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 어쩌면 낭월의 전생(前生)일 수도 있는 이야기

작성일
2013-06-1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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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7화] 어쩌면 낭월의 전생(前生)일 수도 있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피할 수도 없는 더위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순리겠거니 하면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름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계절임에는 틀림 없는가 싶습니다. 그럭저럭 서너 달 지나고 나면 다시 선선해 지겠거니..... 합니다.
 
   
 
  날이 하도 더워서인지 산토끼 한 마리가 마당으로 마실을 나왔네요. 이렇게 가끔은 산속의 풍경이 되어서 산짐승들이 놀다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루는 다 잡혀 죽었는지 통 보이질 않네요. 돼지새끼들이 도라지 밭을 뒤집어 놨다고 연지님이 투덜댔는데 그 녀석도 걸리면 한 장 찍어봐야 하겠습니다. 하하~
 
 
  오늘은 어쩌면 낭월이 전생에 썼을지도 모르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기도 하겠습니다만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전혀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도 그 뿌리에는 자신과 깊은 연관이 이뤄진 채로 이어져 온 인과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되짆아요? 그러한 느낌으로 읽어 본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왜 이러한 근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을 해 드려야 그래도 생떼를 쓰는 것은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잠시 옛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 고물장사를 하다가 알게 된 인연
 
  이야기는 무진년 그러니까 1988년 무렵입니다. 아시는 벗님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무렵에 30대 초반의 낭월은 충남 서산에서 고물행상을 하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아마도 무척 힘들었던 나날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만큼이나 더운 날에 잠시 쉬려는 마음으로 길가의 철학원에 들어갔던 것이 인연이 되어서 수원에 가면 전생을 알아 봐 주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전생을 알아 보기 위해서 안동민 선생도 찾아가 보고 했습니다만 좀 황당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추천해 주는 선생의 이야기로 봐서는 하루 정도의 투자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주소를 들고 수원의 어느 반지하에 살고 있는 김경보 선생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 된 셈이지요. 뭐가 궁금해서 왔느냐는 말에 당연히 전생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거 알아보마 머해~?"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보자...... 음......"
"어떤 흔적이라도 좋으니까 느끼시는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생에 스님이었는데?"
"예? 스님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흠칫 놀라게 됩니다. 당시의 행색은 더벅머리에 허름한 모습의 영락없는 행상꾼이었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컨닝을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신뢰감이 마구마구 솟구치는 것이지요. 호감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뭐하고 있어요?"
"고물 장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 절에서도 좀 살았지요....."
"그게 본업인 거 같네. 고물장수는 무신~!"
"아.....그렇습니까? 그래 전생에 어떻게 보이십니까?"
"음..... 일본에서 살았었네...."
"일본이라면 일본의 스님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제법 공부를 많이 하셨던가 보구만...."
"그럼 일본에서 살지 않고 왜 한국에서 태어났을까요?"
"전쟁을 할 때 장군을 따라 왔었는데...."
"전쟁이라면 왜정시대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야~! 훨씬 옛날인갑는데?"
"그렇다면 임진왜란일까요?"
"아마도.... 그 쯤 될끼야~!"
"스님이 왜 전쟁하는데 따라 왔을까요?"
"그야 뭐,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보이시는 대로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알아? 싸우다 죽으면 염불이라도 해 주려고 따라왔는지 말이야?"
"아,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전쟁을 따라다니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이네....."
"혹시 이름이나 연대나 그런 것은 알 수 없을까요?"
"그런 거야 나도 모리지~ 그냥 보이는대로 말을 해 줄 뿐잉기라."
"음.....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일본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럴끼야...... 조선 사람들이 너무 무참하게 당하는 것을 너무 많이 봤거든."
"그래요? 그건..... 일리가 있네요....."
"일본 사람들에게 넌덜머리가 난 기지머."
"그렇다면 조선에서 죽었을까요?"
"음....... 그것도 모리겠는데....."
"혹시 한국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도 뭔가 느낌을 찾을 수 없을까요?"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빚이라니요? 무슨....?"
"아, 그기야 조선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는 것을 봤을거 아니야?"
"그렇겠지요."
"그라이까네~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태어난기지 머."
"속죄하러 왔다면 왜 스님이 인연일까요?"
"아, 스님이 되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죽은 사람은 제사 지내줘야잖나?"
"그런 뜻이었군요....."
"그래서 앞으로 내 맹크로 답답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팔자가 될끼야~"
"그럼 역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머, 스님인연이니까네 절에서 하마 되겠네 하하~!"
"이미 결혼을 해서 가정도 있는데요? 사실 그래서 절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요."
"그기 뭔 상관이라~ 세상은 인연따라서 재미있게 사는기여~"
"그래도 지금 생각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서요....."
"맘대로 하시지뭐, 암만 그캐도 때가 되마 또 모리지 하하~!"
"그런데 임진왜란이 지난지도 수백 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는 뭘 하고 살았을까요?"
"음....... 모르겠는데..... 안 비네...."

