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제30장. 정신(精神)/ 18.타오르는 열정(熱情)

작성일
2021-10-30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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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제30장. 정신(精神) 


18. 타오르는 열정(熱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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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이 밝아오고 참새들의 노랫소리가 창을 넘어 방으로 날아들었다. 비록 늦게 잠을 잤지만 상쾌한 새벽의 기운을 느끼면서 가볍게 눈을 뜬 우창은 어제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 만큼이나마 정리를 해서 적었다. 남는 것은 기록뿐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춘매의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오광도 일어나서 춘매를 돕고 있다가 우창을 보고 인사를 했다.

“스승님 편히 쉬셨습니까~!”

“스승님 잘 쉬셨어요?”

“덕분에 잘 잤어. 또 하루가 주어졌으니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하하~!”

우창은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는 반시진(半時辰) 정도를 정좌(靜坐)하여 마음과 몸의 균형을 잡았다. 오늘도 열정적인 제자들이 찾아와서 한바탕 학문의 꽃을 피우게 될 것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삶의 짜릿한 순간을 만끽하는 아침이었다. 정성으로 마련한 밥을 먹고는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는 식구들을 도와서 강의실을 정리하는데 춘매가 말했다.

“스승님, 아무래도 책상과 의자를 더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모두 편안한 자세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요. 오늘 잠시 나가서 좀 알아봐야겠어요.”

“춘매도 그 생각을 했구나. 마침 돈도 생겼으니 편안한 것으로 좀 알아보고 넉넉하게 준비하면 좋겠네. 공간이 비좁지는 않겠지?”

“50명 정도는 충분해요. 정말 오행원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어쩔뻔했나 싶어요. 호호호~!”

“아마도 시절의 흐름이란 이런 것인가 싶지? 때가 되면 모이고, 모이면 또 함께 하는 인연이 말이네. 하하하~!”

“맞아요. 정말 재미있어요. 아침밥을 먹고 제자들 오기 전에 얼른 나가서 부탁해 놓고 와야겠어요. 그래야 저도 공부하잖아요? 호호호~!”

“그래야지. 어서 다녀 와.”

밖에 나갔다 돌아온 춘매가 책상을 오후에 가져오기로 했다고 전해주고는 공부 준비를 하러 들어갔다. 우창은 오늘의 가르칠 내용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봤다.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정(丁)의 마음에 대해서 살펴볼 순서였다. 진시말(辰時末)이 되자 이제 헤어졌던 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왕량과 수경도 담소를 나누면서 들어와서 우창을 보고는 인사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참 좋은 날이네. 어서 오시게들~!”

채운은 어제보다 더욱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스승님, 밤사이에 뵙고 싶어서 눈이 짓무르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다시 뵈니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아요. 호호호~!”

“에구~ 상관빨이란. 하하하~!”

우창도 예쁘게 말하는 제자가 곱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핀잔 같은 핀잔 아닌 마음의 표현을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소란한 인사를 주고받고는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가장 먼저 채운이 말을 꺼냈다. 모두 채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화(丁火)의 마음은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면 될까요?”

오행원에서는 벌써부터 공부가 시작되었다. 우창이 채운에게 반문(反問)했다.

“채운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지?”

“제가 알고 있는 정화(丁火)는 촛불과 등잔불만 떠올라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어요. 채운이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일까요? 그래도 일리는 있을까요?”

“일리야 있다고 봐야지. 촛불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지?”

“그건, 아무래도 어둠을 밝힌다는 의미가 떠오르죠.”

“그것은 오류(誤謬)로군. 그렇게 대입한다면 정화(丁火)를 설명할 방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하겠군.”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촛불과 정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하겠죠?”

“아니지. 어떤 물건을 바라볼 적에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는 것이 중요한 철학자의 시선(視線)이 아닐까?”

“아하~! 존재하는 것은 촛불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이니까 그렇다는 말씀이죠?”

“옳지~! 그래야 채운 답지. 하하하~!”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촛불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는 것이 정화를 이해하는 방법이 될까요?”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촛불은 타오른다고 하나?”

