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 투병(鬪病)과 치병(治病)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작성일
2013-12-16 10:36
조회
4676
 
[제619화] 투병(鬪病)과 치병(治病)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산골이라 그런지 아침의 기운이 상당히 냉랭하네요. 바깥 기온은 영하 2도입니다.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고 하시진 않겠지요? 어플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논산시 상월면의 기온이 나와주는군요. 여하튼 필요하면 뭐든 다 있다고 생각하고 검색하는 신공(神功)을 발휘하는데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막상 주변을 살펴보니까 의외로 스마트폰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기능만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열심히 사용법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하하~
  
 
1. 질병(疾病)에 대한 한 생각
 
  오늘은 며칠 전부터 생각해 오던 질병에 대해서 정리를 좀 해 볼까 싶습니다. 누구나 삶의 최우선에 놓여있는 화두는 건강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장수가 되겠지요. 이 정도로 장수보다 건강이 우선하기 때문인지 방송에서도 항상 건강에 대해서 나오고 있네요. 물론 그만큼의 질병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봅니다.
 
 
                   疾
 
  이 글자가 질병의 질입니다. 글자의 구조를 보면, 한한대자전에서는 병질엄이라고 나오지만 실은 병들어 기댈녘(疒)자에 화살시(矢)로 조합이 된 글자입니다. 병들어 기대는 것은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병들어 기대는 것과 화살이 조합된 것을 보면 그 상태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화살처럼 빠르게 나빠지고 있어서 우물쭈물 하지말고 얼른 손을 써야 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싶습니다. 병질엄은 엄(广)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病

  이번엔 병입니다. 병을 보면 기댈녘 안에 천간병(丙)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서 丙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냥 음을 따온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누굽니까? 눈만 뜨면 생각하는 천간의 세 번째 글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글자는 맹열하고 혹독하고 거침없이 쏘아대는 의미를 이미 알고도 남은 다음입니다. 그래서 질병(疾病)이라는 두 글자가 합쳐지게 되면 그 상태가 상당히 나빠서 스스로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도(度)를 넘은 상태라고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또 다른 비슷한 글자가 생각나네요. 마저 보고 넘어가십시다.
 
 
                   症
 
  바로 이 글자입니다. 앞의 녘은 성치 못하여 기대고 있는 상태임을 알겠는데, 그 속의 바를정(正)은 음을 빌려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음을 빌려왔으면 정이라고 해야 할텐데 글자의 이름이 증인 것으로 봐서 약간 다른 의미로 보겠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낭월의 대책없는 상랑력이 발휘된다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왜 이 글자가 정이 아니고 증인지를 생각하다가 보니까 문득, 정상일 경우에는 정인데 뭔가 정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상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정이 증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본 것이지요. 참 못말리겠지요? 하하~ 

  아니, 치병과 투병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면서 무슨 글자타령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낭월도 그러려고 시작을 했는데 일단 글자가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서 이렇게 뜯어봐야 속이 시원하니 이것도 일종의 문자의심증(文字疑心症)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뜯다가 보면 뭔가 그 속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도 있어서 종종 이러고 있습니다.
 
  여하튼 '정'이든 '증'이든 뭔가 비정상이기는 한데 아직까지 화살처럼 빨리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상태가 병화처럼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를 일러서 증이라고 한다는 정도의 이해는 크게 빗나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경고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얼른 손을 써야 할 것이라는 뜻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보면 틀림 없지 싶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증세(症勢)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단 발병(發病)이 된 다음의 이야기에 가깝기는 합니다만 지혜로운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태풍을 읽고, 신발 한 짝이 뒤집어 지는 것을 보고 불상사가 생길 것을 알 수가 있듯이, 일단 증세가 보이면 이미 병이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서둘러서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질병과 병증(病症)이 약간 다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네요.
 
