만드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나요?"
"크기에 따라서 다릅니다. 얼마만한 크기를 하시려고요?"
"다섯자 정도면 되겠습니다."
"크네요. 그 정도면 1천 5백만원입니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많이 들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비용에 대해서 기가 죽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여하튼 감로사 불자님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나름대로 주머니 돈과 쌈지 돈을 모아서 그 해 가을에 넘겨주셨는데, 200여만원 정도였다. 물론 산골의 신도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돈도 큰돈이라고 해야 하겠고, 또 더욱 의미가 큰 것은 누가 얼마 냈다고 하는 공개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났는데에도 그냥 시주를 한 것이 더욱 고마웠다.

주지 스님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하겠느냐는 믿음으로 시주를 하셨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어느 명리학당 회원께서도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거금을 희사해 주시기도 하는 바람에 약 300만원 정도의 자금이 마련되었다. 이제 이 돈으로 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낭월의 몫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현실이었으니 좀 답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예 내가 스스로 북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우기에 이러렀다.

7. 설계도


우선 어떻게 북통을 마련할 것이며 가죽은 어떻게 구입을 할 것이냐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 봤다. 무슨 약품처리도 해야 한다고 연지님은 말렸는데, 예전에 북을 만들 적에 과연 무슨 약품을 처리해서 만들었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통만 있다면 가죽을 씌워서 말린 다음에 두드리면 북이 되지 않겠느냐는 매우 원초적인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곰곰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론은 북통을 FRP로 만들자는 작전을 세웠다.

그래서 그러한 관련 공장을 순회한 결과 또한 틀을 만들고 본을 뜨고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두께도 5mm 정도라고 하는 말에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10cm 정도는 되어야 할거라고 했더니 비용이 엄청 상승하면서 그렇게 만들 방법도 없노라고 손을 내어 저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정화조 통 말이다. 큰 건재상에서 발견한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직경 150cm의 정화조를 발견한 순간, 눈에서는 불이 튀었고, 바로 낭월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라고 무릎을 쳤다. 바로 들어가서 가격을 흥정하고 30만원을 지불하고는 운반을 부탁했다. 이 녀석의 위와 아래를 자르고 손질을 하면 멋진 북통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이미 만들어진 북을 손에 넣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다만 두께가 너무 얇은 것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북채로 두드리다가 보면 깨어질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 대안으로 표면에 충격을 완화할 수가 있는 도료를 씌울 계획을 세운 것은 빠대라고 하는 것을 페인트가게에서 판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한 응고성 원료가 있다면 충분히 보완이 될 것이라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는 여러 곳을 뒤진 결과 페인트가게에서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찾을 수가 있었고, 그래서 4통을 주문하고 그에 대한 비용으로 약 20만원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제 가죽만 구하면 된다. 동네에는 한우를 취급하는 정육점이 있는데, 연지님을 시켜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소 한 마리의 가죽은 2만원이면 구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즉시로 마련을 하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연지님은 낭월의 설치는 폼새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북통이나 마련되거든 알아보자고 하면서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추위가 다가오고 천상 봄날에 일을 하기로 하고 계획은 보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8.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설을 지내고 난시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주지스님을 부탁합니다."
"예, 주지입니다. 뉘신지요?"
"여기는 북 공장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어쩐 일이신지요?"
"어떻게 스님 북을 만든다고 하신지가 일년이 되었는데, 진척이 되셨나 하고 안부 드립니다."
"아직 만들지 못했습니다."
"만들지 못한 이유가 있는지요?"
"그야 돈이 없어서지요."
"그러신가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께 스님의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한번 찾아뵙자는 말씀을 하셔서 방문을 하고자 합니다. 언제 가면 되겠습니까?"
"그야 내일이라도 오시지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하고 다음 날 찾아온 사장의 부인이라는 여인은 절을 둘러보고서는 기가 막힌 모양이다. 그래도 법고를 생각할 정도라고 하는 절이라면 규모가 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초라하게 조립식으로 지어진 도량에서 법고를 달려고 한다는 것은 일단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 부인은 북을 만들려고 정화조를 사왔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대로 감동을 하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북을 좋아하는 스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뵙는다고 하는 말도 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북이란 말이다. 북.....

9. 흥정


"스님, 북을 꼭 하고 싶으시네요?"
"그럼요. 내가 만들라고 합니다. 날이 풀리면요."
"근데 그렇게 해서는 북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여하튼 하다가 버리면 다시 할 생각이거든요...."
"얼마면 되겠어요?"
"여하튼 지금 모아진 돈은 300만원입니다. 그 돈에서 준비하느라고 지출한 50만원을 빼고 250만원 남았네요."
"그럼 1천만원에 북을 만들어 드리면 되겠어요?"
"안 되겠는걸요...... 그렇게 되면 진작에 이야기를 했지요."
"외부에 용 단청은 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럼요. 소리만 잘 난다면 그림이야 상관없지요."
"그럼 300만원을 더 빼 드릴 수도 있어요. 이건 스님께 북을 시주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이사님이 하도 감로사 스님 이야기를 해서 도대체 어떻게 되는 형편인가 궁금했는데 와서 보고 감탄을 했어요. 이 정도의 선에서 가능하시다면 작업을 시키도록 할께요."
"그런데 일시불로 드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면 좋겠어요?"
"몇 달로 나눠서 지불하겠습니다. 그래도 좋다면 만들어 주시고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을 시키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소리는 잘 나게 해주세요."
"소리는 우리의 명예니까 염려마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10. 북이 들어오다.


