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제28장. 오행원/ 2.옛 인연의 해후(邂逅)

작성일
2021-03-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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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제28장. 오행원(五行院)


2. 옛 인연의 해후(邂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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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매가 밖을 내다보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오겠다던 남자인가 싶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데,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춘매가 알은체를 하자 남자도 공수하고 말했다.

“도사님을 좀 뵈려고 왔습니다. 계신지요?”

“아, 예. 계십니다. 이리 들어오세요.”

춘매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온 남자는 중년의 서생(書生)이었다. 우창도 여인과 나눈 대화를 정리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이 누추한 곳을 어떻게 알고?”

“혹시나 하고 와 봤네만 역시 우창이었군. 오랜만이네. 하하~!”

“어떻게 지냈나? 좋아 보이네.”

“그렇다네. 어디로 떠돌아다니고 있나 했더니 이렇게도 제비 둥지에서 잘도 지내고 있었군.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거니 했는데 여기에서 보네. 하하하~!”

우창이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노산에서 같이 공부했던 고월(古越)이었다. 우선 서로 맞절을 하고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창도 고월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여간 많이 쌓인 것이 아니었고, 고월도 우창이 떠난 노산에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고 한 시진이나 흘렀다. 그 사이에 춘매는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과일과 차를 시중들면서 이야기만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고월이 비로소 춘매를 바라보고는 우창에게 어떤 인연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우창도 비로소 고월의 뜻을 알고는 말했다.

“아, 인사가 늦었군. 내가 신세를 지고 있는 춘매 낭자라네. 누이도 인사하지. 내가 늘 이야기했던 노산의 벗이라네.”

“항상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이신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소녀는 왕혜연(王惠蓮)이라고 해요.”

춘매가 수줍게 인사를 하자 고월도 공수하고 말했다.

“왕 낭자셨군요. 반갑습니다. 우창을 챙겨주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소생은 임원보(林元甫)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통성명을 하고는 고월이 우창에게 말했다.

“실은 상병화(尙秉和) 형님을 따라서 공부자(孔夫子)의 기일(忌日)에 참석하러 왔었다네. 자원(慈園)도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해서 동행했지.”

“아, 상 형님께서 유학의 거두(巨頭)시니 공자님의 기일에도 참석하셨나 보군.”

자원의 이름이 나오자 우창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춘매는 우창이 그 기쁨에 사무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겨넣었다.

“그래? 지금 어디에서 머물고 있나?”

“명륜당에서 며칠 쉬고 있지. 그러다가 우연히 주화진(周和珍) 낭자의 대화 속에서 언뜻 자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서 혹여라도 동명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와 본 것이었다네.”

“공자님의 기일? 그렇다면 매우 성대한 행사였겠는걸? 언제였나?”

“기일은 5월 열하룻날이었지. 도처에서 유림(儒林)이 모여들어서 대성황을 이뤘다네. 자네는 여기에서 살면서도 몰랐단 말인가? 하하하~!”

“그랬군. 내가 원래 밖의 일에는 무심하지 않은가. 하하~!”

“같이 가세~! 명륜당에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어야지.”

“그래야지. 누이도 문 닫아.”

“아...니, 저는 집을 보고 있을께요..... 스승님은 다녀오세요.”

갑자기 말투가 경어(敬語)로 바뀐 것을 보고는 우창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월, 춘매와는 의남매라네. 오늘 자네가 찾아오는 바람에 누이의 말투가 꼬였지 뭔가.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도록 허락해 주겠나?”

“여부가 있나. 우창의 누이면 고월의 누이도 되어 주시겠습니까? 우창보다 내가 한 달 늦게 태어났으니 작은 오빠로 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그래....도....”

그러자 우창이 말했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누이도 나를 대하듯이 편하게 해. 하하~!”

우창도 권하고, 고월도 그렇게 말하자, 춘매도 싫지 않았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고월에게도 오빠로 대하기로 했다. 다만 우창의 표정에서 들뜬 모습을 보니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냥 두고 갈 우창이 아니었다. 춘매도 자원이라는 여인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럼 동행하고 조용히 있을게요.”

“아마도 누이 맘대로 되지 않을 거야. 오늘 저녁엔 떠들썩하게 놀아봐야지. 어서 가세.”

두 사람은 앞서가면서 밀린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잠시도 멈추지를 않았다. 뒤를 따르는 춘매의 심사(心思)가 복잡했다. 난데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뭔가 큰 혼란이 생긴 것도 같아서 괜히 기분이 착잡했다.

명륜당으로 가는 길은 이미 익숙했다. 손헌을 만나서 문안드린 다음에 서둘러서 객사(客舍)로 향했다.

“자원~! 내가 누굴 데리고 왔는지 어서 나와 봐~!”