 
2. 병세(病勢)와 싸우는 사람 - 투병(鬪病)
 
  이제 투병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일단 몸에 병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과 싸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습니다. 가령 암이 생겼을 경우에 그 암과 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암이 증식하는데는 단백질이 필요하답니다. 그 말을 의사에게 듣고서는 단백질 공급을 끊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은 병과 싸우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기에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증식하지 못하도록 레이저로 그 부위를 지여버리거나 칼로 잘라버리는 것도 싸우는 것이라고 할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싸울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다만 그것이 항상 선택해야 할 정도의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병과 싸우는 사람의 생각에는 '병=적(敵)=웬수'라는 공식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병을 만나면 이성을 잃고 고놈과 우야든둥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사실 병 보기를 웬수같이 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투병이라는 말 외에는 떠오를 말이 없을 것입니다. 투병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봐서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3. 병세를 다스리는 사람 - 치병(治病)
 
  이번에는 치병에 대한 의미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원래 병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의미도 이해를 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병이 온 곳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가령 어떤 사람이 간병(肝病)이 들었다면 그 병은 어디로 좇아서 온 것일까요? 첫째는 선천적으로 유전자를 따라서 왔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부모를 원망하고 있으라는 뜻은 이닙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유전자와 싸울 생각을 할 것이냐는 의미로 생각해 보면 적당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싸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대부분(거의 80%~90%)의 간병에 걸린 사람은 후천적으로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면, 음주(飮酒)와 번뇌과다(煩惱過多)가 주요 원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수없이 많은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니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말해서 원인으로는 몸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겠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어느 외과 전문의가 인터뷰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병과 싸웠으나 결국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병과 함께 가기로 하면서 비로소 몸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낭월이 차일피일 미뤘던 투병과 치병에 대한 화두에 불을 질렀습니다. 과연 그의 경험에서 나온 법문(法門)은 부처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의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4. 병(病)을 도반(道伴)으로 삼는 사람 - 붕병(朋病)
 
  과연 그런 사람도 있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고서에는 분명히 그러한 구절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 있는 구절인데 따로 발췌되어서 인용되는 내용이기도 하므로 어쩌면 벗님도 읽어 보신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일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원문으로 구경하실랍니까?
 

一、念身不求無病,身無病則貪欲易生;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라. 


二、處世不求無難,世無難則驕奢必起;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라.


三、究心不求無障,心無障則所學躐等;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라.


四、立行不求無魔,行無魔則誓願不堅;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라.


五、謀事不求易成,事易成則志存輕慢;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라.


六、交情不求益吾,交益吾則虧損道義;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라.


七、於人不求順適,人順適則心必自矜;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라.


八、施德不求望報,德望報則意有所圖;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라.


九、見利不求沾分,利沾分則癡心亦動;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라.


十、被抑不求申明,抑申明則怨恨滋生;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라.  


  재미있는 것은, 보왕삼매론에서 열 가지의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 중에서도 으뜸으로 1번에 바로 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쉼나니'라는 구절을 보면 참 생각할 것이 많다는 것을 절로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제일 큰 희망사항은 몸에 병이 없는 것이고 이것을 누구나 알기에 자신의 몸에는 병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이 글을 쓴 보왕은 잘 알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긴다는 말은, 병이 있으면 탐욕이 덜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일리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야기가 좀 엇길로 나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결국 저 모든 것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요인으로 작용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지나는 길에 함께 살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세상을 한 50여년 살아 온 연륜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가슴 한 켠을 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낭월의 마음도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다시 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보왕은 병을 도반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만 그러고 싶은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선 당장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괴로우니 웬수처럼 대하고 싶은 것이 범인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도반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과정에서의 반려자'가 도반이거든요. 그렇게 마음의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5. 병을 다스려야 할 이유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
 
  '예전에.....' 라고 시작하는 것은 언제 누가 어떤 연유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정확한 근거로 활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그 속에 깃은 의미만 생각해 달라는 뜻임을 눈치빠른 벗님은 이미 파악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도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고 하면 매우 좋은 이야기라고 보겠습니다.
 
                      
                                                                  [고대 명의 화타(華佗)]
 
  예전에, 어느 고을에 명의로 소문난 의원이 있었습니다. 누구든 어떤 질병을 갖고 찾아와도 그에 상응하는 해결책으로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신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그를 찾아가서 치료 받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도 마찬가지로 멀리서 노인이 찾아와서 진맥을 하고 적당한 처방에 따라서 약을 사갖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옆에서 공부를 하면서 일을 돕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공부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노인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스승의 모든 것이 진리요 하늘이요 최선이라고 하는 경이로움으로 모셨으나 점차로 자신도 공부가 되어감에 따라서 견해가 생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고 그래서 이 환자의 상태와 그에 대응하는 스승의 처방에 대해서 의문점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상하네.... 아무래도 스승은 물욕을 다스리지 못한 것 같어.... 저 환자의 증세는 분명히 그 약재를 사용하면 완치가 되는데 왜 그걸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서 저렇게 오래도록 약을 먹게 만드는 것이냔 말이여..... 스승이 설마 나에게도 기침 치료하는 법을 가려쳐줬으니 그걸 모를 리는 없고..... 이건 틀림없이 돈 때문에 약을 팔기 위해서 환자에게 속임수를.....
 
