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재의 단독성분(單獨成分)

작성일
2007-08-2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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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가 작용을 하게 되면 알뜰하고 꼼꼼한 면모를 갖게 된다. 이러한 성분은 현실적인 수치에 민감하게 되는데, 수치에 밝으므로 경제관념(經濟觀念)이 무엇보다도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정재를 생각하면 바로 돈이 연상된다면 성공이다. 이와 같은 성분이기 때문에 대충대충 넘어가는 계산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매우 정확한 수치에 의해서 결과를 전달해 주지 않으면 정재는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재는 육체적(肉體的)인 성분이 강하다. 그래서 식욕(食慾)이나 성욕(性慾)이 강할 수가 있는데,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물을 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니, 재물이 있어야 먹어주고 종족을 보존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울러 재산(財産)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재물의 흐름을 잘 파악하기도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여간해서 잘 나오지 않게 되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정재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자신의 재물을 관리하고자 한다. 남과 함께 관리하게 되면 불안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상대방이 재물을 갖고 튀어 달아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경영하는 일은 시작하기 어렵고, 작은 규모라도 가능하면 단독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재물이 들어오면 다시 확장시킬 방법을 강구한다. 물론 가장 안전하게 확장시켜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부동산이 좋은지, 상가건물이 좋은지를 놓고 많은 궁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다가 남의 꼬임에 당해서 전 재산을 탕진하고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꼼꼼하게 저울질을 한다고 해도 재물이 좋고, 자신도 사람이니 그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재는 재물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함부로 인심을 쓰듯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을 가장 혐오한다. 알뜰한 생활이 몸에 배인 사람이다. 식당에서도 함께 밥을 먹었으면 밥값은 각자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자신이 먹은 만큼 내는 것이 왜 쩨쩨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의 공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꼭 써야 할 것에는 거금도 선뜻 내어 놓는다. 이러한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재의 역할이 아니고 정재가 기본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다른 성분인 정관(正官)이나 상관(傷官)이 운에서 들어와 자신의 마음을 자극하여 일어난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정재의 사전에는 그러한 행위가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재는 모험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위험한 것일수록 재물을 모을 기회를 준다고 하는 것을 알더라도 그러한 것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살아있느냐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안전운행(安全運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과속(過速)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과속하면 위험한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고의 위험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교통경찰과의 만남, 보험료의 인상 등등 힘들고 불리한 조건이 수두룩한데 왜 과속을 하느냐는 이야기이다. 물론 기름이 많이 소비된다는 것도 그 이유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정재는 육체적인 쾌락에도 민감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성욕에서 느끼는 신경계(神經系)의 긴장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게 된다. 정신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믿기 힘들다. 사랑이라면 남녀의 결합으로 오르가즘이 주어지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정재는 신체적인 것이라고 판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찾아내는데, 이러한 것 또한 신체에 관심을 둔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을 의미 없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정재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한 싯다르타에게서도 정재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왜냐면 보통은 죽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그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관찰의 소감은 병적(病的)이라고 할 정도로 예민했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도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고뇌에서 정재를 읽는다.

정재는 규칙적으로 몸을 단련시킨다. 그것이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재와 몸의 연관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몸에 해로운 것은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가령 불량식품 같은 경우 정재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 반대로 건강식품에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기도 하며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더욱 가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몸에 좋은 것을 맛있게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정재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몸에 해롭기 때문이다. 술도 먹지 않는다. 또한 몸에 해롭기 때문이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를 한다. 그리고 종교인들은 하나같이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 대한 연결점은 정재가 갖고 있다. 종교인의 영생(永生)은 이 몸이 죽지 않는 것이다. 몸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은 정재에게는 의미가 없는 환상(幻想)이다. 정재는 그러한 말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 극락세계에 간다는 목적으로 고행을 할 적에, 도가(道家)에서는 신선(神仙)이 되어서 오래도록 잘 살아갈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신선은 정재의 최상의 목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