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왜 원래 부처가 어두워 졌다는겨?

작성일
2002-07-13 22:19
조회
5793
[제163화] 왜 원래 부처가 어두워 졌다는겨.....?



월드컵도 끝나고, 삼복(三伏)더위는 시작되었고, 그래서 마당에 나가려면 상당

한(?) 결심을 하지 않고는 엄두가 나지 않는 한 낮의 여름날이다. 비디오편집을

하느라고 분주한데 지금은 프린트(비디오 원본을 저장하는 중)를 하고 있으니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두 시간 동안은 도리

없이 컴퓨터와 비디오가 작업을 하도록 가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으니 그 사

이에 모니터를 하면서 공상에 젖어 보는 것도 물론 망중한(忙中閑)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렇게 공상을 하다가 문득 늘 생각의 저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의문덩어리

를 끌어내어서 먼지를 털고 감상 해보려고 한다. 함께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무

의미(無意味)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1. 불교를 믿으면서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



이렇게 시작을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하실 지도 모르겠다. 실

로 불교의 가르침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유익함을 포

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늘 앙금처럼 깔려있는 의문

이 있으니 그 이야기는 ‘무명(無明)의 근원(根源)’에 대한 이야기이다. 혹 이 글

을 읽으시는 벗님 중에서 낭월의 답답해하는 부분을 잘 알고 계신다면 메일이라

도 한 통 보내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그 고마움을 어찌 글로 다 하겠느냐고 하겠

다.



불교에서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는 깨달음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을 깨

닫느냐고 한다면 원래의 본 바탕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본 바탕, 원래

의 모습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말로 대표해서 설

명을 하기도 한다. 불성이라.....



여기에서 벗님은 혹 의문이 없으신지 모르겠다. 낭월의 생각에는 늘 답답~한 마

음이 풀리지를 않는다. 도대체 그 원래의 불성이란 것이 무엇일까.....?



2. 인간은 본래 부처였다



이렇게 말을 한다. 원래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인지 대승운동이 일어

나면서 그러한 말이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의 불교에는 그러한 바탕

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본래 부처였다는 말을 받아들이

지 못하겠다면 물론 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애초에 성립하는 내용

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겠다고 믿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

은 의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야 할 것이다.



‘부처가 윤회를 한단 말인가....?’



원래 부처는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윤회를 끊기 위해서 수행을 하

고 경전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원래 부처였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낭월이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

까......?



본래 부처였다면 윤회(輪廻)를 하지 않아야 옳고, 본래는 중생(衆生)이었다고

한다면 본래 부처라는 말은 거짓말에 속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하

튼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고서 시작을 해보도록 하자. 이게 무슨 의미가 있

겠느냐는 생각이 드시는 벗님은 더 읽으시지 말고 중지하시는 것도 좋겠다. 과

연 무슨 이유일지 궁금하신 벗님이시라면 함께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지

만......



3. 부처에서 무명(無明)이 생겨나?



아무래도 의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말이다. 무명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

하다가 보면, 원래는 밝고 밝은 부처였는데 무명으로 인해서 윤회를 하게 되었

다는 말로 이어진다. 그래서 원래의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

다는 말로 이어진다. 결론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그 설명하는 방법이 도무지 이

론적이지를 않으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

이다. 원래(原來)에 대한 설명을 하지나 말든지 기왕에 하려거든 좀더 근사한 말

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부처는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말만 없었더라도 또한 그런대로 수긍을

할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부처가 되어 대각(大覺)을 이뤄야만 윤회의

사슬을 끊게 되고 해탈(解脫)을 얻게 된다고 하면서 원래 부처였다가 무명으로

인해서 윤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에구 이게 무슨 말장난이냔 말이다. 거

참......



그 말대로 라고 한다면 부처가 되더라도 또 자칫하면 다시 윤회의 사슬에 휘감

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마도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

다. 그리고 이렇게 본래부처설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일파만파(一波萬

波)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어서 급기야는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휘감겨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평지풍파(平地風波)인지도 모르

겠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일까?



여하튼 뭔가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 속고 있다는 기분이 아스라이 들기 시작한다

면 이제는 믿음의 근원이 뿌리 채로 흔들거리게 되는 것이다. 본래생긴 자기면

목을 깨달으면 그게 부처라고 하니..... 과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글자대로 설명

을 하기에는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어리석은 중생들이

라 알아들을 말로 하느라고 하다 보니까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닌지도 모를 일이

지만, 여하튼 이렇게 나름대로 수행을 한다고 하는 풍신(폼새..)에 여엉 황당해

지는 마음이 간간이 들곤 하는 것이 사실이다.



4. 본래 부처란 자연(自然)이 아닐까?



밝고도 맑은 것이 본래의 부처 모습이라는 말도 하고, 더러는 그냥 텅 빈 동그라

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연결되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그대

로 부처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원래 깨달은 존재라는 말을 하기 보다는 오

히려 인위적(人爲的)인 노력으로 원래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하던 상태로 돌아

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서 크게 어긋

난 것일까?



깨달음의 경지는 말로 할 수가 없다고도 하고, 혹은 깨닫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를 만지는 것보다 더 쉽다는 말도 한다. 참으로 아리송송한 말이기도 하다. 그리

고 액면 그대로 수용을 하면(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모

습 그 자체가 부처라고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고, 그렇다면 결국은 자연으

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너무 억지를 쓴다

고 하지만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를 깨닫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유를 얻었다는 사람들을 볼라치면 또한 특별할 것도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그냥 그렇게 집착이 없이 살아가가다가 노쇠해서 병

들어 죽어버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겠으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

서 혹 이견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래에 도인이라고 하는 분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 별 것도 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글로 남겨진

멋진 임종(臨終)의 노래 등은 다 믿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면 가장 확실할 것이

다. 인간은 늙고 병들어서 죽을 지경이 되면 마침내 정신이 혼미한 것이 사실이

다.