  일단 이렇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라고 하면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물어야 하는데 스스로 답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묻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두어 달이 흘러 갔습니다. 그 노인이 약을 다 먹고 다시 찾아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침 의원이 외출하여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찬스가 오기 마련입니다.

환자 "의원님 계십니까?"
제자 "오늘은 멀리 출타하시고 안 계십니다."
환자 "그러마 우짜노...."
제자 "제가 그 동안 배운 의술이 약간 있으니 약을 지어드려도 되겠습니까?"
환자 "그럼 그렇게 해 주소! 명의 제자이니 기술도 보통사람 보다는 낫겠제.."
 
  그렇게 해서 약을 지어갖고 갔습니다. 헛걸음을 할 뻔 했다가 제자에게라도 약을 지어가게 되어서 다행스럽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갔지요. 그래서 이 제자는 속으로 '당신 오늘 운수 좋은 줄이나 아슈~ 이제 지긋지긋한 병과는 작별을 하게 될 것이거든...'이라는 생각으로 괜히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외출하셨던 스승님이 귀가했습니다.
 
스승 "오늘 별 일은 없었더나?"
제자 "있었습니다."
스승 "그래? 무슨 일?"
제자 "그 스승님께 맨날 약값 갖다 바치던 호구 노인장 있지 않습니까?"
스승 "뭔 소리랴?"
제자 "아, 기침하는 병으로 20년 째 다니고 있는 영감님 말입니다."
스승 "그랬구나. 그럼 헛걸음 했겠네... 우리 시대는 스마트폰도 없어서..."
제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약을 지어드렸습니다."
스승 " 그래? 네가 약을 지었다구?"
제자 "그~으~러~음~요~!"
스승 "거 참 네가 약을 지었다니 기특하다만 설마 세신을 넣은 것은 아니겠지?"
제자 "당연히 세신을 넣었습지요. 그것도 아주 듬뿍 넣어서 잘 지어드렸습니다."
스승 "뭐라고? 세신을 넣었단 말이냐???? 이거 큰일 났구나...."
제자 "당연히 큰일 나셨겠지요. 이제 약을 지으러 오지 않을 테니까요."
스승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처방을 했단 말이냐?"
제자 "당연하지요. 스승님의 이중적인 생각을 이제야 간파했으니까요."
스승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제자 "아, 제자에게는 사람을 살려야지 돈을 탐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스승 "그래 그랬지. 그런데 그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있었단 말이냐?"
제자 "그래놓고서 왜 그 노인에게는 기침이 뚝! 떨어질 약을 두고 질질 끌었단 말입니까?"
스승 "뭐라고? 그래서 네가 오해를 했구나.... 쯧쯧... 큰일 났네..."
제자 "스승님 이제 그 노인이 기침을 안 하게 되어 약을 지으러 오지 않으니 그러시지요?"
스승 "그래 맞다. 약을 지으러 오지 않을 게다... 얼른 그 환자에게 가봐야 하겠다."
제자 "왜 그러십니까?"
스승 "그 환자의 기침은 고쳐주면 돌아가실 병이기 때문이다."
제자 "예?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스승 "병에는 고쳐야 할 병과 고치면 안 될 병이 있는 것이다."
제자 "예? 뭐라고요?"
스승 "내가 그걸 미리 너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 나의 허물이로다. 얼른 가보자."
제자 "만약에 큰 일이 생겼으면 어떤답니까?"
스승 "아직 약을 먹지 않았기만 바래야 하겠지....."
 
