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제30장. 정신(精神)/ 22.깨침의 희열(喜悅)

작성일
2021-11-20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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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제30장. 정신(精神) 


22. 깨침의 희열(喜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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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우창과 채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경(水鏡)이 손을 들고는 감탄하면서 말했다.

“스승님, 생각을 해 보니, 학문을 배우는 제자도 열정이 필요합니다만, 실로 더 중요한 것은 스승의 열정이네요. 스승이 열정을 갖지 않는다면 제자가 아무리 열정을 불태우고 싶어도 불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요. 이렇게 오묘한 이치가 있었다는 것도 말이에요. 정말 감격(感激)했어요.”

수경이 이렇게 말하다가는 목이 메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熱望)이 그렇게 컸음에도 과거에는 왠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掩襲)했었던 것은 이렇게 10년을 공부한다고 해도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밝은 빛이 보였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제는 혼자서 어디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후에 수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스승님, 병(丙)은 상화(相火)이기도 하지만 사화(師火)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하늘에서 밝은 빛을 비춰주는 스승의 불보다 더 밝은 빛이 어디 또 있겠어요?”

“그런가? 과연 수경의 깨달음이 적지 않음을 알겠군. 축하하네. 하하하~!”

“이제야 왜 스승의 은혜(恩惠)를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어요. 예전에는 스승이 망자존대(妄自尊大)하여 스스로 높여서 대접을 받고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의혹(疑惑)도 없지 않았거든요. 이제 그러한 의운(疑雲)은 말끔히 사라지고 청명(淸明)한 하늘에 밝은 태양이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일점(一點)의 의혹(疑惑)도 없는 수경의 마음을 스승님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그 마음을 봤네. 하하하~!”

우창도 수경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스승의 인연에 대해서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적에 들었던 생각은 이미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잠시 수경의 말에 공감하던 채운이 말했다.

“스승님, 병(丙)이 빛이고 스승이라는 수경 언니의 말에 십분(十分) 공감해요. 그런데 빛이 밝으면 그림자가 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아, 과거에는 빛이 밝지 않아서 그림자도 특별히 어둡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이제 밝은 빛을 보고 나니까 그동안 밝은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빛이 아니라 어슴푸레한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제 그것을 알고 나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두운 것이었는지를 확연히 알게 된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와~! 매우 적절한 비유네요. 밝은 빛을 한 번 느낀 사람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겠어요. 이것은 눈높이가 그만큼 밝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네. 다만 진실로 밝음을 깨달은 사람은 어둠조차도 잘 살필 줄을 알게 된다는 것도 말해줘야 하겠군. 어쩌면 여기에서부터는 스승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네. 하하하~!”

“어둠조차도 말씀이세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네요. 호호호~!”

채운이 웃는 바람에 모두 따라서 한바탕 웃었다. 병(丙)을 통해서 그 밝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채운이 문득 정경(丁庚)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우창에게 물었다.

“병(丙)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니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정(丁)은 내부에서 펄펄 끓는 도가니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그리고 그 도가니에는 항상 경(庚)이 녹고 굳기를 반복한다는 의미도 될까요?”

“오호~! 채운도 참 끈질긴 마음이 있으니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네. 당연히 사유와 명상을 할 적에는 도가니에서 힘차게 끓어오르는 순간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타고난 본성은 재탄생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라네.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 우리는 수행(修行)이라고 하지. 하하하~!”

“아하~! 그렇다면 수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변화할 마음을 갖는 것이었네요? 그렇다면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 이해를 하면 좋을까요?”

“수행하지 않으면 처음에 태어날 적에 갖고 있었던 모습을 그대로 삶의 마지막까지 갖고 가는 것이라고 하겠네. 이것은 마치 처음에 태어날 적에 어머니 자궁에서 만들어진 가마솥이라고 한다면 태어난 이후로도 그대로 솥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네, 그래서 평생 밥만 하다가 삶을 마치게 되지. 이러한 사람에게는 숙명론(宿命論)을 그대로 적용 시켜도 된다네.”

