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부자도 죽고 빈자도 죽고....

작성일
2003-08-05 12:47
조회
13317
[제199화] 부자도 죽고 빈자도 죽고....



갑자기 사람들을 놀라게 한 투신자살을 한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각각

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평가의 기준은 자신의 평소 생각을 바탕으로 하

고서 내려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는데, 벗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

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는 낭월이다.



1. 주관과 객관의 행복과 불행



그러니까 노숙자의 하루와 재벌의 하루가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보지 못하겠지

만, 그렇게 현격한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낭월의 생각으로는 항상 자신의 기준으로 행복과 불

행이 규정된다는 점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객관적인 관점으로 행복의 지

수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월급쟁이가 월급이 올라서

즐거워하는 것과, 재벌이 계열사를 하나 추가해서 즐거워하는 것은 거의 같은

지수라고 하는 것을 늘 생각하곤 한다.



많은 벗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견해의 차이가 큰 점이 있다면 대통령이나 장

관은 뭔가 사주팔자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벗님들도 의외로 많다는 점

이다. ‘이래서 재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뭔가 남의

다리를 긁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호기심

이 많은 사람이 고 박정희 대통령 사주를 들고 유명하다는 사람을 찾았더란다.

그의 평가는 간단했단다. 거렁뱅이 사주라고 하는 것이다. 글쎄 거지 사주라고

하는 것이 다소 과장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의 사주를 몰라보고 오답을

내렸다고 자신은 호통을 쳤다고 하지만, 낭월이 그 말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그

렇게 보는 것도 또한 사주를 감명하는 사람의 견해이고, 크게 문제를 삼을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의 사주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리 큰 오류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벗님들은 사주

를 연구하면서 장관의 사주와 대통령의 사주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러한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는 것이

다. 그렇게 사주팔자가 정해졌다면 참 좋겠지만, 실로 운명은 타고난 것과 살아

가는 환경의 어우름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하지 않겠느냐는 점이 낭월의 생

각이다.



사주만으로 모든 것을 가름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되어서

도 곤란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왜냐면 사주대로 모든 것을 규정되어버

리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로봇의 삶에 불과하겠기 때문이다. 물

론 그렇다고 해도 그게 사실이라면 어쩔 수가 없이 수용을 해야 하겠지만 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기에 올바로 운명을 이해하지 않으면 큰 오류를 스스로

범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중요한 것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점은 스스로 자신만이 갖고 있다는 것이

다. 개관적으로 고시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이 행복이라고 볼 수

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보통 길운인지 흉운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성취도를 놓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자료를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늘 느끼는 부분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

지를 판단하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만으로 판단을 하는 것은 결코 이치에 부합하

지 않고, 그의 심리적인 지수에도 대입이 되지 않음을 늘 살피게 된다. 예로, 현

재의 대통령의 객관적인 운을 본다면 당선 이전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좋

아진 것이라고 하겠지만, 과연 실제로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는 본인만

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마도 낭월이 보기에는 한가로이

살던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촌부의 생각이기는 하

지만......



2. 부자도 필요한 것은 있다



가난한 사람의 목표에서는 당연히 재물적인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는 목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사람은 항

상 자신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은 모두 같은 모양으

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늘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보지 않고서는 재벌이 투신

자살을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맘대로 되지 않으

면 고통을 받는 것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원하던 일이 이뤄지면 즐거운 것도 아

마 같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일정한 정도 안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고 있

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수로 좋다”



라는 말을 한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다 그 부근에서 느끼는 정도일 뿐

이다. 기쁨은 기쁨이고, 고통도 같은 고통일 뿐이다. 청소하던 아가씨의 마음을

얻어서 기쁜 노총각의 마음과, 재벌의 외동딸과 연애를 하게 된 재벌 2세의 기쁨

은 심리적으로 본다면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고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이 된

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의 희노애락은 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벌의 죽음은 있을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돈병철이가 부럽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지는 또

