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제21장. 천하유람/ 7.사노라면 관재도 발생하고

작성일
2020-04-20 06:36
조회
1341

[0227] 제21장. 천하유람(天下遊覽)


7. 사노라면 관재(官災)도 발생하고


========================

우창이 잠결에 인기척을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서 잠을 깼다. 날은 훤하게 밝았고, 아침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여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밖으로 나가니 불을 지피다가 우창을 반겨준다.

“동생, 많이 불편했지?”

“덕분에 꿀잠을 잤습니다. 참 제 성은 진(陳)입니다. 어제는 미쳐 통성명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하~!”

“아, 진 동생 난 손청(孫晴)이야. 맑은 하늘에 태양처럼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네. 호호~!”

“손 누님의 이름이 참 좋습니다. 그 이름대로 밝은 날이 기다리고 있으니 구름과 비바람은 모두 지나가고 있네요. 축하드립니다.”

“동생의 그 말에 마음에선 벌써 태양의 밝은 빛이 가득해졌어. 오늘 아침엔 토란국을 끓였으니 어서 씻으셔.”

“예.”

우창이 씻고 나오자 손청이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줬다. 어제 길가에서 봤던 억세고 당찬 그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해맑은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보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아침을 먹으면서 뭔가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방법이 없을지를 궁리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 해결책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드러났다.

“도사님은 일어나셨습니까?”

아침을 먹고 손청과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손청이 문을 여니까 중년의 남자가 자루를 하나 들고 마당에 서 있었다.

“어, 홍주 아버지가 웬일로 이른 시간에 찾아오셨대. 어서 와서 차 마셔요.”

“무슨 일이겠어. 도사님을 좀 뵙고 싶어서지. 잘 계신가?”

홍주 아버지라고 불린 남자는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와서는 우창에게 뭔가 아쉬운 사람이 짓는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우창이 봐하니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들고 온 자루는 쌀이라고 했다. 우창의 숙박료를 내주려고 온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잘 되었다는 생각으로 맞인사를 하고는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의 일상적인 인사치레를 흘려들으면서 이 남자가 찾아온 시간을 가늠해서 점괘를 더듬었다. 시간은 묘시(卯時)쯤 되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227-2


암암리에 머릿속에다 사주를 써놓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가 기축(己丑)이었으니 오늘은 경인(庚寅)이겠군, 경인이면 앉은 자리에서 편재(偏財)가 득세(得勢)하고 있는 형상인데 월지(月支)의 술토(戌土)는 오화(午火)를 만나서 연합하게 되었으니 경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월(年月)이 불바다인데 인목(寅木)이 폭발력이 강한 연료를 가득 품고 대기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 폭발하기 직전의 긴장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 시주(時柱)에서 구세주가 나타난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다고 도락 스승님이 말씀해 주신 것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시주의 기묘(己卯)는 기토(己土)의 귀인이 너무나 무력해서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는 상황인지라 일간을 도와줄 형편은 애초에 못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점괘에서 분주(分柱)는 이미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만약에 조금 후에 찾아왔더라면 시주(時柱)가 경진(庚辰)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되어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나마 살아날 틈이 보인다고 하겠는데 옴짝달싹을 할 수도 없는 절박함을 떠올리자 우창의 표정이 굳어졌다. 의뢰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웬만하면 좋은 표정으로 대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점괘를 놓고서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아니, 여기에서 이렇게 어정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닐 텐데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빨리 뒷산으로라도 달아나야 합니다. 이미 잡으러 관원들이 출동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급한 것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우창이 이렇게 서두르자 두 사람이 오히려 더 놀랐다. 침착한 모습으로 여유로웠던 도사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허둥대는 것은 긴장감을 더욱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다시 분주를 들여다 봤다. 숨어있던 어둠 속의 간지는 기사(己巳)였다.

 

227--2


‘그래도 기사회생(起死回生)의 틈은 보이는군.’

찾아온 남자의 표정을 보니 이미 하얗게 질려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체없이 서두르면 목숨은 구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것도 분주의 살인상생(殺印相生)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창의 다급한 말에 손청도 아는 바가 있다는 듯이 얼른 숨으라고 뒷산을 가리켰다. 그 남자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황급하게 사라졌다. 우창은 그의 내력이 궁금했다. 어쩌면 손청도 어느 정도의 내막은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어서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이 손청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님, 이건 무슨 일이랍니까?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리도 안색이 안 좋을까요?”

