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 "빛"에 대한 단상(短想)

작성일
2014-03-2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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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8화] "빛"에 대한 단상(短想)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어느 사이에 봄바람을 타고 꽃소식이 계룡에도 전해지니 다시 새로운 봄이 시작되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봄바람을 따라서 봄날의 화사한 햇살을 생각해 보다가 빛에 대한 사념(思念)이 일어나서 잠시 뒤따라 가 봤습니다. 원래는 한담을 쓸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서 어투는 평어체이니 참고하시고 살펴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4년 3월 2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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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대하여

  빛의 어원(語源)을 생각해 보면, ‘비추다’가 아닐까 싶다. 비추는 것이 빛인 것이다. 비추는 것이 빛이라고 할진대 무엇을 비춰서 그 존재(存在)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정리(整理)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크게 보면 물질적(物質的)인 빛과 정신적(精神的)인 빛으로 나눠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물질적(物質的)인 빛
 
  이것은 광선(光線)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을 발하는 물질(物質)이니 광채(光彩)라고 해도 될 것이다. 빛은 움직임으로써 그것이 빛인 줄을 알게 된다. 빛은 쏘아지는 것이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가만히 있는 빛은 빛일 수가 없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빛이 움직이는 속도(速度)는 세상(世上)에서 가장 빠른 성질(性質)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만물(萬物)이 움직이는 것을 측정(測定)하는 기준(基準)으로 삼게 되는 것도 또한 빛이다. 빛의 속도(速度)는 초속(秒速) 약30만km이다. 지구(地球)의 둘레가 4만km라고 할 경우에 일곱바퀴 반을 돌게 되는 속도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를 갖고 있다.

                                    

  빛의 구조(構造)를 물리학자(物理學者)는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파동(波動)이라고 보는 견해(見解)이고, 또 하나는 광자(光子)라고 보는 것이다. 파동은 움직임을 갖고 있는 존재(存在)라는 의미(意味)일 것이고, 광자는 빛이 알갱이의 형태라고 보는 것인데 이 둘에 대한 견해(見解)는 아직 명료(明瞭)하게 해결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이 둘 간에 타협(妥協)을 한 것은 빛을 이중성으로 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맞을 것이다.

                

  즉 빛이 움직이지 않을 적에는 광자(光子)가 되고 이것이 움직이면 파동(波動)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빛의 음양(陰陽)이라고 보면 적당(的當)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빛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존재이지만 마치 제논의 화살과 같이 이론적(理論的)으로 대입(代入)을 한다면 움직이는 순간(瞬間)과 순간을 관찰(觀察)하게 된다면 정지(停止)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認識)이 될 수가 있는 것인 이것을 광자(光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하나의 궤적(軌跡)을 그리면서 움직여 가게 되므로 이때에는 광선(光線)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판단(判斷)하는 것일 뿐이고 실제(實際)로 어느 것이 옳다고 구분(區分)하는 것은 의미(意味)가 없는 일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빛의 음양(陰陽)은 광자(光子)와 광선(光線)인 것이고 이것은 분리(分離)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2. 정신적(精神的)인 빛
 
  빛을 정신적으로 논하는 것은 자연계(自然界)의 빛과는 사뭇 다르지만 의미(意味)하는 바는 서로 통용(通用)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現象)으로 수용(受容)하는데 큰 반발(反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自然)스럽게 정신적인 빛에 대해서도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빛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存在)로부터 빛과 같은 아우라(aura)가 풍겨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假令) 신령(神靈)은 빛으로 묘사(描寫)된다. 실제(實際)로 빛 알갱이나 빛의 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형태(形態)로 작용(作用)을 한다고 이해(理解)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적(神的)인 존재(存在)를 묘사할 적에는 그 존재의 후면(後面)에 둥근 빛테두리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고서 자연스럽게 특별(特別)한 능력(能力)을 소유(所有)하고 있는 존재(存在)라고 인식(認識)하는 것에 익숙하다.

                                       
 
  특수한 카메라로 사람의 손을 찍으면 그 손으로부터 발산되는 기 에너지를 담을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을 킬리안 사진기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좀 더 진화를 한다면 도인을 구분하는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람의 두뇌를 찍으면 후광이 어떻게 얼마나 나오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이다.