일단 북을 만들려고 마련한 정화조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에 북을 담을 집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다. 물론 북을 둔다고 해서 멋지게 목조 건물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럴 생각도 형편도 없다고 해야 하겠다. 전에 공사를 하다가 남은 파이프를 이리저리 잇고 잘라서 비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법당채 옆에다가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3월 6일 오전에 드디어 북이 실려왔다. 그리고 정해진 자리에 놓여진 북은 그 자체로 황홀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낭월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감상이 어떠했을지는 그 동안의 경과를 보신 벗님이라면 충분히 짐작이 되셨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 날 저녁에 고모님과 식구들은 북이 오래도록 잘 울려달라고 북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그렇게도 마음대로 치고 싶었던 북을 두드리면서 축생들의 업장 소멸을 빌었다.

11. 북을 치는 이유


그렇다. 북을 왜 치느냐고 질문을 하실 무렵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미리 이 부분의 이야기를 드리도록 할 참이다. 참고로 절에서는 네 가지의 물건이 있는데, 이를 일러서 사물(四物)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절에 가시면 보실 수가 있을 것이니 앞으로는 살펴 보시기 바란다.

(1) 범종(梵鍾) - 화생(化生)을 위한 법문


어느 곳에서나 부처가 있는 곳이면 함께 있는 종이다.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르는 것도 바로 범종이다. 그리고 서울 종로에서 초하룻날에 울리는 보신각의 종도 범종이다. 이 종을 절에서 울리는 이유는 영계(靈界)의 무주고혼들을 일깨워서 깨달음을 얻도록 하고 극락세계로 태어나라는 의미로 치게 된다. 그리고 귀신 등은 변화로 생겨난 생명체이므로 화생이라고 부르고 화생을 위해서 마련된 법구이다.

(2) 법고(法鼓) - 태생(胎生)을 위한 법문


절에서 치는 북을 법고라고 하는데, 북을 치는 것은 네발이 달린 짐승을 위해서 두드리는 것이다. 다만 네발 중에서도 파충류는 해당이 없다고 하겠는데, 이유는 배꼽이 없기 때문이다. 즉 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오로지 모태에서 탯줄을 달고 태어난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사람도 당연히 여기에 해당이 된다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란다. 태생이 북소리를 들으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진동의 파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3) 운판(雲版) - 난생(卵生)을 위한 법문


구름이라고 하는 글자가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날짐승들의 영혼을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는 법구라고 한다. 여하튼 그렇게 전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데, 깃털이 달린 짐승 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4) 목어(木魚) - 습생(濕生)을 위한 법문


습생은 습기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종류의 생명체를 말한다. 물고기라고 하겠는데, 실은 물고기도 알로 태어나는 것이 있어서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씀을 못드리겠다. 다만 곰팡이 등과 같은 종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생긴 형상이 물고기여서 아무래도 어족은 모두 여기에 포함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이상을 四生이라고 해서 모든 중새의 총칭으로 말하게 되는데, 절에서는 이러한 중생계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사물을 울리게 된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러니까 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북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쿵쿵 울리는데 종소리는 영계를 위한 파장이고 북소리는 심장이 콩콩 뛰는 인간 등을 위한 소리가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12. 북을 치는 방법


낭월도 정확히는 잘 모른다. 그냥 소리가 좋아서 즐겨 치고 싶은 것인데, 그 소리에 축생들이 해탈을 한다니 더욱 즐거울 뿐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치는 방법은 축생의 발이 넷이라고 해서 네박자를 치면 된다는 말을 한다. 네박자는 인생의 박자라고 하는 송대관의 노래가 아니라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쿵작작작 쿵작작작'
'쿵작꿍작 쿵작작작'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서 이렇게 치면 된다. 물론 기본형이다. 그리고 나중에 신명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휘두러는 북소리에 대해서는 낭월도 책임을지지 않는다. 뭔가 맺힌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북을 두들겨 패는 기분으로 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낭월은 어루만지듯이 치고 싶은데 때로는 크게도 치고 때로는 적게도 치는 것이 고저장단이라고 생각을 한다. 여하튼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13. 북치러 오세요


아무라도 칠 수가 있는 북이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마련되었다. 그 하나는 마이산을 넘어가는 중에 있는데, 참으로 현명하신 스님의 처사라고 생각을 했던 북이다. 시주함이 있어서 나름대로 북을 치고 약간의 시주를 하면 되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데, 감로사에는 그러한 시주함도 없다. 그냥 치기만 하면 된다. 계룡산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둥둥 울려 주시기 바란다. 그래서 가죽이 헤어지고 다시 씌우게 된다면 참말로 북값을 했다고 할 참이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