“말도 말아. 살인사건에 연루되어서 쫓기고 있는데 어떻게 동생이 여기에서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새벽바람에 달려온 모양이네. 소문은 참 빠르기도 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지도 벌써 두 달도 넘었지 아마. 도박하다가 서로 싸우게 된 모양인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죽은 사람이 고위관직의 아들이었다네.”

“아,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참 딱하게 되었습니다.”

우창은 다시 한번 점신(占神)의 명료함에 감탄하고, 손청은 그러한 것을 손바닥처럼 보고 있는 우창의 예리함에 감탄했다.

“근데, 무슨 점술이 그렇게 용해? 많이 듣진 못했지만, 결과가 너무 신통해서 감탄한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잖아.”

그렇게 말을 하고 났는데 밖에서 한 무리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청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갔다.

밖에서는 칼과 창을 든 군졸들 십여 명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인솔자로 보이는 관병(官兵)이 거친 말투로 물었다.

“이 집에 살인자가 숨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소이다. 도망을 갈 곳도 없으니 순순히 나오라고 하시오.”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먼 친척의 동생이 놀러 와서 묵기는 했습니다만 그가 살인자란 말인가요?”

손청은 벌써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렸다. 홍주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 이야기는 내색할 수가 없으니 우창을 핑계로 대충 둘러댔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확인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갈 그들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문을 열어 줬다. 차를 마시다가 졸지에 변을 당한 우창도 속으로는 웃음을 지었지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순순히 밖으로 나가서 얼굴을 보여 줬다. 자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른 곳이라도 숨어있을 만한 공간이 있는지 뒤졌지만, 워낙 작은 집인지라 달리 더 찾아볼 곳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긴급하게 달려나갔다. 어지간히 급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잠시 후 둘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호호호~!”

“하하하~!”

무언가 모를 통쾌함으로 두 사람은 시원하게 웃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만, 서로 악연이 부딪쳐서 사람이 죽었으면 일단은 피하고 봐야 할 텐데 그 사람도 아직은 명줄이 남아 있었던지 이른 새벽에 찾아왔던가 봅니다. 우창도 점신께서 당장은 살려주라고 하셔서 일단 피하라고는 했습니다만 그다음의 일은 알 수가 없지요.”

“홍주 아버지도 원래는 선량한 사람이야. 재산도 꽤 많아서 이 마을에서는 부자로 잘살았지. 아마 어느 집이라도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걸.”

“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참 딱한 일이지. 사람이 망하려니까 이상한 것에 끌리게 되는 모양이더라구. 어쩌다가 장난으로 시작한 마작이 큰판으로 벌어져서는 전 재산을 날리게 되자 눈이 뒤집혔겠지. 처음에는 화목한 놀이였는데 말이야. 그래서 홍주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안타까워하고 지켜주고 싶어 하는데 워낙 큰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네.”

“그나마 과거의 선행으로 인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일은 또한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이겠습니다. 저도 이만 길을 나서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많은 신세를 졌어요. 누님은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으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가호도 있을 것입니다. 청도로 가서 자리를 잡고 식당을 하나 운영하세요. 그렇게 해서 배고픈 행인에게 기식공덕(飢食功德)을 쌓으면 그것도 사람으로 할 일이라고 하겠네요. 잘 아시겠지만, 자신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하시고요. 이렇게 길가는 행인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베풀어주시니 복을 받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하~!”

“고마워. 동생의 덕담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하네. 이대로 가면 섭섭한데 어쩌나...”

어제 우창을 만났던 대로변까지 따라 나오면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손청의 손을 잡아주고는 다시 휘적휘적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맑은 기운과 상쾌한 바람이 싱그럽게 얼굴을 간질이면서 지나간다. 문득 아침에 본 남자의 다급한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사람의 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을 최선(最善)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추길피흉(趨吉避凶)의 지름길이라는 것임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그런데, 문득 뒤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서 길가로 피했다. 돌아다 보니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가운데 아침에 찾아왔던 관원들이었다. 그 사람의 행적을 수소문하다가 허탕을 치고는 돌아가는 길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스쳐 지나가던 일행 중에서 두 사람이 가던 길을 되돌려서 다시 오는 것을 보고서 우창은 뭔가 섬찟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으나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우창의 앞에서 말을 세우고 내렸다.