“아니, 스승님. 원래 명학(命學)은 숙명론을 전제(前提)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아.”

“그런데 지금 하시는 말씀으로는 명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고난 숙명은 어떻게 되나요?”

“뭘 어떻게 되겠나? 일평생 깨달음을 통한 재탄생의 위대한 순간을 모른 채로 그렇게 살다가 가는 사람들만 사주를 보고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하하하~!”

채운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듯이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수행하는 사람이 사주를 보러 오면요?”

“오호~! 그것이 걱정인가?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네.”

“그것을 알려 주세요.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요. 호호호~!”

“그 한마디? 이렇게 말해주게. ‘선생의 운명은 이미 변화되었습니다.’라고 말이네. 하하하~!”

“아니, 그렇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명리학(命理學)이 황당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물으면 다시 말을 해 주게. ‘이미 수행을 많이 쌓아서 솥을 녹여서 여의주를 만드셨습니다’라고 말이네. 그 말을 못 알아들으면 가짜 수행자이고, 알아들으면 진짜 수행자일 테니까. 하하하~!”

“그렇다면 못 알아들을 수도 있을까요?”

“스스로 용광로에서 자신의 업장(業障)을 녹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것을 믿지 못하겠지만 이미 그러한 과정을 단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게 되는 까닭이라네.”

“정말로 스승님의 말씀을 믿어도 되는 걸까요?”

“믿고 말고는 채운이 판단할 일이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우창이니 무엇을 어쩌겠는가? 혹 채운은 불같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갑자기 사랑은 왜 말씀하시는 거죠?”

“아, 보통 사람도 단 한 번의 도가니에 들어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을 하게 되었을 때니까 말이지.”

“그랬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변화할까요?”

“삶은 사랑하기 전과 후로 나뉘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이 겪게 되는 단 한 번의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겠지. 그 순간을 환희(歡喜)라고 한다네. 하하하~!”

“사랑은 반복적으로 할 수가 있는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처음의 사랑만 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 두번 째의 사랑은 첫사랑에서 겪었던 것과는 현저(顯著)히 다른 까닭이라네.”

“첫사랑의 의미가 내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이네요?”

“비로소 성인(成人)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으니까.”

“아, 그런 의미였군요. 이제 이해가 되었어요. 그런데 환희의 순간이 계속해서 찾아오게 할 방법은 없나요?”

“왜 없겠는가. 그러한 방법도 있지.”

“어떤 방법이죠?”

“수행~!”

“수행하면서 얻는 희열(喜悅)과 사랑에서 얻는 환희(歡喜)가 같은 것일까요?”

“다르지.”

“다르다면 같은 것으로 논하기 어렵잖아요?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우창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채운의 열기를 잠시 식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것을 말로 구분한다면, 홀로 느끼는 것은 희열이고 함께 느끼는 것은 환희지. 수행자는 항상 홀로 희열에 잠기는 순간을 만끽(滿喫)한다네. 그리고 그 맛을 보게 된 사람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은 일생에 한 번 정도로 느끼는 환희를 수행자는 수시로 느끼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지. 매일 느낄 수도 있다네. 그렇게 도가니에서 담금질하는데 어찌 타고난 본성인들 바뀌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네. 그러니까 수행자가 사주를 보러 온다면 한마디만 해 주면 되네.”

“아 참, 그 방법을 잘 알려 주셔야죠. 뭐라고 하면 되죠?”

“차나 한잔 드시지요~!”

“예? 애써 물어보러 왔다가 그 말을 듣고서 화를 내지 않을까요?”

“보장(保障)하건대 절대로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네.”

“그건 또 왜인가요?”

“사주를 보는 학자가 자신의 그릇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증(認證)해 줬으니까 말이지. 그보다 기쁜 일이 또 있겠는가?”

“정말 그렇겠어요. 그렇다면 환희의 순간은 어떤 상태일까요?”

“그야말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지. 도가니에서 그릇이 완전히 녹아서 액화(液化)가 되어버린 상태이고, 그 순간에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다시 새로운 그릇으로 탄생하는 것이라네. 하하하~!”

