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제30장. 정신(精神)/ 4.환경(環境)의 변화

작성일
2021-08-20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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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제30장. 정신(精神) 


4. 환경(環境)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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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춘매의 질문에 천천히 말했다.

“당연하지. 자신이 바뀌지 않는 주체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

그러자 이번에는 잘 따라오던 춘매의 반응이 달랐다. 혼자 의문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언니의 말씀으로는 주체가 있으면서 주체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들리네요.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矛盾)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을 배운다고 해도 어떻게 적용을 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 요령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머리가 순간적으로 정지된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럴 줄 알았어. 호호호~!”

“언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까요?”

“음..... 금은 오행색(五行色)이 뭐지?”

“아, 그야 백색(白色)이잖아요? 더 정확히는 투명(透明)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건 스승님이 말해 주셨으니까요. 호호호~!”

“맞아. 투명이지만 색으로 나타낼 수가 없으니까 백색으로 표현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 제대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네. 호호호~!”

“근데, 자신의 모습을 변화할 수 있다는 것과는 연결이 되지 않은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모르겠어요.”

춘매가 의아하다는 듯이 다시 자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아직도 모르겠어? 흰색이 흰색이기 때문에 다른 색으로 물을 들일 수가 있다는 이치 정도는 그만하면 알지 싶은데? 호호호~!”

“어? 그게 또 그런 이치로 연결이 되나요? 정말 쉽다가도 어려운 것이 오행인가 봐요. 그렇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듣고 보니까 바로 알겠잖아요? 정말 이치를 배운다는 것은 어렵고도 오묘해요.”

춘매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고정된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주체가 어떻게 그릇에 따라서 변화를 할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타당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잘 변화하나 막상 변화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본질이 금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이치를 단박에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자원은 잘 알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 것이다.

“그래서 정신(精神)의 세계(世界)를 공부하려면 오행도 알고, 오상(五常)도 알고, 오방(五方)도 알고, 오색(五色)도 알고, 춘하추동(春夏秋冬)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서 음양(陰陽)의 변화조차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이렇게 바탕을 넓혀놓은 다음에 비로소 마음의 구조(構造)를 공부하더라도 큰 혼란을 겪지 않고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는 거지. 이러한 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중간에 자꾸만 막히는 고통을 맛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도 여기에서 나오는 거야. 호호호~!”

자원의 설명을 듣고서 그제서야 정리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이제 이해가 되었어요. 투명한 존재이기 때문에 물이 잘 들지만 본래 투명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잖아요? 비단에 물이 드는 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가기는 어렵지만, 마음은 비단이나 무명의 천이 아니기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는 거죠?”

“잘 생각했어. 그래서 본질(本質)이 중요한 거야. 마음에는 물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고, 금의 본질이야말로 천만 번을 변화하더라도 그 본질은 사라지지 않고 의연(依然)하게 그대로 있는 거야. 이것이 금심(金心)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정말 멋진 가르침에 감사드려요. 이제 왜 금의 마음이 이렇게 생겼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겠어요.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마해야 하겠어요. 역시 쉽진 않으니까요. 호호호~!”

춘매가 금의 마음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원도 마음이 기뻤다. 이미 절반의 공부는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인 까닭이다. 다시 춘매에게 물었다.

“동생이 잘 이해했는지 물어볼까? 계절로는 어디에 속하지?”

“금의 계절이라면 당연히 가을이죠.”

그것을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듯이 의아해서 답했다. 그러자 자원이 다시 물었다.

“금은 천만 번을 녹여도 자신의 본성(本性)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을과 연결해서 설명해 볼 수 있을까?”

자원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제야 깨달은 춘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가 묘연(渺然)했다. 쉽사리 답을 하지 않자 잠시 기다렸던 자원이 설명했다.

“좀 어렵지? 호호호~!”

“정말요~! 언니의 말씀이 쉬운 듯하면서도 또 어려워요. 그래서 답변을 하기가 어렵네요. 도와주세요. 호호호~!”

“가을이 되면 벼를 심은 들판이 황금색으로 바뀌는 것은 왜 그렇지?”

“그야 봄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이뤄서 그렇잖아요?”

“씨앗이 무엇인데?”

“논에 벼가 익은 것은 봄에 볍씨를 뿌렸기 때문이죠.”

“아직도 모르겠어?”

“뭘요?”