“형씨 다시 만났구료. 좀 물어볼 것이 있으니 우리와 같이 좀 가줘야 하겠소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오늘의 일은 이렇게 시작될 모양이다. 그래서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그것도 강호(江湖)를 유람(遊覽)하는 한 풍경일 따름이려니.... 마침 죄수를 싣고 가려고 준비한 마차가 있었는데 그것을 타라고 한다. 비록 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타는 법을 배운 것도 아니므로 마차를 타는 것이 최선이었던 셈이다.

“나리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나 여쭤봅시다.”

“우린 제남주(齊南州)의 소속이니 그곳으로 가게 될 거요.”

우창은 내심 잘 되었다 싶었다. 특별히 누명을 쓸 일은 아니므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고, 그들도 모처럼 먼 길에 출동을 했으니 그냥 빈손으로 가기도 멋쩍은 터에 우창이라도 데려가면 헛일을 했다는 구박은 받지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잖아도 제남에 가볼 생각을 했던 것은 이제 한가로워졌으니 공자(孔子)의 고향이라는 곡부(曲阜)나 가볼 요량이었는데 일이 되느라고 이렇게 술술 풀려나간다고 생각했다. 이들과는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조용히 주변의 풍광을 즐겼다.

내도 건너고 산도 감돌아서 그렇게 두 시진 정도를 달려서 제남에 당도했다. 오랫동안 임치에 머물러서인지 몰라도 제남은 무척이나 번화한 도시였다. 사람도 많고 물자도 풍부해 보였고 그래서 활기가 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창을 보고는 못된 죄를 짓고 끌려가는 것으로 알았는지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내면의 세상과는 무관하게 행색을 보고서는 지레짐작으로 판단해서 죄인으로 간주(看做)하는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지 않아서 제남의 관부(官府)에 도착했는지 대장으로 보이는 관리가 말에서 내리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품이 잘 훈련된 모습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관리가 나와서 그들끼리 대화를 주고받고는 우창을 데리고 제남의 수령(首領)에게로 끌고 갔다. 수령의 지위는 포정사(布正使)였다. 엄숙한 분위기는 우창에게 퍽 낯설었다. 이러한 곳에 와 본 적도 없었고, 그러한 인연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꿀릴 것이 없었으니 당당하게 이끄는 대로 포정사의 앞에 섰다. 포정사는 높은 자리에서 우창을 내려다보고는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예, 진하경(陳河鏡)이라 합니다.”

“어디 사람인가?”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태생입니다.”

“산서 사람이 산동(山東)엔 무슨 일로 왔는가?”

“도학(道學)을 공부하느라고 노산(嶗山)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이제 고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주종건(周宗建)과는 무슨 관계인가?”

“주종건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만난 사람이 없었더냐?”

포정사의 언성(言聲)이 거칠어졌다. 우창은 순간 그 홍주 아버지라는 사람을 말하는 것임을 짐작했다. 이런때에는 말 한마디와 행동하나도 모두 중요한 단서로 작용을 할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나 누명을 씌워서 가두고는 참형에 처하는 일이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했다. 숨을 가다듬고는 똑똑하고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소인은 나그네인지라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진대 어찌 그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그러자 주종건을 잡으러 출동했던 포졸들 중에서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나서서 거들었다.

“간밤에 묵었던 집에서 만난 사람이 있었잖느냐?”

“그 집에 묵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미 뵈었었네요. 당시 군관나리께서 집을 다 살펴보셨고, 없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저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따져 물으시니 좀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인에게 물으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우창이 당당하게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하는 것을 본 포정사는 그래도 대인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눈치를 채고는 억울한 사람을 잡아다가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는 것을 간파한 것 같았다. 그는 표정을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뜨리고는 다시 말했다.

“그래, 노산에서는 무엇을 공부하셨는가?”

“약간의 음양오행에 대한 이치를 궁리하였습니다.”

“그럼 점도 볼 수 있는 것인가?”

“뭐, 약간의 조짐은 살피기도 합니다만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안으로 모시라고 명했다. 우창은 뭔가 얼떨떨했지만 나쁜 일은 아닐 것으로 보고 다시 점신의 영험함을 시험하게 된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를 따랐다.

“잠시 기다리시오.”

죄인으로 잡혀 온 놈이 졸지에 포정사의 손님이 되어버린 듯해서 그 사람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으나 주인의 분부를 어쩌지 못하여 안내만 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차를 손에 들린 비녀와 함께 포정사가 등장했다. 관복은 벗고 평상복으로 입은 것으로 봐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모양인가 싶었다.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우창이 일어섰다.