“스승님께서는 그러한 경험을 많이 하셨겠어요?”

“아마도. 하하하~!”

“궁금해요. 스승님은 몇 번이나 경험하셨을까요?”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남이 겪은 희열을 이야기로 들어봐야 모두 수박의 겉껍질을 핥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네. 그러니까 남이 공부한 이야기를 듣지 말고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물어야 한다네. 하하하~!”

“맞아요. 호호호~!”

“다만 호기심(好奇心)에 불을 지피는 효과는 있으니까 가끔은 스승을 만나서 귀중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고 하겠군.”

“솥이 여의주(如意珠)로 바뀌고, 왕의 마패(馬牌)로 바뀌고, 천자의 옥새(玉璽)로 바뀐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이미 채운도 그 문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열심히 녹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면 된다네. 그것을 담금질이라고 하지.”

“정말, 주체(主體)를 금이라고 하고 보니까 금화(金火)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명쾌(明快)하게 구분할 수가 있겠어요. 결국은 불이 없이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도 명료해졌고요.”

“당연하지. 불에 들어가지 못한 쇠는 변형(變形)을 할 수가 없으니까.”

“잘 알았어요. 다음에는 병에 대해서 여쭙겠어요. 병(丙)은 밝음의 상징(象徵)이잖아요? 그렇다면 병을 상징할 만한 존재는 무엇이 있을까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도를 깨달으면 점점 밝아지게 되고, 밝아지면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지.”

“아, 그래서 명안종사(明眼宗師)라고 하나요?”

“그렇지. 공부가 된 만큼만 알아볼 수가 있으니까. 종사는 상대가 얼마나 담금질을 했는지를 바로 알아본다는 말의 의미도 알겠지?”

“그래서 도인이 도인을 알아보는 것이군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은 그 사랑의 환희를 느껴 본 사람의 표정만 봐도 바로 알아챌 수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인가요? 왠지 그것도 가능하지싶어요.”

“물론이지. 그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한다네. 하하하~!”

채운은 우창의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희열에 대한 느낌을 알 것도 같았다. 문득, 사랑에 대한 마음으로 가슴이 아팠던 과거의 추억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스승님,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음양이지 무엇이겠나.”

“환희의 뒤에는 좌절(挫折)이 찾아온다면 두려워서 환희를 추구하겠어요?”

“그래서 용기가 없는 자는 영원히 자신을 변형시키지 못한다네. 하하하~!”

“아, 사랑하고 상처받기를 반복하는 것도 수행인가요?”

“그건 수행이라고 하긴 어렵겠지. 수행에는 상처가 없으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이치는 하나가 아니던가요?”

“이유는 단지 하나뿐이라네. 수행은 혼자서 겪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으로 인한 상처를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지. 그런데 사랑은 상대가 있단 말이네. 그러니까 음양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네. 하하하~!”

“와우~! 참으로 오묘(奧妙)하네요. 깨달음과 경(庚)과 정(丁)의 관계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져요. 그냥 막연했던 것이 구체화(具體化)되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이 조금은 있는 것이겠죠?”

“당연하지.”

“어쩌면 병정화(丙丁火)의 이치가 이렇게 달라져 보일 수가 있을까요? 이치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는 상상으로 짐작해서는 될 일이 아니에요. 호호호~!”

“그게 바로 학문의 희열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학자에게는 학문의 희열이 있다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대각(大覺)을 이룬다면 학문의 희열은 겨우 반딧불이의 반짝임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그때까지는 황홀(恍惚)하고 영롱(玲瓏)하다네. 하하하~!”

“그런 순간은 고승(高僧)들이나 진인(眞人)의 경지에서나 느낄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음양(陰陽)도 잊고, 오행(五行)도 잊고 구름처럼 허허로운 마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될 따름이겠지. 하하하~!”