호쾌한 고월이 문앞에서부터 소리를 높여서 자원을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자원이 나오다가 우창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뜻밖의 곳에서 우창을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원이 얼른 마루로 나와서 큰절을 했다.

“제자 자원이 진싸부를 뵈옵니다~!”

“반가워~! 잘 지냈지?”

우창이 자원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다. 그렇게 반갑게 만나서는 주 낭자의 안내를 받고 차실(茶室)로 들어갔다. 할 말은 많았으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뒤따르던 춘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느라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사려가 깊은 자원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자원은 먼저 와 있었다는 이유로 주인의 행세를 했다. 가장 먼저 우창의 옆자리로 춘매를 안내했다.

“저는 조은령(曺銀鈴)이에요.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진싸부, 제가 어떻게 할까요?”

우창에게 깎듯하게 싸부라고 하는 자원의 모습에 춘매도 호감(好感)이 생겼다. 그래서 우창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춘매가 말했다.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이제 겨우 명학에 입문한 후학 왕혜연이 인사드려요.”

“진싸부, 그래도 되나요? 이렇게 여여쁜 낭자가 동생이 되겠다는데 싸부가 허락을 해야죠. 호호~!”

“역시 누이가 뭘 아는구나. 그렇게 하셔.”

우창의 말을 듣고는 자원이 말투를 고쳤다.

“엄머~! 죄송해요. 진싸부의 누이시면 사숙(師叔)이시잖아요? 눈치가 없어서 항상 이래요. 헤아려 주세요.”

우창이 잠시 난감했지만 재빠른 춘매가 바로 정리를 해 버렸다.

“그동안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오빠라고 했지만 이제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알았어요. 진싸부라는 호칭을 왜 저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요?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해 주세요. 진싸부~!”

춘매가 귀엽게 말하는 것을 듣자 우창도 조금은 오글거렸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이 난 사람은 춘매였다. 명륜당으로 오기 전까지는 심사가 복잡했는데 막상 와서 자원을 만나보니 여간 호감이 가는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안부가 오가고 나서야 비로소 조용해졌다. 그 사이에 주 낭자가 다과(茶果)를 마련해서 들고 왔다. 그리고는 우창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한 번 뵈러 간다고 하면서도 못 갔어요.”

그리고는 춘매를 향해서도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언니도 동행하셨네? 반가워~!”

두 여인이 손을 잡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상병화는 보이지 않았다.

“고월, 상 형님은 안 보이시네?”

“아, 오랜만에 벗을 만나서 바쁘시다네. 하하하~!”

“그러셨구나. 항상 분주하시니까. 하하~!”

비로소 안부가 모두 끝이 나자 고월이 진작부터 궁금하던 것을 꺼냈다. 물론 모두 고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창, 노산을 떠나서 도대체 무슨 술법을 만났는가?”

“어? 술법이라니? 나야 자네도 아시다시피 늘 변변치 못한 오행 궁리나 하고 있는데 무슨 술법이라고 그러나?”

“어허~! 시치미를 뗄 참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시원하게 말을 하시게.”

“대접 속의 거북이 말이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텐가?”

“엉? 아니,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나? 혹 손헌 선생이?”

그러자 고월은 주 낭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우창이 대략 짐작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청하는지 알아듣고서 말을 꺼냈다.

“맞았네. 내가 전생이 무슨 복이 있었는지 기인을 만나서 다시 볼 수 없는 비법을 전해 받게 되었다네. 사실은 이것을 일 년 정도 임상한 다음에 노산으로 자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네.”

“오호, 그랬구나. 축하하네, 축하해~! 복이 있는 사람에겐 반드시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군.”

“모두 고월의 열정적인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네. 그러니 잠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오늘 아침에도 자네를 떠올렸지 뭔가. 하하하~!”

“정말인가? 자원을 떠올린 것은 아니고?”

“자원도 떠올랐지. 동문수학(同門修學)의 인연이 이렇게 지대(至大)할 줄이야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네. 자네에게는 떠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산해서 그것도 미안했네. 하하~!”

“왜 이러나. 공부인은 그러한 번거로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말이네. 그 바람에 자원의 질문을 혼자서 감당하느라고 내가 고생을 좀 하기는 했다만. 하하하~!”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점심을 먹고도 이어지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끊일 줄을 몰랐다. 무엇보다도 고월과 자원은 우창이 겪은 강호에서의 임상담(臨床談)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공부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공부하는 이치가 실제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궁금했었는데, 우창이 겪은 이야기의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고월과 자원은 우창의 경험을 들으면서 오주괘의 이치에 대해서 모두 그 대강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미 간지(干支)에 대해서는 충분히 깨닫고 있는 수준들이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은 자평법의 연장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우창이 마침내 회중시계를 꺼내 놓자 모두의 눈이 한 곳으로 모였다. 회중시계를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고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호~! 점괘를 찾는 나침반이로구나. 잘 되었네. 자, 지금 이 순간을 득괘해서 보여주게.”