“봄에 뿌리기 전의 벼와 가을에 들판에서 추수(秋收)한 벼가 같은 거야? 아니면 다른 거야?”

“예? 그러니까.... 어? 완전히 같은 것이잖아요? 그것은 무슨 의미죠?”

“왜?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에 어리둥절하는 거야? 호호호~!”

“정말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어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작년 가을에 거둔 것을 다시 심어서 거뒀으니 같은 것이 될밖에 더 있겠어? 호호호~!”

“그러니까요. 그게.... 참 오묘하네요. 금이 다른 것과 작용해서 변화했지만 결국은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반박(反駁)할 수가 없잖아요. 이게.....”

“콩은 또 어때? 봄에 심은 콩이 여름에는 콩과 같았나?”

“아니죠. 전혀 다른 모습이죠. 줄기와 잎과 뿌리가 있고 꽃도 피니까요. 그곳에서는 콩을 찾아볼 수가 없죠.”

“그렇지만 농부는 근심할까?”

“왜 근심을 하겠어요? 가을이 되면 원하는 대로 콩이 주렁주렁 달리게 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다시 생각해 볼까? 경신금(庚辛金)이 환경에 따라서 변화를 하지만 그 본질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아,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이 이 뜻이었네요?”

“어때? 이제야 동생이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호호호~!”

“씨앗이 다시 가을이 되자 본래대로 돌아왔어요. 그것도 수십 배, 수백 배로 늘어나서 말이죠. 이것이 금(金)의 소식이었어요? 감탄만 하고 있어요.”

“감탄해도 돼. 오행보다 신비로운 것이 또 있을까?”

“맞아요. 정말 이리 맞춰봐도 말이 되고, 저리 맞춰봐도 전혀 다른 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은 같은 답이네요. 어쩌면 이렇게 신기할 수가 있을까요? 여태 알고 있었던 오행은 뭐였나 싶은 정도에요. 스승님은 왜 이런 오행을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호호호~!”

춘매가 우창을 보면서 투정하듯이 말을 하자 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그야 나도 모르지. 다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오늘 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것은 그동안 스승님의 엄청난 인내심으로 동생을 가르친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는 거야. 호호호~!”

“아, 맞아요. 언니의 말씀이 맞아요. 이미 공부를 한 것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애써 가르쳐도 제자는 저절로 그렇게 된 줄만 안다는 말이 맞네요. 호호호~!”

“그것이 스승된 자의 보람이야. 마치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애써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다 키워놓으면 자식은 저절로 그렇게 큰 줄만 알고 부모의 공을 잊어버리지만 정작 부모는 그러한 것은 개의치 않고서 오로지 장성(壯盛)한 자식이 고맙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야. 호호호~!”

“이제야 그 뜻을 알다니 제가 참 둔하긴 해요. 그쵸? 호호호~!”

“당연한 거야. 어느 순간에 스승의 가르침이 깊이 파고 들어와서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적에 비로소 스승의 은혜(恩惠)를 갚는 것이 되니까. 호호호~!”

“맞아요. 저도 지금 그 이치를 깨달았어요. 스승의 은혜를 떠올렸으면 갚은 것인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답을 해야죠.”

“이미 동생은 잘하고 있잖아. 하루 세끼의 공양(供養)을 올린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그만한 보답이라고 봐도 될 거야. 그러니까 제자는 스승의 몸을 봉양(奉養)하고 또 스승은 그 음식을 먹고서 제자의 정신(精神)을 키워주니 이보다 아름다운 인연이 어디에 또 있을까?”

자원의 말에 춘매는 마음속에서 뿌듯한 충만감(充滿感)이 솟아올라서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느낌을 애써 삼켰다. 자칫했으면 자원의 가슴에 묻힐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도 잘 헤아려주는 여인이 옆에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약간의 보답(報答)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위안이 되었어요. 호호호~!”

그러자,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염재가 자원에게 말했다.

“자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내 가슴을 후벼 파는 가르침으로 전율(戰慄)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특히 가을의 풍경에서는 정신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는 부모와 달라 보여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완전히 닮아간다는 것과 서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멋진 가르침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그러자 자원도 마주 합장해서 그 마음을 받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 또 그렇게 흘러갔다. 다시 자원의 말이 이어졌다.

“부모는 장성한 자녀가 배우자가 될 사람을 데려오면 무엇을 보는지 알아?”

그러자 춘매가 말했다.