“자자, 앉으시게. 억울하게 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공식적인 일은 그렇게밖에 처리를 할 수가 없으니 양해하시게.”

“물론입니다. 억울함을 바로 간파해 주신 나리님의 안목에 감탄했습니다. 그만 보내주셔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뜻은....?”

“먼길에 먼지도 많이 마셨을 것이니 우선 차로 목이나 축이시게. 내가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이니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네. 허허~!”

나이는 대략 60세 전후로 품위가 있어 보이는 관리였다. 편안하게 제남까지 온 것만도 고마운데 손님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우창도 싫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항상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으니 주의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

“천박(淺薄)한 소인에게 어르신께서 하문하실 일이 뭐가 있으시겠습니까? 마음만 부담스러울 따름입니다.”

“너무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네. 나도 세상을 이만큼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느끼는 것도 약간은 있으니 말이네. 그보다도 바쁜 일도 없어 보이니 여기에서 며칠 편안하게 묵어도 좋으니까 편한 대로 하시게. 그래 다음의 목적지는 어디신고?”

“옛적에 동문수학하던 벗들이 보고 싶어서 태산(泰山)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아, 그랬군. 그럼 여정은 내가 조금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같아서 우창은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궁금할 따름이었다.

“해 주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떻게라도 도움을 드릴 방법이 있다면 최선의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은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우창은 가만히 기다렸다. 어차피 말은 할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종건에게 죽은 사람이 실은 내 아들이라오.”

“예? 어려운 일을 당하셨네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종건이란 사람이 그렇게도 흉포(凶暴)한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처음엔 그런 줄로 알았는데 조사를 해 보니 그 사람을 탓할 수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그러니까 내 아들이 못된 짓을 많이 했었다는 것을 알고는 삶의 재미가 모두 사라져버렸다네.”

“드릴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자신의 허물을 숨기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시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로운 그 표정에서 과연 삶의 낙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선 사과하겠네. 부하들의 등쌀에 괜한 고생을 하게 했군.”

“아닙니다. 이미 어르신의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그러셨다니 고맙네. 실은 그 문제가 그리 간단치가 않아서 말이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던 차에 문득 그대를 만나게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라네. 반드시 해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진 말게. 주변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부하이면서 내심으로는 나를 찍어누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인지라 하루하루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네.”

이렇게 말을 하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남들 보기에는 산동성(山東省)을 관할하는 큰 지위에 있어서 누구라도 부러워할 자리인데 막상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이 바로 바늘방석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가 있었다.

“큰일을 하시는 직책을 맡으셨으니 어쩌시겠습니까.”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 그렇게 튀어나왔다. 우창은 그러한 일은 하라고 떠밀어 줘도 마다하고 도망을 갈 입장인지라 순간적으로 공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막상 말을 그렇게 하고 보니 여간 실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마치 우창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을 이었다.

“요즘은 구름처럼 자유롭게 오가는 그대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네. 그대는 젊은 나이임에도 어찌 그리도 자유의 길을 잘도 찾아갔는지 부러울 따름이네. 허허~!”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받아주니 미안한 마음이 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하지 싶어서 말을 꺼냈다.

“대인께서 걱정되시는 것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내막의 대강을 들려주시면 성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은 내 자식과 연루된 피해자들이 200여 명이 된다네. 그들이 모두 피해자들인데 그냥 두자니 더 높은 곳으로 알려질까 두렵고, 해결하자니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단 말이네. 혹 이에 대해서 어떤 고견이 있으면 귀를 열고 듣도록 하겠네. 첫눈에 그대의 범상치 않은 눈빛을 보고서 내 고민을 의논해 봐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으니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의견을 주시기 바라네.”

“그렇게 간곡한 말씀을 하시니 소인도 달리 드릴 말씀이 없겠습니다. 얕은 재주나마 부려볼 것이니 대인의 생년생시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사주를 적었다. 이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사주에 대한 간지(干支)는 알고 있어서 별도로 천세력(千歲曆)을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이름은 소지민(蘇之敏)이라고 했다.

227-1


우창은 사주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길에서 만난 사람일지라도 허투루 말을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지금은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자리이니 아무래도 조금은 더 신경을 써서 살펴보려고 했다.