“그렇게도 말하죠. 불은 어차피 위로 올라가니까요. 아,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요. 촛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촛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오히려 촛불을 촛불의 마음에 들어가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물론 그런다고 해서 촛불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테니 말이에요. 촛불의 입장에서는 타오르고 있는 것일 따름이네요. 밝힌다는 생각이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되는 걸까요?”

“맞아~! 불은 타오르고 물은 흘러가지, 아니 물도 흘러간다고 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서 그렇게 봤을 따름이로군. 물은 응고(凝固)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지. 하하하~!”

“그런가요? 그렇다면 불도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타고 있을 따름이잖아요? 타는데 위로 올라가는 것을 사람이 바라보고서 타오른다고 할 따름이겠어요.”

“오호~! 훨씬 나아졌군. 적어도 불의 근처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지. 하하~!”

우창은 이렇게 제자들과 자연의 이치를 논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것을 깨쳐가는 모습도 사랑스럽지만 스스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늘 새로운 생각이 들락이면서 어제의 관념(觀念)에 새로운 관점(觀點)을 추가하게 되는 것이 망외소득(望外所得)이었기 때문이다. 채운이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불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화(火)의 미음을 짐작할 따름이네요. 결국은 정화(丁火)에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관찰이 되는 걸까요?”

“열정(熱情)이지. 뜨거운 열정, 불타오르는 열정, 포기를 모르는 열정 말이네. 이것이야말로 정화(丁火)의 본질이고, 정화의 마음이고 촛불을 보고서 느낄 수가 있는 핵심(核心)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아, 열정...... 정화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열정이 없는 사람이 되나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세상에 정화가 없는 곳은 없으니 열정도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고 봐야지. 사주에 정화(丁火)가 있고 말고는 의미가 없는 것이야. 그것은 비교적 많으냐 혹은 적으냐로 나눌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네.”

“예? 사주에 정화가 없어도 열정이 있다면 정화가 열정이고 아니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왜 의미가 없겠어? 두 사람이 오행을 공부하는데 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분발(奮發)하고, 또 한 사람은 조금 하다가 그만두게 된다면 그 두 사람의 차이는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은 정화의 작용이 부족한데 사주에서도 그와 같다면 비로소 사주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어?”

우창의 말을 듣고서 채운이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수경(水鏡)이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 정화(丁火)는 열정(熱情)이라는 말씀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요. 심장(心臟)이 뜨거워지면 무슨 난관이라도 돌파(突破)할 열의(熱意)가 생겨요. 우리가 기문 도사의 가르침을 버리고 오행원으로 온 것도 열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올바른 것을 만났을 때 열정이 없으면 머뭇거리다가 또 10년을 허비하기도 하니까 말이에요.”

“오호~! 수경의 비유가 적절하구나. 바로 그것이라네.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다면 두려움은 이미 뒷전이라고 봐야지. 참고로 두려움은 오행이 무엇일까?”

“두려움의 오행도 있을까요? 말씀해 주세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생각해 보면 되지. 두려움은 공포심(恐怖心)이라고 하면 되겠나?”

“맞아요. 두려운 마음은 공포심이네요. 공포라면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같잖아요?”

“오호~! 그럴싸한걸. 심장이 왜 쪼그라들까?”

“두려움이 열정을 극(剋)하기 때문이겠네요. 그렇다면 정화(丁火)는 열정이니까 열정을 극하는 것은 공포(恐怖)가 되겠고, 그것은 계수(癸水)가 담당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맞아~! 그렇게 궁리하면 되지. 두려움은 열정을 꺾지.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 그것이 계수의 역할이라네. 물론 계수가 존재하는 것은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날뛰는 것을 잡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라네. 왜냐면 오행의 목적은 서로를 견제(牽制)하고 조절(調節)해서 중화(中和)를 얻는 것에 있으니까 말이네. 그런데 열정이 부족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앞을 막게 되지. 겁도 없이 아무 것에나 달려들면 불나방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것을 제어(制御)하는 것이 바로 계수(癸水)의 역할인데 촛불보다 더 약한 열정을 계수가 달려들면 희망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암흑의 세상이 되고 말지 않을까?”

