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팔자를 떠받치고 있는 것..?

작성일
2003-05-31 07:15
조회
8159
[제194화] 팔자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뭘까...?



송화가루가 가라앉으니 그 다음에는 버들가루가 날아든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는 낭월이다. 그러더니

요즘에는 다시 원상으로 돌아간 대기환경을 느끼게 된다. 일일월월 시시각각으

로 변화하여 그대로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은 자신은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십년

백년 천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에는 강의시간에 자평의 뿌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다. 과연 자평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한번 생각을 해보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서 자평이라

고 함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언할 수가 있는 이치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1. 욕망의 세계에 세워진 멋진 탑



예전에 라즈니쉬님의 강의를 읽을 적에 본 대목이 문득 생각난다. 누가 스승에

게 물었단다.



“스승님, 이 대지는 무엇이 떠받치고 있습니까?”

“그야 거대한 네 마리의 하얀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지.”

“그럼 그 거대한 네 마리의 하얀 코끼리는요?”

“그 네 마리의 거대한 하얀 코끼리는 다시 네 마리의 하얀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

지.”

“그렇군요......”



아마도 그 제자가 돌이 아니라면 더 묻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여겼다. 언제까지

고 스승과 제자의 문답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이렇

게 이야기를 해 드리는 이유는 뭔가. 단지 자평명리학의 구조가 어디에 버티고

뿌리를 삼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같이 떠

오르는 생각이어서 함께 생각을 해 보시자고 잠시 적어 봤다.



그렇다면 자평은 어디에다가 뿌리를 두고 생겨난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도대

체 이 물건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가를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존재하는 것

은 보이지 않는데, 하는 짓을 봐서는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작용을 하고 있는 것

으로 보이는 존재인 사주팔자 말이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뭔가 실존의 무엇보다는 무형의 무엇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될 즈음이면 점점 주위에 안개가 피어오르

고 사람의 그림자는 사라지는 장면을 느끼게 될 수도 있겠다. 종종 그렇게 혼자

의 생각으로 몰두하는 나날이 있으니 벗님도 또한 경험을 해보시지 않았을까 싶

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많은 시간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욕망으로 만들어진 물

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주팔자는 욕망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

라는 의미도 상관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사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음을 연계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욕망의 소산(所産)

으로 인간세상이 만들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으니 사주팔자의 존재

를 그래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욕망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혹 사주팔자의 재료를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황당한 욕심을 내어보게 되고, 그래서 비록 글을 통해서라고는 하

겠지만 욕망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놓은 자료를 뒤적거려 보기도 하는

데, 주로 불교의 자료에서 그러한 흔적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사주공부

를 해서 간판을 달게 되면 철학원이 되고, 철학원이기에 철학을 논하는 것이라

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이야기 정도는 할 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도 드

려 본다. 욕망이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 물건일까?



2. 욕망의 바탕은 무엇일까?



욕망위에 새워진 탑을 보면서 그 뿌리를 추리하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그

래도 우선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없어 보이는 것을 추리라고 하지 않겠

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추리해 들어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낭월이다. 그러니

까 다시 말씀드리면 사주팔자의 마음 욕망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확인해서 추

적하는 것이 낭월식 욕망의 뿌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해도 되겠다.



실로 사주를 풀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거의 대부분이 언제 부자가 되

겠는가, 언제 출세를 하겠는가, 언제 합격을 하겠는가, 언제 결혼을 하겠는가,

언제 득남을 하겠는가, 언제 이혼을 하겠는가, 언제 이사를 하겠는가 등등 모두

가 하고자 하는 마음(慾心)이 포함되어 있음을 늘 느끼면서 욕계(欲界)의 소산

물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낭월의 생각이다. 그러다가 보니까 사주

를 만든 조물자는 당연히 욕신(慾神)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욕신이 많

은 것이라면 당연히 그 바탕에는 욕망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결론이다. 그래서 사주를 만든 바탕은 욕망이 되는 것이고, 그

욕망은 사주의 바탕이며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바탕에는 또 뭐가 있는지를 찾는 것은 탐색자의 당연한 흐름

이라고 하겠는데, 실로 욕망에 잠겨있는 사람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낸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하겠다. 물고기가 과연

물을 인식하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대다수의 물고기는 인식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더라도 지혜로운 물고기들은 자신의 물을 이해할 것이라고

여겨보기도 한다. 마치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공기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

지를 알고 있듯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욕망으로 만들어진 사주팔자를 갖고서 무엇을 알 수가 있겠

느냐는 것이겠는데, 그래서 사주의 영역은 욕망으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에는