“제자도 어서 그러한 경지에서 번뇌(煩惱)를 잊고 자유를 누리고 싶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만 비로소 참된 자연인(自然人)이니까 말이네. 하하하~!”

“그렇다면 스승님은 자연인이신가요?”

“무슨 소린가. 자연인이라면 오행원의 간판이 떨어지는 날이겠지. 하하하~!”

“아, 그러니까 제자를 가르치는 것도 아직은 덜된 자연인이라는 뜻인가요?”

“물론이지. 누군가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고 깨닫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면 아직도 큰 깨달음에 대한 맛은 보지 못한 것으로 봐야지.”

우창의 말을 듣던 채운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예전에 어느 절에 고승이 있다고 해서 친견(親見)했던 적이 있어요. 찾아뵙고는 당돌하게 물었죠. ‘저는 전생에 무엇을 했을까요?’라고 말이에요.”

“오호~! 그래서?”

“그 대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를 제자들이 추켜세워서 억지로 도인을 만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산문(山門)을 나오면서 괜히 찾아갔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금 스승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제자가 얼마나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어서 부끄러워졌어요. 호호호~!”

“물론, 채운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어. 세상에는 만들어진 가짜 도인도 많으니까 말이지. 하하하~!”

“그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당연하지.”

“예? 그것을 알려 주세요. 정말 알고 싶어요. 그래야 앞으로도 속지 않을 것이잖아요.”

채운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채운이 도인이 되면 간단한 일이야. 하하하~!”

“아니, 도인이 된 다음에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 전에 알고 싶은 거죠. 참 내.”

채운은 우창의 말이 기가 막혀서 혼자 혀를 찼다. 그러자 우창이 웃으면서 말했다.

“도인도 등급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지. 그러니까 작은 도인이 조금 더 작은 도인을 놀려먹고, 또 조금 큰 도인에게 혼이 나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니까 너무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라네. 하하하~!”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옛날이야기나 해 줄까?”

“와~! 좋아요. 무슨 이야기라도 스승님께서 해 주시면 재미있으니까요.”

“송나라에 소동파(蘇東坡)라는 사람이 있었다더군.”

“소동파라면 당송팔가(唐宋八家)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잖아요?”

“맞아, 그 소동파가 불교 수행을 열심히 하다가 무엇을 맛본 모양이네. 그래서 자칭 도인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지.”

“공부하다가 보면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잖아요. 호호호~!”

“그가 형주(荊州)의 자사(刺史)로 부임(赴任)을 했는데, 자리를 잡은 다음에는 도를 통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라네. 관헌(官憲)들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으니까 도인을 찾아가서 한바탕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

“어디엔들 도인이 없는 곳이 있겠어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옥천사(玉泉寺)가 있고, 그곳에 승호(承皓)라는 도승(道僧)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지. 그 말을 듣고는 말을 타고 찾아간 거야.”

“와우~! 역시 대가였네요. 문장만 잘 쓰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잖아요.”

“그가 옥천사에 가서 승오 대사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앉았는데 소동파는 앉아서 차만 마실 뿐 아무런 말이 없는지라 선사가 물었을 것이 아닌가. ‘그대는 누구시오?’라고 말이지.”

“그랬겠네요.”

“소동파가 말하기를 ‘소생은 칭(秤)가 올시다.’라고 했다더군.”

“칭씨요? 그런 성도 있었나요?”

“소동파가 말한 뜻은, ‘예. 저울 칭의 칭가입니다.’라고 답을 한 거야. 그 의도는 ‘대사의 도가 높다고 들었는데 어디 내 저울에 올려놔 보쇼~!’라는 도도함이 넘쳐나는 말이라고 하겠네.”

“정말 대단하네요. 감히 고승에게 도전장(挑戰狀)을 내민 것이잖아요? 그래서요?”

“대사는 소동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억~!!!’하고 대갈일성(大喝一聲)을 외쳤다네.”

“아니, 저울을 갖고 왔다는데 소리를 지르다뇨? 노인께서 화가 난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요. 아무래도 겨루기에서는 진 것으로 봐야 하겠는걸요. 호호호~!”