생각을 해봐야 하겠지만, 서민들의 꿈에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벗님들의 꿈도 대체로 안정이 되는 정도의 자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하시리라고 짐작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늘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목적이 지구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여하튼 혹여라도 벗님의 생

각에, ‘부자는 그래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이런 기회에 다시 곰곰 생

각해 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3. 행복의 본질은 과연 뭘까



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는 것은 철학자의 큰 과제라고 봐도 좋

겠다. 그리고 부자나 빈자나 모두 같은 것이 있다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일게

다. 그리고 낭월도 여기에서는 당연히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과연 모든 이

의 공통된 목적은 무엇일지를 생각하곤 하는데, 항상 결론에 도달을 해보면 목

표는 늘 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걸림이 없는 자유’



이것이 낭월의 행복의 본질이다.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그

본질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마 그

런 것이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다만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최고의 통치자가 되

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안정된 취직자리를 얻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아

마도 벗님의 목표도 자유를 속박당하지 않으려는 것에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시

기 바란다. 물론 수행자는 절대적인 대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보

통 사람들의 자유는 하루살이의 행복에 불과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사업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를 늘 생각하곤

한다. 과연 그러한 별도의 대자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말을 하면서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항

상 위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사람이

느끼는 자유는 다 ‘그 정도’라고 봐야 정답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수행하시는

벗님들께는 미안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유라면 무방하겠지만, 보통 사람

의 자유는 천박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으로의 만족지수는 어떨지 몰라도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하나

의 속박일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별도로 얻을 초인적인 자유는 없다고

본다.



4. 부처는 뭘 봤을까?



그 동안 많은 인간들이 자유를 얻었고, 그렇게 누리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에는

부처가 포함이 되어 있다. 예수는 자유를 얻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고통스러

운 표정은 아무래도 자유를 얻었다기 보다는 짐을 잔뜩 짊어진 고통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후인들이 만든 형상이기는 하겠지만, 그 형상인들 그냥 만들어

졌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늘 삶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말

이 있다. 서산대사의 말씀이라고 전해지는 것이다.



어느 스님이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도인의 삶은 어떤지요?”

“도인의 삶이란 졸리면 자고 주리면 먹는 것이라네.”

“그야 범부와 다를 바가 없네요.”

“왜?”

“아, 누구라도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잖아요.”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뭐가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은 아니라네.”

“........”



아마도 위의 대화를 읽으면서 낭월은 참으로 자고 싶어도 번뇌 때문에 자지 못

하는 사람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

은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그 답변은 참으로 자비심의 진실을 말한 것이라고 생

각이 되어 상쾌한 기분이 늘 든다. 왜냐면 도인의 삶은 밥을 먹지 않고, 생식을

하며 소금도 먹지 않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

냥 ‘피식’ 웃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자의 말씀도 완전히 이와 같

이 자유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점을 늘 생각하곤 한다.



벗님의 자유도 이렇게 걸림이 없었으면 좋겠다. 다만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서산

대사의 말씀이다. 속세를 떠나는 것도, 가족을 버리는 것도, 도인의 삶이 아니

고, 그냥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하겠다. 부처의 일생을 보

게 되면 자신을 죽이려고 쏜 화살이 모두 연꽃으로 변해서 땅에 떨어졌다고 하

는데 그런 것이 부처일지도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마도 후세의 숭배자가

만든 우화겠지.......



5. ‘다음 생에는 자유를 얻으소서’



투신하여 삶을 마감한 고 정몽헌 회장과,

자신의 성적을 비관하여 죽은 학생과,

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따라 죽은 40대의 부친의,



완전히 일치하는 고통의 무게와 삶의 짐을 벗으시고, 다음 생에는 큰 자유를 얻

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이땅의 법칙에 적응이 잘 되지 못하신 님들인가 싶습

니다. 먼 길에 서로 동행을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