“자녀는 자신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데리고 오지만 부모에게 데리고 가면 부모님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물어보는 말은 그의 부모님에 대해서잖아요? 그 이치가 금(金)의 의미와 서로 통한다는 것이 정말로 신기해요.”

“맞아, 부모는 알고 있는 거야. 지금은 서로 좋아서 사랑하지만 결국 그 상대방은 부모의 모습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말이지. 그래서 사랑스러운 딸이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데려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윗감의 부모에 대해서 먼저 물어보게 되는 거야. 그러면 딸은 반발(反撥)하지. 이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데 그의 부모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야.”

“아하~! 그게 또 그런 이치가 있었네요. 결국은 부모를 닮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끼리 서로 정혼을 맺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하겠어요. 자식은 보지 않아도 부모를 보면 안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 만약에 부모가 단명해서 안 계신다고 하면 딸의 부모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면 그 아들도 명이 짧은 혈통(血統)을 갖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딸은 청상과부(靑霜寡婦)가 될 수도 있으니 꺼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부모를 모르면 딸을 혼인시키는데 고민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금의 의미이기도 하지.”

“정말 놀랐어요. 그런데 일간(日干)이 경신금(庚辛金)이 아니라도 그렇다고 봐야 하잖아요?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연하잖아? 경신금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고, 사람의 본질은 같으니까 이렇게 해서 확대하면 인류(人類)의 모습도 드러나는 거야.”

“그렇긴 한데요. 그렇게 논하기로 든다면 굳이 금의 본성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오히려 금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인데 뭐가 문제일까? 그리고 다른 오행을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라고 보는 거야. 다만 금은 투명색이고, 상서(祥瑞)로운 자아(自我)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여기에서 찾게 되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호호호~!”

자원은 춘매의 걱정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는 듯이 이렇게 부드러운 말로 염려(念慮)를 잠재웠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의문이 이어질 것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깊이도 더해 갈 것이니 오히려 이러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원이었다.

“동생은 가을의 황금들판에서 감탄하고 있으나 사제지간(師弟之間)에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을걸?”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그봐, 내 그럴 줄 알았어. 호호호~!”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의미는 뭘까?”

“의미라니요? 제자가 물으니까 스승이 가르쳐 주는 것이잖아요? 제자가 묻지 않으면 스승도 가르칠 수가 없으니까요.”

“맞아. 제자가 묻는다는 것은 한 알의 콩을 제자의 가슴에 심는 거야. 그리고는 열심히 물을 주고 볕을 쪼여주지. 그 과정에서 제자는 감동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반발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무엇을 닮을까?”

“예? 무엇을 닮다니요?”

“제자는 어느 사이에 스승을 닮아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되면 이미 다 성장을 한 벼와 같은 거야. 스스로 자신의 문파를 세울 만큼의 성장을 한 것이지. 그렇게 되면 비로소 알게 돼. 결국은 스승의 학문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인품까지도 배웠다는 것을 말이야. 나도 싸부가 노산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냥 묻고 답을 하는 인연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노산을 떠나고 나서 혼자서 궁리하다가 문득문득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나도 어느 사이에 스승을 닮아가고 있었구나’하고 말이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던 거야. 그래서 깨달은 거야. 결국은 스승이 내 가슴에 씨앗을 뿌렸고, 나는 그래서 제자가 되어 있구나‘하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알았지. 스승을 잘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고, 이것은 콩이 땅을 잘 만나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이야.”

“아니, 스승이 땅이 되는 건가요?”

“뭐야? 아직도 몰랐단 말이야? 호호호~!”

“놀랐어요. 땅이 모든 것을 내어준다는 의미는 이미 알았으나 스승이 땅이 되어서 제자의 결실을 돕는다는 것은 충격적(衝擊的)인걸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과연 그것이 맞네요.”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은 콩이나 벼가 양질(良質)의 토양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스승을 잘 못 만난다는 말은 뭘 의미하겠어?”

“그것은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을 만나거나 과습(過濕)한 수렁을 만나서 뿌리를 뻗을 수가 없는 땅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겠네요? 놀라워요.”

“스승만 그럴까? 부모는 또 어떨까?”

“아, 맞아요.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녀가 성장하는 환경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고 할 수 있어요. 자녀의 기를 꺾고 자신의 주장대로 키우려는 부모도 많으니까요.”