채운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소감을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마음도 포함되었으나 실은 함께 이야기를 듣는 도반들이 생각을 정리할 틈일 주기 위한 배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창도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승호 대사가 조용하게 소동파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가 조용히 귀에다 대고 또 말을 해요?”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어디 몇 근이던가?’라고.”

“예? 아니,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소동파는 몇 근이라고 말을 했나요?”

“저울대를 꺼내 보지도 못했던 모양이야. 귀가 멍~하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지. 그야말로 까불다가 한 방 오지게 얻어맞은 셈이었던 거지.”

“아하, 그러니까 승호 대사의 법력을 저울질하러 갔는데 저울대도 꺼내 보지 못했네요? 와우~! 재미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결과가 중요한가? 도인들의 놀이가 이렇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지. 하하하~!”

“그러니까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소동파도 보통의 경지를 넘은 사람으로 몇 번은 도가니에 들어갔던 사람이라고 하겠는데, 소동파가 열 번을 달궈서 그릇이 커졌다면 승호 대사는 천 번을 달궈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경지에서 노닐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그야말로 범인(凡人)으로서야 짐작도 하지 못할 경계(境界)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우리는 우리끼리 놀다가 어느 순간에 채운도 배움의 길이 끊어진 곳을 만나게 되면 비로소 승호 대사를 찾아가서 차 한 잔 달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네.”

“배움의 길이 끊어진 곳은 무슨 뜻이죠?”

“아, 그 말은 더 배울 것이 없는 순간이지. 그리고 다른 말로는 궁금한 것이 없는 경지(境地)이고, 또 다른 말로는 최후의 깨달음까지도 다다랐다고 해야 하겠군.”

“에구, 그런 때가 오겠어요? 아니, 상상도 해 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나긴 하네요. 호호호~!”

“그러니까 태양과 같은 사람이라면 절정(絶頂)의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고 하겠고, 그러한 도인을 만나면 빛을 나눠 가져서 덩달아 같은 도인의 길을 찾아갈 수가 있을 것으로 봐도 될 것이네.”

“아하~! 병(丙)이 난폭(亂暴)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될까요?”

“오호~! 역시 채운이로군. 멋진 말이네~!”

“그런가요? 왜냐면 승호 대사는 결코 친절하거나 자상하지는 않았잖아요. 그래서 문득 큰 지혜를 이룬 도인은 무정(無情)한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같은 작은 불이 어찌 태양과 같은 위인들의 내심(內心)을 짐작이나 할 수가 있겠는가만 도인들의 설화(說話)를 보면 그런 경우는 흔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병(丙)의 난폭함으로 인식이 될 수도 있겠네. 병은 무심(無心)한 자연의 이치를 따르나 그것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또 달리 섭섭하게 느낄 수도 있는 거니까.”

“맞아요. 태양은 여름이기에 뜨거운 빛을 내릴 뿐인데, 농부는 갈라 터지는 논바닥을 보면서 태양을 원망하는 것과 같겠네요.”

“점점 예쁜 말만 하는구나. 그만하면 병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봐도 되겠네. 잘했어. 하하하~!”

“정말 스승님의 가르침이 이렇게도 미혹(迷惑)한 제자에게 밝은 빛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고마울 따름이지. 하하하~!”

“그런데 인간(人間)의 병정(丙丁)은 그렇다고 하거니와, 신명(神明)의 병정(丙丁)도 있을까요? 도인의 차원(次元)을 신의 경지라고 하는 말이 문득 떠올랐어요. 신경(神境)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아니 내가 그것을 설명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창이 뜬금없이 말하는 채운의 말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자 채운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이 깨달으신 만큼만 들려주시면 돼요. 그야말로 하늘의 뜬구름같은 이야기는 들려주셔도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스승님께서 설명해 주시는 만큼의 경계(境界)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호호호~!”

채운의 말에 다른 제자들도 일제히 합장했다. 모두가 원하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창도 잠시 생각하면서 어떻게 영계(靈界)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줘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