도인은 일반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도 정신이 초롱초롱해서 편안

하게 의식을 하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은 각자의 자유겠지만 실은 오히려 동물들의 죽음에서 그러한 모습이 떠오른다

고 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에구... 비록 그렇게 죽는다고 치자. 그렇게 전해진다면 그렇게 믿으면 되지뭐.

그런데 실은 홍보용과 실제상황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잘 생각하

지 않으면 그야말로 그렇게 속아서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도인도 노

망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5. 노망한 도인 청매조사



청매조사는 지리산 연곡사에서 계셨다고 한다. 도를 깨쳐서 큰 스님이 되셔서

서산과 사명 등과 함께 영정도 봉안된 분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경봉스님께 들었던 이야기만 생각이 난다.



도를 깨달아서 제방의 선객(禪客)들을 제접하던 청매(靑梅)도인도 늙으면서 노

망이 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구름처럼 모여들던 수행자들은 실망을 했는지

몰라도 하나 둘 작별을 하고 떠나갔다. 똥을 싸서 벽에다가 부지런히 찍어 발랐

으니 그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도인의 똥

은 구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 다 떠나가고, 마지막에는 방에 군불을 때던 불목처사만 남게 되었

다. 그리고 그 처사도 그만 떠나야 하겠는데, 자신마저 떠나버리게 되면 저 노망

난 늙은이를 누가 돌볼 것이며, 그래서 죽어버리면 또 누가 송장을 태워줄까....

를 생각하고는 차마 간다는 말을 못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노망은 점점 심해져서 더 견딜 수가 없이 되자 이제는 그도 떠

나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마지막으로 밥을 해서 올리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눈치빠른 도인이 불렀다.



“봐라 김처사”

“예, 시님..... 지도 이만 가볼랍니더....”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거라.”

“인자 더 못 참겠심더....”

“그래도 니는 도인이 죽는 것을 봐야제....”

“그라까예....”



아마도 마음이 고운 나뭇꾼은 차마 이렇게 말하는 노인을 버리고 가버리지 못했

을 것이라고 낭월은 혼자 짐작을 해본다. 경봉스님 말로는 오래지 않아서 청매

조사는 숨을 거두게 되었고 그 순간에 방의 벽에 바른 똥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온 도량에 매우 향기로운 향내음이 진동을 했다고 하시더구먼시나, 아무래도

그 말도 또한 도인의 죽음이라서 미화시킨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이 자꾸만 든

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도인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기 때문에 노망을 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정신이 맑아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불교의

상식일 것이고 그래서 그와 같은 상식에 부합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도인은

조작을 해서라도 그럴싸한 도인의 마지막을 각색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살금살금 피어오른다. 과연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조작인지는 아무도 모

른다. 그냥 인간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6. 여하튼 불교는 대단하다



비록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이 되지만, 그래도 불교는 대단한 것임에

는 틀림이 없다. 집착을 벗어나야 자유가 얻어진다는 사상은 아무리 할인을 해

도 대단한 가르침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한

인격을 믿고 사로잡히지 않도록 배려를 했고, 보다 객관적인 관찰을 하도록 접

근하는 방법 등은 참으로 멋진 가르침이라고 해야 하겠다. 특히 의상대사의 ‘법

성게(法性偈)’ 같은 내용을 살펴보면 그대로 자유의 의미를 만끽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괜히 끝에서 불교인들에게 욕을 먹을까봐 얼버무리느라고 하

는 이야기가 아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모두 집착(執着)에서 벗어나지 못하

게 하는 사슬이라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실은 진리(眞

理)라고 한다면 이렇게 간단명료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은 것도 낭월의 생각이

기도 하다.



7. 에구.... 주제넘은 망상...



이렇게 끝도 없는 망상으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엊그제는 서점에서 ‘교회에서

도 쉬쉬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라는 긴 제목의 책을 구해 와서 조금 읽어 봤

다. 낭월이 불교가 더 대단하다는 것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구해온 것은 절

대로 아니다. 낭월의 생각을 아시는 벗님은 아시겠지만, 불교건 다른 교건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생각하는 낭월이다. 다만 객관적으로 한 종교의 이면

을 관찰하게 되면 무엇이 보일까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생각대로 그럴싸한 내용들이 많아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매

우 흥미로운 것은 ‘신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흔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번역을

하면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말을 하는데, 신이 유일하다면 ‘우리’라는 말

보다는 ‘나는’이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텐데 참으로 흥미

롭게 그런 것을 다 뒤지고 다니면서 글로 써준 것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라 기독교에는 이렇게 조작된 것이 많지 않은가.’라는 것

은 더욱 아니다. 그러한 배경을 만들게 된 이유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며 결국

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부분들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필자의

의견에 동조를 하게 되는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면서 과연

불교의 근본에는 어떤 모순이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에 늘 궁금하게 여기던 앞의 무명과 본래부처의 부분에 대한 의문이 클로즈업되

었던 것이니 또한 독서의 소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벗님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세상이 있

을 것이고, 그 세상에 대해서 믿음과 의심이 함께 쌓여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

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라

고도 생각을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혹 당연하게 생각되는 조작들

에 의해서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난다.



“앞산에 눈 녹으니 버들은 저절로 푸르구나”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