‘올해 나이는 62세로군. 용신은 관인상생격(官印相生格)으로 금(金)이 되는 구조이니 어려서는 고생도 많이 했겠고, 중년이 되어서야 근면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만큼의 지위까지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60고개를 넘어가면서 자식의 자리인 시지(時支)의 술토(戌土)가 발동을 걸어서 그동안 쌓은 공이 모두 허물어지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구나. 참 팔자의 사슬을 벗어날 길이 없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말년의 시주가 주는 의미는 지대(至大)하구나...’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꺼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은 멈칫거릴 필요가 없고,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해봤자 피차에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외람(猥濫)되오나....”

“아, 편하게 말해 주시게. 전혀 개의치 않겠네.”

“대인님께서는 지금 고민하시는 것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까 봐서 두려운 것입니까?”

“음.... 그런 걱정도 크다고 할 수 있겠지.”

“딱 깨 놓고 말씀드립니다. 이제 수행자의 길로 가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나라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서 노력해 오셨으므로 앞으로 더 버틴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오히려 치열한 생존권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당할 암시가 더 커진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아드님의 행위가 미울 수도 있습니다만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지금 바로 옷을 벗고 초야로 들어가서 바위 아래의 흐르는 물을 마시면서 수행을 하신다면 순식간에 번뇌의 불이 꺼지고 청량한 봄날을 맞이하게 될 수가 있다고 사주에서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해 봤지. 그러면서도 일말의 미련이 남는 것은 여태까지 공을 기울였는데 상서(尙書)나 시랑(侍郞)을 해보고 관직을 그만둬야 자손만대에 영화로운 가문이 되지 않겠느냐는 미련도 없지는 않아서 말이네.”

“이해합니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자손만대가 중요하십니까? 오늘 이 순간의 삶이 중요하십니까?”

“그야....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면서 나중에 영예로운 이름을 얻은들 어디에 쓰겠는가.”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네.”

“그럼 되었습니다.”

“뭐가 말인가?”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우창의 마지막 말이 울려퍼졌다.

“자유를 누리시면 됩니다. 지금 관직을 내려놓으시고 노산으로 가시는 겁니다. 그곳에서 그동안 위로는 왕의 눈치를 보고 아래로는 부하의 주장을 챙기느라고 마음대로 누리지 못했던 자연과 하나가 되시면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사주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하라는 것인데 그동안 쌓아놓은 것으로 생각되는 지위가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제분으로 인한 문제들도 말끔히 해소될 것입니다. 물론 소인이 보기에는 부인께서도 기꺼이 동행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부인의 고통은 대인이 겪으신 것의 열 배는 될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니 결심만 하시면 어디를 가더라도 모두 환영해 줄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세상에 진 빚을 다 갚으신 것입니다. 자유의 길로 가시는 것을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

소지민이 아무런 말이 없자. 우창은 괜한 말을 주제넘게 떠들었나 싶은 후회가 되었다. 항상 뒤늦은 후회가 문제이다. 말하기 전에 재삼 고려하고서 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소지민이 우창을 바라보는데 눈가는 이미 촉촉했다. 회한이 드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것으로 봐도 되지 싶었다.

“잘 알았네. 고맙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그대를 곡부까지 편히 가도록 해 주는 것이지 싶네. 부디 사양하지 말게. 그리고 약간의 은자는 필요할 적에 요긴하게 사용하시기 바라네. 나는 마무리가 되는대로 노산으로 찾아가겠네. 소탈(疏脫)하게 숨김없이 말을 해 준 사람은 그대가 처음일세. 평생을 잊지 않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겠네. 잘 가시게.”

“예, 잘 수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운이 함께 하실 겁니다.”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오는 사이에 분주하게 사람이 오가더니 관헌 입구에 나오자 소박하지만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안락한 마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고, 마부는 관복을 입었는데 수행원까지 창검을 들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우창이 그 앞으로 다가가자 즉시로 마차의 문을 열고는 안으로 모시고 곡부를 향해서 출발했다. 마차 안에는 주전부리도 실려 있었고, 작은 주머니에는 은자도 들어있었다. 물론 집을 나서면 매우 소중한 것이 돈이다. 그래서 포정사의 호의로 알고 고맙게 받기로 했다. 편안하게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는 일은 천하유람의 최고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제남에서 곡부까지는 대략 400여 리이다. 말을 몰고 가는 관원에게 물어보니 걸어서 간다면 열흘도 걸리겠지만 다행히 마차로 가면 편안하게 3일 정도면 곡부에 도착할 것이란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우창은 진심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편안하게 천하유람을 제대로 즐기면서 제남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