우창의 설명하는 말이 강당을 올렸고, 다시 제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열정을 일깨웠다. 생각에 잠겨있던 채운이 우창에게 다시 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열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이에요. 세상의 삼라만상(森羅萬象)에서도 열기(熱氣)가 없으면 얼어붙어서 겨울이 되어버릴 거에요. 촛불처럼 작은 열정도 필요하고, 하다 못해 반딧불이만큼의 열정도 있어야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을 알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맞을까요?”

“그건 방향이 잘 못 되었군. 반딧불이에는 열정이 없어. 빛만 있지. 왜냐면 빛은 병화(丙火)의 영역이거든. 하하하~!”

“아, 아직도 이러한 것이 구분하기 어려워요. 우선 정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난 다음에 병화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시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방황하게 될 테니 다시 여쭐게요. 호호호~!”

우창은 채운의 순발력이 무척 맘에 들었다. 생각하는 것에서도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질문을 정리하고는 또 물었다.

“남녀가 애정(愛情)이 생기는 것도 열정(熱情)일까요?”

“당연하지~!”

“아하~!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어요. 남자가 맘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적에 ‘심장에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에서 착안(着眼)했어요. 사랑의 마음은 결국 정화(丁火)였었군요.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맘에 드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봐도 시큰둥할 수도 있으니 그런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없다고 하긴 어렵지, 그 사람도 심장은 있을 테니까 말이네. 다만 열정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있겠군.”

“아, 당연히 심장은 있겠죠. 호호호~!”

“그래서 사유(思惟)를 할 적에, ‘없다’와 ‘적다’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궁리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이네. 없는 것은 공포심에는 열정이 없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서 불타오르는 열정은 없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라고 해야 할 테니까 말이네.”

우창의 말을 듣고 있던 수경이 말했다.

“스승님, 처음에는 정화(丁火)는 매우 작은 촛불이고, 병화(丙火)는 태양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찮고 보잘 것도 없는 정화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스승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생각해 보니까 삶의 원동력(原動力)이고 학문을 궁리하는데도 없어서는 안 될 연료(燃料)라는 것을 알겠어요. 그동안 과연 무엇을 배웠나 싶어요. 참으로 밝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네요. 정말 감동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합장을 했다.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창도 합장하여 마주 인사를 받고서 설명을 이었다.

“세상의 이치는 천간(天干)에 다 들어있다고 봐야 하겠지. 그렇다면 그 천간이 하나하나에 자연의 이치가 가득하게 채워져 있지 않겠어? 어떻게 하찮은 천간과 대단한 천간이 있을 수가 있을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듣고 이해를 했었지. 그런데 하충 스승님의 가르침을 책에서 발견하고서 너무나 감동해서 소름이 돋았었다네. 정화(丁火)는 열정이었고, 학문의 길을 꾸준하게 이어가는 촛불이었던 것이라네. 마치 촛불이 밤이 새도록 학자의 책상에서 공부의 열정을 키워주듯이 말이네. 하하하~!”

우창의 말에 깊이 감동한 수경이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열정은 일개의 곤충(昆蟲)도 있겠어요. 그들이 자손을 번식시켜서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암수가 짝을 찾아서 헤매잖아요. 그리고 나무도 개화(開花)해서 수분(受粉)하려면 또한 정화(丁火)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단순하게 나무로 불을 피운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다가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다니 깜깜하던 눈앞에 신천지(新天地)가 활짝 열린 것만 같아서 가슴이 뛰어요. 흥분(興奮)했나 봐요. 호호호~!”

수경의 말을 들으면서 우창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자가 붓을 들어서 글을 한 자 쓰는 것도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네. 그리고 또 그렇게 쓴 글은 다른 학자의 심장에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열정이 없이 쓴 글은 아무도 그 심장에 불을 붙일 수가 없다는 말도 된다는 이야기지. 어떤 글은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 어떤 글은 읽어도 감흥이 없는 것을 느꼈을 것이네. 어떤 것이 그런 걸까?”