  물론(勿論) 신적인 존재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特定)한 능력(能力)을 갖고 있는 사람도 빛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瞬間)에 빛을 발휘(發揮)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은 위대(偉大)한 인물(人物)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후광(後光)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양(多樣)하다. 재물(財物)을 신(神)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거부(巨富)를 보면 후광이 보일 것이고, 학문(學問)을 신(神)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학식(學識)이 깊은 사람에게서 그러한 후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행(修行)을 최선(最善)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세상(世上)의 오욕(五慾)을 벗어나서 해탈(解脫)의 경지(境地)에 머무르는 사람에게서 이러한 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一般的)으로 객관화(客觀化)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판단(判斷)을 할 적에 오류(誤謬)가 발생(發生)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후광이 보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그러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녀(男女)가 사모(思慕)하는 마음이 있을 경우(境遇)에 그러한 현상(現象)이 두드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눈에 ‘콩깍지가 씌었나 보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본인(本人)도 후일(後日) 언젠가는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적에 그러한 말을 할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 후광이 사라지면서 대단해 보였던 자신의 연인(戀人)이 왜소(矮小)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할 때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狀況)을 접(接)하게 되면 자신(自身)도 왜 그랬는지를 모른다고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두뇌(頭腦)에서 특수(特殊)한 물질(物質)을 발생(發生)시켜서 일으키는 일종(一種)의 화학반응(化學反應)으로 그것을 도파민(dopamine)의 작용(作用)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世上)의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偉大)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자신의 눈에 비친 광채(光彩)를 분명(分明)히 보았다고 착각(錯覺)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본질(本質)은 종족(種族)을 보존(保存)하기 위한 생리현상(生理現狀)일 수도 있으므로 매우 자연(自然)스러운 기능(機能)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러한 경우에도 빛은 작용(作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대상(對象)에게 이러한 현상(現象)을 느끼게 될 경우에는 광신도(狂信徒)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남들은 모두 사기(詐欺)를 당한다고 경고(警告)를 하지만 그 사람의 눈에는 그 대상(對象)은 참으로 위대(偉大)한데 주변(周邊)의 사람들이 눈이 나빠서 볼 줄을 모르고 오히려 오해(誤解)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조차 하므로 그 꿈에서 깨어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時間)이 흘러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정신의 빛 물질의 빛
 
  다시, 빛의 음양(陰陽)을 생각해 본다. 정신(精神)의 빛은 음적(陰的)인 빛이고 물질(物質)의 빛은 양적(陽的)인 빛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잘 드러나는 것이 양(陽)이고 반대(反對)로 내면(內面)에서 빛을 내는 것이 음(陰)이라는 것과 대비(對比)를 해 보면 그 차이점(差異點)은 뚜렷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겠다.

  특히 내면적(內面的)인 빛을 갖고 있는 상태(狀態)를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고 한다. 수행자(修行者)는 이러한 빛을 갖고 싶은 열망(熱望)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고뇌(苦惱)하기도 한다. 소소영영이란 ‘한 없이 밝고 신령스럽다’는 의미로 본성(本性)이나 깨달음을 의미(意味)하는 말로도 사용(使用)한다. 밝고 밝아서 거침이 없고 어두운 구석이 전혀 없으니 깨달은 이를 말하고 부처를 말하기도 하니 이러한 경지(境地)에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고자 하는 열망(熱望)은 이해(理解)가 되고도 남는다.

  물질의 빛은 세상(世上)을 밝게 하고 정신의 빛은 영혼(靈魂)을 밝게 한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더 중요(重要)하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오류(誤謬)이다. 왜냐하면 음양(陰陽)은 서로 존재(存在)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우월(優越)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이분법(二分法)으로 답(答)하기를 원(願)하는 자를 만난다면 그 사람의 정신(精神) 수준(水準)에 맞춰서 때론 정신의 빛이 중요(重要)하다고 말해주고 또 때로는 물질의 빛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면 된다. 그렇지만 실은 모두가 중요할 뿐이라는 것을 마침내는 알려줘야 제대로 선생 노릇을 했다고 하리라.