 
  대략 이러한 이야기를 니눴는데, 어투를 그대로 살려본 것은 그 당시의 느낌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김경보 선생은 상주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투리가 좀 심했거든요. 여하튼 이 정보를 통해서 불가의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점과,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정도의 암시를 얻고서 헤어졌습니다.
 
  그 후로 김 선생님은 대전으로 이사를 했고 또 연락이 되어서 왕래를 했었지요. 그렇지만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 후로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풍수에 대한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산에 갈 적에는 차로 모시러 가서는 동행하면서 지기(地氣)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들었지요. 그 당시에 낭월은 논산의 작은 암자에 기거하고 있었고, 그 후로 감로사의 터를 잡았던 이야기는 어딘가에서 소개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것은 김 선생님의 몸이 더 이상 인연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는데 아직 살아계셨다면 계사생이니까 올해 환갑이 되겠습니다. 아마도 다시 어딘가에서 태어나서 열심히 성장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한 꼬마 녀석이 찾아와서 '내가 잡아 준 터에서 잘 살고 있네~!'라고 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
 
 
2.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정보
 
  그저께입니다. 금휘가 인터넷으로 중고책을 읽어보려고 샀다고 하면서 보여주기에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의 이름이 《살아있는 한자교과서》네요. 그러니까 금휘도 요즘 한자에 자극을 받아서 나름대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어 볼 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낭월이 알고 있던 것과 서로 다른 것도 있는지 살펴보면서 펄럭펄럭 넘기다가 손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대목에서입니다.
 
 

  글자를 크게 읽으시려면 사진을 클릭하시면 조금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 페이지는 어려서 들었던 '에비야~!'라고 한 어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셨을 수도 있겠네요. 뜨거운 것이나 만지면 안 되는 물건을 2~3살 짜리 아기가 만지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계셨지요?
 
  귀와 코를 잘라다가 일본으로 가져가서는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면서 침을 튀겼을 것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모아놓은 귀와 코를 무덤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총(耳塚)이며 비총(鼻塚)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눈길을 끄는 것은 아래에 있는 《조선일일기》라는 책의 소개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군대를 따라서 종군했던 일본의 승려」라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서 앞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바로 공감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김경보 선생의 이야기와 같은 상황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 셈이네요. 물론 김경보 선생이 이 책을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부랴부랴 교보문고에서 검색을 해 보니까 책이라고 해봐야 유일하게 번역이 된 것이 한 종류 있었습니다. 출판연도를 보니까 1997년도에 초판이 된 것이었는데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주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배달이 된 책을 받아보고서는 부랴부랴 읽었지요.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라도 전생의 기억에 대한 한 조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책의 이름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임진왜란종군기》였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케이넨(慶念) 스님이 쓴 글의 제목은 「일일기(日日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일본에서 주석을 낸 학자가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는지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고 했는데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연유가 소상하게 적혀 있어서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님은 경념스님이었다는 것도 겸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과연 어떤 심정으로 동행을 했을 것인지가 구구절절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죽은 사람 염불해주러 따라온 것이 아니라 의료진으로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학적인 역할로 장군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동행했던가 봅니다.
 
  기록은 1597(丁酉)년 음력 6월 24일부터 이듬해의 1598년 2월 2일까지의 약 8개월에 걸친 기간의 기록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62세였기 때문에 처음에 장군이 동행하자고 했을 적에 젊은 사람을 데리고 가기를 제안했지만 본인이라야 편안하겠다는 장군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동행하게 되었더랍니다. 내용 중에서 몇몇 인상적인 부분을 이미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경념 스님의 친필 원고입니다.
 