“지금 우리에게 득괘를 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 보여주긴 뭘 보여줘? 고월은 점쟁이의 수칙(守則)을 모른단 말인가?”

“어? 뭘 말인가?”

“무사무점(無事無占)~!”

“오호~! 일없이 점신을 부르면 안 된다는 말인가? 과연 강호의 수업(修業)이 혹독했군. 예전의 우창이 아니야. 하하하~!”

“말도 말게. 점괘를 한 번 보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항상 느끼고 있다네. 하하~!”

“알았네. 그 이치와 요령은 모두 이해를 했으니까 이제 필요한 것은 그 분주(分柱)를 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회중시계 뿐이로군.”

“조금만 기다려 보게. 그렇지 않아도 제자에게 몇 개를 부탁해 뒀다네. 아마도 수일 내로 얻을 수가 있을 테니까.”

그러자 고월과 자원이 동시에 눈이 커졌다. 갖고 싶었던 것을 며칠 내로 얻을 수가 있다니까 기뻐서였다.

우창과 춘매는 반가운 만남을 마무리하고 내일은 우창의 연승점술관으로 두 사람을 초대하고는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온 춘매가 감동해서 말했다.

“오빠~!, 아니, 진싸부~! 오늘 보니까 오빠가 생각보다 더 멋있었어. 항상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자원 언니의 싸부에 대한 존경심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라. 그래서 나도 괜히 으쓱했잖아. 호호호~!”

“누이~! 그냥 하던대로 해. 무슨 진싸부야. 흐흐흐~!”

“뭐야?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는데. 또 바꾸라고?”

“그럼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냥 하던대로 하자. 됐지?”

“알았어. 나도 진싸부라고 하니까 왠지 높은 곳에 오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네. 호호호~!”

“내일이면 갈 사람들이니까 하루만 적당히 하면 돼. 하하하~!”

“그런데 오빠.”

“응.”

“자원 언니 정말 괜찮아 보이더라. 우리 집에서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그 우아한 품격이며, 나긋나긋한 음성하며, 내가 여자라도 반하겠던데 어떤 남정네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겠던걸?”

“그래? 양면(陽面)만 봐서 그래. 하하하~!”

“뭐야? 음면(陰面)도 있어?”

“아무렴. 얼마나 깐깐하게 따지고 든다고. 하하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정말 부럽더라.”

“그럼 곡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할까?”

“정말? 그랬으면 내가 배울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아. 내일 오시거든 말 좀 잘 해 봐.”

“의외네? 누이가 자원에게 그런 감정을 갖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너무 멋진 거야. 어떻게 그런 여인과 혼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야?”

“혼인? 그게 그리 쉬운가? 혼인했으면 누이도 못 만났을 텐데? 하하하~!”

“쳇, 내가 뭐라고. 자원 언니 옆에 있으면 난 그냥 물색없는 들꽃에 불과하겠더라니까.”

“그런 말 말아. 누이의 그 넘치는 열정이야말로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꽃인 것을 모르지? 하하~!”

“몰라, 내가 무슨 열정이 있다고. 호호호~!”

“공부의 인연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혈육(血肉)은 혈육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학문의 인연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애틋한 것인지 나도 미처 몰랐던 것 같네.”

“여태 그것도 몰랐어? 도연(道緣)이잖아. 도연은 심연(心緣)이고, 이렇게 마음으로 묶인 인연인데 어찌 몸으로 묶인 인연에 비하겠어?”

춘매가 열변을 토하자 우창도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런가?”

“오빠, 심신(心身)의 체용(體用)이 뭐라고 했지?”

“그야 마음이 체가 되고 몸은 용이 되지.”

“참나~! 그걸 또 설명한다. 호호호~!”

“어? 질문이 아니었나?”

“질문은 무슨 질문. 마음의 인연이 몸의 인연과 어떻게 비할 바가 되느냐는 이야기라고 이 맹한 오빠야~! 호호호~!”

“그랬어? 이런 것을 불가에서는 도반(道伴)이라고 해. 길을 가는 반려자(伴侶者)라는 뜻이지. 오늘 새삼 도반의 의미를 되새겼잖아.”

“정말 아름답더라. 나도 감동했잖아. 그리고 반짝이는 눈빛은 또 어떻고? 오빠가 거북이 점괘를 설명하는데 사람들의 표정을 생각해 보면... 완전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겠더라.”

“그렇지? 다들 그렇게 공부했잖아. 하하~!”