  한 밤 중에 허공(虛空)에 걸린 달을 보면서 자신의 심지(心地)를 돌이켜 보고, 지혜(智慧)로운 사람을 보면서 세상은 희망(希望)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빛에 대해서 깊은 사유(思惟)를 하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4. “빛”의 저 쪽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이것을 그림자라고 한다. 그림자란 무슨 뜻인가? 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만 나타난다. 인류(人類)의 기록(記錄)에 의한 최초(最初)의 그림자는 플라톤이 말한 동굴(洞窟)의 그림자에 있다. 빛을 등지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뒤를 돌아다 볼 수가 없는 죄수(罪囚)들은 그림자가 세상(世上)의 전부(全部)라고 인식(認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빛의 존재(存在)가 아니라 그림자의 존재가 진리(眞理)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 죄수가 과감(果敢)하게 고개를 돌려서 불빛을 봤을 적에 변화(變化)는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며 일단 빛을 보고난 다음에는 그림자가 절대적(絶對的)인 진리(眞理)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자유(自由)롭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인식(認識)에 대한 변화(變化)는 불가(佛家)의 대오(大悟)와 유사(類似)한 점이 있다. 이미 밝음에 대해서 알고 난 다음에 다시 그림자의 세계(世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이다.

                      

  우리는 빛과 그림자 그 중간(中間)에 존재(存在)하고 있다. 누군 빛을 보고 누군 그림자를 본다. 그리고 모두 자기가 본 것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경험(經驗)되지 않은 인식(認識)은 허상(虛像)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한 믿음은 상당하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執着)하여 고개를 돌려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에게 빛으로건 그림자로건 고개를 돌려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철학자(哲學者)이다.

  그러나 빛을 아는 사람은 자연(自然)히 그림자의 존재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빛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그림자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빛의 존재를 인식하기 이전에는 그도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전부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多數)는 그림자를 알고 있지만 특수(特殊)한 몇몇은 빛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빛을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선지자(先知者)나 도인(道人)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빛의 저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결국은 전체(全體)를 이해(理解)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음양(陰陽)에 대해서 통찰(洞察)하고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빛이 양(陽)이라면 그림자는 음(陰)일 테니까.

  ‘번뇌(煩惱)가 많을수록 깨침의 기회(機會)도 많아진다.’는 말이 있다. 고뇌(苦惱)가 깊을수록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뇌가 없는 사람은 깨침의 기회나 의미도 상대적으로 적어질 것이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짙다. 마찬가지로 어둠이 짙다는 이야기는 밝은 빛을 알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붓다는 생(生)의 의미(意味)에 대해서 깊은 고뇌를 한 끝에 야밤에 도주(逃走)를 감행(敢行)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깨달음의 큰 선물(膳物)이 주어졌다.

  그러니 가장 나쁜 것은 고뇌가 아니라 아무런 의문(疑問)도 없음이 아닐까? 왜 공부하는 것을 학문(學問)이라고 할까? 의문이 깊으면 배우고자 하는 욕구(欲求)가 생기고 그로 인해서 예전에는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니 배우고 묻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빛을 생각하고 그림자를 생각하다가 보니 이런저런 상념(想念)들이 덩달아 일어나서 사색(思索)의 밥상을 풍요(豊饒)롭게 한다.

  물론 이러한 것에 대한 생각들이 당장 무슨 큰 깨달음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식을 높여주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자연의 무심코 지나가던 것들에 대해서 잠시 관조(觀照)하면서 살펴보는 정도(程度)이지만 이러한 것이 뭔가를 촉발(觸發)시키는 촉매제(觸媒劑)가 될 수도 있음이다.

 
 
5. 허망(虛妄)한 공상(空想)
 
  자,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 보자. 물질의 빛과 정신의 빛이 달리기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 일단(一旦) 물질의 빛은 그 속도(速度)가 고정(固定)되어 있으므로 문제(問題)가 없다. 그렇다면 정신의 빛이 그보다 빠를 것이냐? 아니면 느릴 것이냐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리고 결론(結論)은?
 
 
                     2014년 3월 17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