 
 
 
  장군을 따라서 수행한 행로입니다.

 
                                     
                           이 자료는 KBS역사스페셜에서 나온 것입니다.

 
 
 
  
  남원성에서의 비참한 모습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남원성의 전투가 치열했던가 봅니다.
 
 
 
 
  살벌했던 전장의 분위기에서 나름대로의 소감을 적어놓았습니다. 
 
 
  
 
  
 
  위의 세 페이지는 모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조선 사람에게 약탈한 물건을 봉래산처럼 짊어지고 부두로 끌고 간 다음에는 가죽을 벗겨서 먹었다는 글을 보고 처음에는 소를 먹었다는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고서야 그게 아니라 사람을 먹었다는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아마도 상황이 나빠져서 죽어야 할 분위기였던가 싶습니다. 내용 중에서 왕생이라는 말은 극락세계로 간다는 말이고 그 말은 죽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분 좋게 죽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 당시의 분위기의 절박함을 수행자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상적인 몇 대목을 찾아봤습니다. 이 정도의 내용만으로도 글을 쓴 경념 스님의 심경이 어떠했을런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지요?

 
  그런데 책이 출판된 지 하도 오래되어서인지 주변에는 빛이 바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된 책을 보내니까 맘에 들지 않으면 반품해도 된다는 안내문까지 끼여있었네요. 물론 그냥 두고 보관할 참입니다. 읽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특별히 바꿔야 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3. 낭월과 경념 스님의 닮은 점이 있을까?
 
  아쉽게도 글을 다 읽었습니다만 그 상황이 낭월의 뇌리에 영상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해는 되는데  생생하게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더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낭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말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못볼 꼴을 많이 보게 되었던 한 스님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서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약간 닮아있는 듯한 느낌도 조금은 드네요.
 
  우선 가장 큰 특징은 글을 쓴다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지금 낭월이 글을 쓰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소상하게 적었다는 점에서는 거의 99% 공감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낭월이 존재했더라도 이렇게 적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이러한 공감대는 그냥 웃어버리기에는 뭔가 찡~하는 여운이 남는 것 같습니다.
 
  다시 김경보 선생의 말을 떠올려 보면, 경념 스님의 현실은 그대로 낭월의 전생과 조각맞추기 처럼 똑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한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보낸 시간들로 인해서 그 영상은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오래도록 괴롭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 과히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글과 함께 쓴 것이 시입니다. 감수성이 많았다는 이야기지요. 그러한 사람이 안정된 환경에서 살다가 사람으로 생각도 할 수 없는 험한 장면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충격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나중에 제대를 한 다음에도 자신이 죽은 사람들의 영상으로 인해서 환상이나 환청이 들려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평화주의자라는 것도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웬만하면 남들과 다투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경념 스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조선인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도 마음 아파 한 것을 보면 충분히 그의 심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또다른 특징이라면 직업입니다. 여하튼 불문(佛門)의 인연이 되었다는 것도 적은 인연이라고는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려서 어느 암자의 노승께서 입으시는 법의가 맘에 들어서 눌러앉어버렸던 낭월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옛날에 언젠가는 항상 일상으로 입고 살았던 법의(法衣)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소소하게 자료를 제공함으로 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겠습니다.
 
  결혼한 스님이라는 것도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습니다. 조계종에서 받은 교육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결혼을 거부를 했습니다만, 그것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보니 이제는 편안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는 당연히 가족을 거느리고 생활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조금은 겹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떠벌리고 자랑을 할 것도 아니지만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겠거니' 하니까 그런가 싶습니다.
 
  아, 경념스님이 군의관의 신분으로 조선을 왔었다고 하니까 의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이 있었다면 더욱 제격이겠습니다. 그래서 책장에 있는 의학관련 서적을 모아봤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책들이 현재 남아있었군요. 이 의미는 더많은 책들은 세월 속에서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책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영추편과 소문편의 두 권이네요. 이런 책은 그래도 웬만해서는 서가에 꼽혀 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작은 책을 눈여겨 봐주세요. 초록색의 《활투사암침법》이라는 책입니다. 예전에 한참을 사암침술에 심취되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책에 있는 그대로 시술했는데 효과는 만땅이었던 것에 재미를 느꼈었는데 무면허에 호되게 엄격한 한국의 실정으로 인해서 지금은 접었습니다만.
 