수경이 잠시 생각하고는 우창의 물음에 답했다.

“제자가 생각하기에 법전(法典)은 읽어도 감흥이 없어요. 내용은 참 중요하고 좋은 말인데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되는데 이것은 열정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간지(干支)의 이치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들으면 마음은 황홀해져요. 이러한 차이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시니까 비로소 알겠어요. 글이라고 해도 모두가 열정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네요.”

“맞아. 그래서 법률(法律)을 담은 글은 차가운 머리로 썼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사람도 그렇게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는다고 하지. 과거(科擧)를 봐서 벼슬을 하려면 공부는 열정적으로 해야 하지만 시험을 치를 적에는 냉정한 이성으로 답을 써야만 급제(及第)를 하는 것이겠지. 다만 학자가 자유롭게 궁리할 적에는 아무것도 구애를 받지 말고 파고들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열게 된단 말이네.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것을 불태워버리고 돌파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아서 만족하고 포기할 것인지는 온전히 스스로의 열정에 달렸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수경도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완전히 이해되었어요. 작은 불티에도 열정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그 작은 불티가 숲에 옮겨붙는다면 온 산을 불태워버리기도 한다는 것도 생각하니까 과연 정화(丁火)가 촛불이라고 했던 것은 틀렸다고는 못하더라도 사로(思路)를 막아버린 죽은 지식(知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관점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시야(視野)를 넓히게 말이에요. 호호호~!”

“또 다른 관점이라.... 가령 어린아이들은 열정이 많아서 뭐든 배우고 알아보려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지? 그것은 열정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겠네. 그리고 한 번씩 열정이 폭발하면 열병(熱病)이 들어서 열이 펄펄 나기도 하지. 그것을 알음장이라고도 하고 알음증이라고도 하는데 지혜열(智慧熱)이라는 말로 하기도 해. 그리고 알음장을 앓고 나면 아이의 지혜가 부쩍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명한 부모는 가만히 두기도 하거든. 이러한 현상도 지식의 열정이 불을 붙여서 그런 것으로 봐도 될 것이네.”

우창의 말에 채운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경험이 없는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울고 불논 난리를 치지만 경험이 많은 할머니가 가만히 두라고 하죠. 그렇게 하루를 재우고 나면 열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다시 활발하게 뛰어놀아요. 물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도 열이 내리지 않고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때는 의원을 찾아야 하겠지만 대부분 아이는 그렇게 반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채운이 감탄한 것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노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응? 노인에게서 뭘 깨달았기에?”

우창이 이렇게 묻자 채운이 다시 신이 나서 말했다.

“나이를 먹게 되면 늙어서 허리는 구부정하고 눈빛도 흐릿해져요. 세상의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대해서도 무덤덤하고 무감각(無感覺)해지기도 해요.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아들이 바람이 났다고 며느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그렇게 말하죠. ‘냅둬라, 그러다가 또 돌아오느니라.’라고 말이죠. 당장 열불이 나서 미칠 지경이 된 며느리가 펄펄 뛰는데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노인을 봤던 적이 있는데 지금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정화를 공부하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다 떠오를까요?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미있어요. 호호호~!”

“그렇군. 참 좋은 경험을 하셨네. 그 나이가 되면 보통의 사람은 열정(熱情)이 식게 되지. 그리고 열정이 계속 펄펄 끓어오르면 몸이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살아가려고 그렇게 되기도 할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나이가 80세가 넘어도 열정적으로 활동하기도 한다네. 그러한 사람은 늙어도 늙은 것이 아니라고 해야겠지. 강태공(姜太公)이야말로 그 본보기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어? 하하하~!”

“아, 강태공은 80세에 문왕(文王)을 만나서 천하의 진리를 펼쳤다고 하잖아요? 정말이네요. 학자는 비록 몸이 늙어도 마음은 늙은 것이 아니었네요. 그리고 마음이 늙는다면 학문도 더 이상의 진척(進陟)은 없을 것으로 봐도 되겠어요. 대체로 나이가 들면 자신이 얻은 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커지고 그것을 과감(果敢)하게 바꾸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에요.”