답이 된다는 것이다. 그 욕망이 무엇이거나 간에 버리려는 노력이 아니라면 대

체로 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중요한 욕망의 존재는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살필 정도가 된다면 더욱 찌

릿한 맛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 욕망의 뿌리에는 바로 이 마음이라고 하는 존

재가 버티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바탕에 존

재하는 이 마음을 망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음은 불교

에 대해서 약간의 상식이 있는 벗님이라면 능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으

로 본다. 어리석은 상태에서의 마음은 망상일게고, 지혜로운 상태에서의 마음

은 불성이라고 한다면 너무 군소리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러한 마음

의 움직임을 살피지 못하면 사주학이라고 하기 어려울텐데 다행스럽게도 심리

분석의 구조를 찾아서 응용하고 있으니 체면유지는 된다고 하겠다. 하건충 선생

님께 다시 감사를 드리게 된다.



3. 결국은 여여가 주인이다.



욕망을 지배하는지 혹은 숨어서 지켜보기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욕망

의 뿌리도 있다고 한다면 비로소 유식론에서 말하는 제8식인 부처가 되지 않겠

냐는 것부터는 낭월의 망상일 수도 있음을 주의하시기 바란다. 혹자는 수행하

는 사람에게 사주팔자가 맞겠느냐는 질문을 하곤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로 그

가 욕망의 바다를 건넜다면 맞지 않을 것이고, 애석하게도 아직은 욕망의 바다

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맞는 면이 많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될 것이다.

그리고 욕망의 바다를 건넌 사람은 얼마나 되겠느냐고 한다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드릴 수가 있겠다.



깨달음의 과정은 이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낭월은 수행의 방법을 최상승의 참선

에서 찾지 않고, 욕계의 소산인 사주팔자로 시작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가

처한 곳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그 외의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

이다. 나의 좌표를 먼저 찾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관찰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논리의 바탕에 깔려있다. 아마도 벗님도 무슨 이야기인지 판단을 하실 것이

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주의 구조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여러 가지 정

황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마음이 편안해진

다고 하겠는데, 자신의 사주를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차이라고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자신의 사주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치와 음양

오행의 변화에 통해야 한다고 하겠고, 그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욕망의 구조

를 파악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의 사주를 안다는 것은 자연의 구조를 이해했다

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스스로 자신의 사주를 10년이나

연구를 해도 알지 못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도 메일이 한 통 날

아왔는데, 스스로 십여년 자신의 팔자를 연구했음에도 답을 모르겠다는 말을 하

는데, 그 내면에서는 자연을 관찰하지 못한 허물이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

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실로 사주를 안다는 것은 자연을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

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는 낭월이다.



언젠가 진리를 손아귀에 움켜쥐게 되면 사주는 잊어도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서 오늘도 정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본래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자

신의 본래 보습이 그대로 존재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생각하

게 된다. 이제야 설계도를 대략 파악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벗님과 함께 나

누고자 이러한 말씀을 드려보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성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세상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흥겹게 살아갈 것이 아니겠느냐

는 생각도 늘 해보게 된다.



4. 사주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주팔자는 피할 수가 없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그리

고 그 이유는 당연히 추구하는 바가 욕계의 흐름을 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

야 하겠다. 그러니까 사주가 맞지 않을 사람은 겉으로 수행자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해야 하겠다. 그 외에

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사주의 본질을 생각하다가 보니 조금 이해가

된 셈이라고 해야 하겠다. 자신의 팔자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살펴보면서 늘 살

펴가시면 되겠다. 물론 올바르게 자연의 눈으로 관찰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신의 업에는 어떤 욕망의 그림자가 보이는지

를 파악해서 제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겠는데, 사주의 심리구조를 파악

하노라면 대략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사주가 맞느냐고 질문을 하고자 하는 벗님은 자신의 내부에 욕망이 없는지만 살

피면 될 것이라고 본다. 욕망이 없으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

만 욕망의 수렁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말을 하나마나이다. 그리고 사주

를 잘 보는 것이 목적이 될 수가 없음은 이쯤에 와서야 분명해 진다고 하겠다.

이제는 사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겠다. 욕망도 없

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느냐는 말을 하시는 벗님도 있다. 그리고 그 말도 당연한

말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그 욕망이 고통으로 돌아와도 그렇게 말씀 하실 것인

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제 5월도 마지막 날이다. 그러고 보니 한담을 올린지가 한 달이 되었다. 참으

로 무심한 낭월이다. 사는 것이 분주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도 송구스럽다. 잠을

좀 줄이면 되지 무슨 구구한 변명을 하느냐고 하실 눈 밝은 벗님도 계시기 때문

이다. 에구~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