  그렇게 해서 찾아간 환자는 이미 숨을 거두셔서 상중(喪中)이었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습니다만 과연 병과 싸워야 할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의원이 선택한 길은 치병이었던 것인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다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이치를 모르는 제자는 병과 싸우게 만들어서 결국 노인은 허약한 상황에서 병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절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생각을 해 볼 것은 과연 병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노인의 병은 기침을 조금씩 해 가면서 더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병만 제거하느라고 환자를 돌보지 못한 까닭에 젊은 제자는 그만 사람을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마치,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만, 사람은 살리지 못했습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는 의사를 접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단순하게 돈만 탐했다고 알고 있었으니 학문의 세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의문투성이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벗님은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 이야기 중에 세신(細辛)은 문득 생각나서 적어 본 것이니 실제의 약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발혀둡니다. 기침에 세신을 쓴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설마 이렇게 했다고 해서 기침하시는 벗님이 약방에 가서 세신을 달라고 하는 일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하~
 
 
6. 병을 다스리려면 병을 알아야 한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려면 백성을 알아야 하듯이, 의사가 환자의 병을 다스리려면 병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왕왕 의사가 병은 잘 아는데 환자는 잘 모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건강검진을 한답시고 방사선을 마구 쏘아대는 것을 보면 허가낸 살인자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그럼에도 의료보험에서는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하지 않으면 불리익을 준다고 하니 이것이 참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병도 알고 환자도 알아야 적절한 처방을 내릴텐데 병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것은 앞으로도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도 병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 정도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간에 병이 생긴 것은 음주 탓이고, 폐에 이상이 생긴 것은 흡연 탓이라는 정도는 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습관, 아니 악습(惡習)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마약성 때문이겠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약의 성분 조차도 약으로 다스려서 인간을 위하서 이롭게 작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즉 문제는 술과 담배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자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지요. 병원에서 다스리는 방법 중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에 따라서 같은 병이라도 해결책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임상지료에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같이 봐버리는 일이 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병을 다스려야 하는데 사람은 모두 같은 것으로 보고 병만 제거하려고 하는 관점으로 환자를 대하는 동안에는 언제까지라도 이러한 오류도 함께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야 할텐데 문외한이 봐서는 참으로 염려되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기계만 믿고 고치려 들지 않는 의사들에게는 뭐라고 한들 쇠귀에 경읽기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상담실을 찾아와서 사주를 보는 사람조차도 자신에게 무슨 병이 날 것인지를 물어 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을 물어 볼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평소에 어떤 악습이 있는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는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악습에 의한 불안감을 운수 소관으로 돌리려는지 모르겠네요. 참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증세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 증세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필시 자신일 것이므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흐름을 돌이켜서 반성한다면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원인이 나온다면 그 다음에는 다스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사용하다가 자라목이 되었다면 스마트폰을 그만하고 목을 뒤로 젖히는 동작으로 참회하는 것이 현명하겠네요.
 
  예전에 요가도장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떤 동작을 취하다가 고통이 심하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 원장님은 '참회 하세요~!'라는 냉정한 반응을 보여서 참 인정머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까 그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서 오히려 바른 가르침을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니까 항상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가짐이 없이 병을 다스리는 것은 헛된 구호에 불과하겠습니다.
 
  몸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잠, 음식, 성욕, 명예 그리고 재물에 대한 것들이겠지요. 사실은 마음이 그러한 기능을 부추긴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도 같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원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모두 제공하는 것이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병을 다스리는 것이 곧 몸을 다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선 병이 생기기 전에 증을 다스려야 하고 증이 생기기 전에 몸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다스리기 전에 맘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현명한 근원의 다스림이 될 것으로 본다면 결국은..... 마음으로 가는 군요.
 
 
7. 낙천적인 마음으로 즐거운 하루를~!
 
  결론이 대략 나오는 것 같습니다. 몸을 다스리든 병을 다스리든 결국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귀결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병없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무병장수(無病長壽)의 꿈을 실현시키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평상심(平常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생활화가 된다면 스스로 만든 병과 스스로 싸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힘겹게 보내지 않아도 될 방법도 찾아 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오늘을 지내 갈 수가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싶습니다.
 
큰 병과 살아본 사람들을 인터뷰 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네요. 병은 다스리면서 함께 가는 동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한 말을 보면서 뭔가 마음이 와 닿는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오늘이 즐겁지 않으면 내일의 행복도 보장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건강이 모든 인류의 열망이기로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병과 싸우는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어떻게 하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니 병을 다스리는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두서없이 몇 말씀 적어 봤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한 연말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3년 12월 1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