“무엇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동참했다는 것이 너무나 뿌듯하고 행복했어. 정말 고마워. 오빠의 인연이 이렇게도 행복한 순간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인연이지. 덕분에 나도 이렇게 잘 얻어먹고 잘살아 가고 있잖아. 서로 고마운 인연이면 선연(善緣)이라고 봐도 되겠지?”

“아, 맞다. 선연의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더욱 열심히 공부할 거야.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쉬어. 내일은 또 정신없을 오빠를 위해서. 호호호~!”

우창은 쉬러 가는 춘매를 보내고는 곰곰 생각해 봤다. 그동안 참으로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직도 노산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월과 자원의 모습은 여전히 밝고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문득 상인화(尙印和)의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미쳐 안부를 묻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자 몽유원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창에게 몽유원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인화의 미소는 어머니의 미소와 겹쳐졌다.

그렇게 지난 시절의 풍경을 생각하다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는 몽유원이 아닌 어느 낯선 해변가에서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만 보였다. 다만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파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면서 멀어졌다. 눈을 뜨니 어느 사이에 날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꿈속에서 파도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던 것은 춘매가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비몽사몽으로 문을 열어주자 춘매가 뭔가를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오빠의 안색을 보니 밤에 잠도 이루지 못했나 보네? 그렇게도 들떴던 거야? 차 마셔. 오미자를 달여왔어.”

상큼한 춘매의 음성이 잠의 꼬리를 쫓아버렸다. 뜨거운 오미자탕을 후룩후룩 마시자 시큼한 맛으로 인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이가 제대로 끓여왔네. 어제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아.”

“그렇지 싶었어. 어서 씻고 아침 먹어. 어제 술도 마시고 해서 복어국을 끓였어. 건너와~!”

“그래~!”

우창이 답을 하고는 잠시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는 춘매가 끓여 준 복어국으로 속을 다스렸다.

“아니, 어디에서 귀한 복어를 구했어?”

“진작에 구했는데 언젠가 요긴하게 쓰려고 아껴뒀었지. 오늘이 그 요긴한 날이라고 생각되어서 탕을 끓인 거야. 맛있지?”

“맛있고 말고지. 이런 탕은 처음 먹어본다. 별미네. 하하~!”

개운한 맛의 복어국을 먹고는 상담실을 정리했다. 평소에도 어질러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사시(巳時)가 되어서야 고월과 자원이 찾아왔다. 이미 우창이 준비를 해 놓은 차를 따라서 두 사람에게 권했다. 춘매도 스스럼없이 동석했다. 학문으로 인연을 맺으니까 순식간에 벗이 되는 오묘함이 있었다. 춘매가 자원에게 말했다.

“언니, 어제는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연구하는 모임에 끼워주셨으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만 했죠. 잘 오셨어요.”

“응, 모두가 인연이니까. 춘매가 이렇게나 멋진 공간을 마련해 줬으니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네. 난 노산에서 공부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동안에 춘매는 삶의 현장에서 몸소 부대끼면서 생생한 인생의 수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니까 부럽더라.”

“그래요? 그럼 언니 우리 함께 살아요. 이미 공부하신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남들에게 활용할 수 있잖아요. 전 그렇게 학식(學識)을 쌓은 언니가 부러운데요.”

“아하~! 그렇구나. 그야 춘매가 학구열(學究熱)이 넘치니까 그렇지. 결국은 나도 언젠가 하산해서 상담업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어.”

“와우~! 그럼 잘 되었네. 요 앞에 자리를 하나 찾아볼게요. 며칠만 저랑 같이 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하루 세끼 밥은 책임질 거에요. 호호호~!”

“와우~! 이렇게 말을 해 주니까 괜히 흔들리잖아.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럼요. 그렇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춘매가 우창을 바라봤다. 우창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바라보자 우창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고월에게 말했다.

“고월은 언제까지 노산에 있으려고? 그만 하산하면 어떨까?”

“자네가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 생각을 했다네. 다시 돌아가면 스승님께 말씀드리고 움직여 볼까 싶은 생각도 했지.”

“잘했네. 기왕이면 곡부로 오시게. 살아보니 괜찮아. 하하~!”

“그러지. 나는 곡부보다도 개봉(開封)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거든. 결정되면 연락해 주겠네. 자원은 여기에서 머무르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도 되네. 짐이야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챙겨서 보내줄 수가 있으니까. 먼 길에 수고롭게 왕래하지 않아도 되네.”

“알았어요. 그럼 임싸부가 수고를 해 주세요. 몇 달만 머무르면서 진싸부의 비법을 좀 배워보고 싶어졌어요. 호호~!”

이렇게 해서 자원은 곡부에 남기로 하고, 고월은 환담(歡談)을 나누고는 다시 명륜당으로 돌아갔다. 내일 일찍 상병화와 돌아가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이 머물던 연승점술관에는 세 사람으로 늘어났고, 점점 활기를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