“나이가 들어도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얼굴에 생기(生氣)가 돌고 화색(和色)이 넘친다고 봐야지. 그래서 잿빛의 얼굴을 한 노인에게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온화(溫和)한 모습의 노인에게서는 새로운 지식이 샘솟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으니 관상을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정화(丁火)의 이치는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맞아요~! 동감이에요.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학자의 노년은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년(靑年)이 되겠어요. 호호호~!”

채운이 이렇게 말하면서 밝게 웃는 것을 보면서 우창이 물었다.

“채운은 정화(丁火)를 일러서 문명지화(文明之火)라는 말은 들어봤나?”

“아, 들어본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물어봤죠. 정화가 촛불이라고 하면서 책에는 왜 문명(文明)의 불이라고 써놨는지를 말이에요. 그랬더니 ‘촛불은 문명이 만든 것이니까 그렇다’고 하는 답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는 그런가 보다 했죠. 그런데 오늘 스승님께서 그 의미를 말씀해 주신다면 전혀 다른 관점을 얻게 되지 싶어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정화를 문명지화라고 한 의미가 궁금해요.”

채운의 호기심(好奇心)이 가득한 눈을 보면서 우창이 설명했다.

“문명(文明)은 문자(文字)로 밝힌다는 뜻이 아니겠어? 문자는 문명의 시작이라고 봐야지. 그리고 문자는 학자가 쓴 글에서 나오는 거야. 왜냐면 학문은 계속해서 등불을 전해주고 전해 받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지. 어제의 학문을 배워서 오늘은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서 기록하고, 다시 그 글을 읽은 후학이 자신의 깨달음을 추가(追加)하여 후세에 넘겨주는 것이거든. 그래서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인 거야.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서슬 시퍼런 눈과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마지막에 깨달은 것을 적어놓고서야 미소를 짓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창의 희망이기도 하다네. 하하하~!”

우창의 말에 제자들의 마음도 숙연(肅然)해졌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학문을 대하고 있는 우창인지를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불처럼 뜨거운 침묵이었다. 저마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고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수경의 말이 침묵을 깼다.

“스승님의 열정에 대한 말씀을 듣고 보니 수경의 열정은 그야말로 태양 앞의 모닥불이었어요. 이제부터는 더욱 많은 열정으로 불길을 거세게 해서 앞에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오행의 이치를 깨달아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한 조각 더 얹을 수가 있는 날이 오도록 분발(奮發)하겠어요. 그래야 스승님의 거룩한 은공(恩功)을 갚는 것이 아니겠어요? 더구나 어제 했던 생각이 오늘 달라진다고 해서 꺼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알다니요. 어제 어렵게 알았던 것이 행여라도 오늘 바뀔까 봐서 두려워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읽고 외웠던 나날들이 왜 이렇게도 우습게 느껴지죠? 그러다가 엉뚱한 생각이 들면 그것을 망상(妄想)이라고 여겨서 싹둑 잘라버리고는 어제의 생각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했지 뭐에요.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오네요. 스승님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게 도대체 뭐냔 말이죠. 호호호~!”

수경의 말을 듣고서 공감하는지 여기저기에서 탄식(歎息)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겨우 스승의 가르침을 베끼는 것에만 골몰했을 뿐이지 새로운 이치를 접해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경이 하는 말에 우창이 정리하면서 말했다.

“축하하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깨달으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방황(彷徨)의 늪을 건너왔기 때문에 가르침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으니 반드시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이니까 말이네. 그 열정으로 오행원을 불바다로 만들어 간다면 또한 날마다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하게 채울 수가 있을 테니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느냔 말이지. 그래서 고인이 말하기를,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고 했다잖은가. 하하하~!”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잖아요? 어쩜 그렇게 멋진 말이 있을까요? 그건 어디에 있는 말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채운이 관심을 보이며 말하자 우창이 기억을 더듬어서 말했다.

“분명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논어(論語)』에서 봤던 것같군. 출처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중요한 것은 그 뜻에 있으니 말이지. 하하하~!”

우창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내용을 받아 적고 있었다.