“맞아, 자녀의 능력을 찾아서 행복한 삶이 되도록 안내하는 부모는 훌륭한 스승에 비할 만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자녀를 만들려고 하는 부모는 아무래도 부족함이 많은 스승과 같다고 할 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스승을 잘 만난다는 것은 부모를 잘 만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요. 부모는 선택할 수가 없으나 스승은 선택할 수가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책임은 자신의 몫이라고 할 테니까 밭을 선택할 수가 있는 콩이나 팥이라고 할 수가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지.”

“더구나 처음 밭이 잘못된 줄을 알면 다른 밭으로 옮아갈 수도 있잖아요? 이것도 중요해요. 콩이나 팥과 다른 점이기도 하네요. 호호호~!”

춘매는 문득 예전의 스승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것이 떠올라서 한마디 하게 되었는데 자원도 이에 대해서 동의했다.

“맞아, 동생도 그런 경험을 했구나. 물론 당시에는 상처를 받았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스승을 식별(識別)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완전히 헛된 일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잖아. 호호호~!”

“맞아요. 정말 세상에는 헛된 경험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어요.”

“아, 그건 아니야. 경험을 되살려서 잘 활용하면 동생의 말도 맞겠지만, 그렇게 쓰라린 경험을 했어도 무신경하게 다시 반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헛된 시간을 낭비할 따름이니까 말이야.”

“정말이에요. 결국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이 중요하네요. 아픈 경험은 앞으로 고통을 치유하는 약이 되어야 하고, 어리석은 경험은 지혜로워지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래, 동생의 생각이 매우 현명하네. 이렇게 해서 금의 본성(本性)과 금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연결을 시켜보면서 공부는 더욱 깊어지는 거야.”

“그러고 보니까, 인생에서도 그렇고, 계절에서도 그렇듯이 항상 어떻게 변하더라도 본래대로 돌아가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영혼도 마찬가지가 되겠죠?”

“당연하잖아? 일생을 자신의 몸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나 몸이 망가지고 나면 또 아무런 미련도 남김없이 몸을 떠나겠지. 자신의 경험만 추가한 채로 말이야.”

“아,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다 살고 난 다음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어요. 조금만 더 설명해 주세요.”

“어려울 것도 없지 매우 간단해. 콩을 심어서 가을이 되면 거두게 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콩은 다시 다음에 어느 상인에게 팔려갈 것이고, 주부(主婦)에게 팔려가면 밥이나 반찬이 될 것이고, 농부에게 팔려가면 다시 어느 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거야.”

“그렇겠네요. 그렇다면 다시 밭으로 돌아간 콩은 또 그대로의 삶을 살겠지만, 주부에게 팔려서 밥이 되어버린 콩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동생도 참. 비유로 말한 것을 그렇게까지 파고 들어가면 어떡해? 호호호~!”

“그런가요? 그래도 언니에게 물으면 무슨 답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서 자꾸 여쭙게 돼요. 어서 말해 줘봐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호호호~!”

“그런가? 정말 못말리는 동생이야. 호호호~!”

“밥이 된 콩은 어떤 이치로 설명해 주실지 궁금해요.”

자원이 기막혀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춘매가 자꾸만 채근(採根)했다. 그러자 자원이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이었다.

“그것은 콩의 변신(變身)이라고 봐야지. 농부가 콩을 키우는 것은 종자를 번식시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처음에 예정된 일정이잖겠어?”

“맞아요. 그렇게 되네요.”

“그러니까 콩이 밥으로 전환하는 것은 식물에서 동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야지.”

“예?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이나 말에게 먹히면 자신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잖아요?”

“그건 물질적인 관점이야.”

“점점 이해할 수가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좀 쉽게 말씀해 주세요. 정신적인 관점도 있다는 건가요?”

“아니, 정신적인 관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물질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눈에 보이는 물질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물질은 사람의 몸속에서 여전히 살아있겠지?”

“예? 갈수록 태산이네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봐, 내가 말했지? 더이상은 연결시키지 말라고 말이야. 그래도 말을 해 달라고 했으니까 설명하는 거야.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이쯤하고 그만둘까?”

그러자 염재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자원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해가 됩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시면 지금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차차로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사저(師姐)께서도 아마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잘 이해되실 것이니까요. 그보다도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멈추시면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어서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자원은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말을 이었다.

“오호, 염재의 이해력이 상당하시구나. 그렇다면 설명해 볼테니 잘 들어봐.”

“예.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염재 뿐이 아니라 오광도 눈을 반짝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모두 자원에게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