                         
 
 
    
 
   
 
  손때가 묻은 흔적이 느껴지네요. 사암침법은 60개의 경락으로 치료를 하는 방법이어서 특히 관심을 갖고 경락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요. 의학분야까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면 꽤 재미있는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감로사의 주불(主佛)이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라는 것도 하나의 암시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문득 해 봅니다.
 
  다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경념 스님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살았는데 지금의 낭월은 오로지 음양오행만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진화에 해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염불하다가 역학을 배우는 것이 무슨 진화(進化)냐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이렇게 해석을 해 봅니다.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고 죽어서는 극락세계로 가서 편안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인데, 정작 본인이 죽어봤지만 극락세계는 없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죽어서 간다는 극락세계보다는 살아서 이치를 궁리하는 음양오행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곳이 중요하지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낭월의 생각이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존재한다는 극락세계라는 것이..... 흐~
 
  그러니까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수행하시는 불자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낭월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승들께서도 누군가가 '극락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이 곳~!'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즐겁지 못하면 내일도 즐겁기 어렵다는 생각들....... 이런 생각도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겠거니 싶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대략 이 정도의 비교를 통해서라도 유사한 부분이 조금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경념 스님은 일본의 안양사(安養寺)에서 주지를 하였던가 봅니다. 혹시라도 일본에 갈 일이 생긴다면 이제 가봐야 할 곳이 하나 생겼습니다. 또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정도는 가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안양사가 어떻게 생겼나 싶어서 정말 처음으로 일본의 검색사이트를 찾아 봤습니다. 야후일본에서 검색을 해 보니까 바로 검색이 되는 군요.
 

 
  책에 소개 된 위치로 봐서 이곳이 경념 스님이 살았었다는 안양사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일일기도 검색에 나오네요.
 
                                  
 
   
    
   안양사의 위치가 조선의 경유지도에 표시된 지점과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핵발전소가 폭발된 위치에서는 멀리 떨어진 것 같군요. ㅎㅎ

 
 
          
 
  일본사이트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입니다. 경념 스님의 조선일일기 원본이라고 하네요.
 
 
            
 
  드문드문 보이는 한자를 통해서 기자와 이야기를 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임진왜란 중에서도 정유재란(丁酉災亂)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다시 우리나라에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표기를 했던가 봅니다. 일본에서는 재앙의 난리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두번 째의 난리라고 표기한 것이 재미있네요. 역사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기자는 한국의 전북향토문화원장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한국 사람이 찾아갔던가 봅니다.
 
 
  정유재란 당시의 일본군대 편성에서 왜좌군이라고 불렸던 제2군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10,000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가등청정의 휘하에는 구저성주(臼杵城主) 였던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라는 사람이 있었고 경념 스님은 그를 따라서 군의관으로 종군하게 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어딘가에서 봤습니다. 내친 김에 2군의 진격도까지?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yis9805?Redirect=Log&logNo=150113250174
 

   이 그림을 가져 온 블로그에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있네요. 그림을 보면 지리산을 끼고 왼쪽으로 진격을 해서 남원까지 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로가 제2군의 가등청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관계가 없어보이는 가등청정까지 등장을 하는 군요. 이 정도로.....

 
  그런데 내용에서 책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조선일일기(朝鮮一日記)라고 나오네요. 물론 같은 책을 두고 말하는 것은 틀림 없겠는데, 대화체로 하다가 보니까 '日'을 '一'로 기자가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렇게 제목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원본의 앞장과 뒷장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현재(1995) 안양사의 15대 주지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기자가 보니까 책의 종이는 한지(韓紙)같이 보인다고 했던가 봅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자신의 전생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잠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봤습니다. 어쩌면 황당할 수도 있지만 묘하게도 실루엣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벗님의 전생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를 갖고 계시는지요? 그것이 아마도 궁금하시지요? 여하튼 마음을 열어놓고 수행해 보십시다.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그러한 조각들도 나타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하하~
 
  어수선 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3년 6월 15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